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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4  통권 219호  필자 : 주안  |  조회 : 3441   프린트   이메일 
[기획]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 산둥(山東)성 선교사 3인의 이야기 (2)
녹록지 않은 선교지 상황
산둥성 라이양은 칭다오에서 120㎞, 옌타이에서 110㎞ 떨어져 있는 곳이다. 1913년 9월 하순 3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은 안둥현(安東縣·현재 단둥)과 다롄(大連)을 거쳐 옌타이에 도착했다. 선교사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평양 장대현교회를 출석한 적이 있었던 중국인이었다. 선교사 일행의 중국행 경로는 이상규(李尙奎) 신문조서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21세의 9월 하순경 나는 당시 조선기독교장로회로부터 山東省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朴泰魯, 史秉淳, 金永勳 등 3인 및 그 가족 등과 함께 기차로 安東縣까지 가서 1일 체재한 후 제14 共同丸을 타고 大連을 경유하여 즈푸(芝罘·현재 옌타이)에 동년 10월 상순경 도착하고, 나는 그곳의 信道學校에 남고, 위 3인의 선교사 등은 山東省 來陽城이라는 곳으로 갔다.


선교사 일행은 옌타이에서 며칠간 머문 뒤 당시 산둥성에서 상당히 낙후된 라이양으로 향했다. 옌타이엔 서양선교사들을 위한 언어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신임 선교사들이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지만 한국선교사들은 곧장 선교지로 달려갔다. 그러나 옌타이에서 라이양까지는 161㎞ 남짓 됐다. 두 마리 노새가 끄는 가마를 타고 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였다. 구토, 낯선 잠자리, 고국과 전혀 다른 거리, 알아들을 수 없는 ‘하이 톤’의 말 등 부닥치는 상황마다 선교사부인과 자녀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선교사자녀들은 고향 친구들이 그리웠고 사모들은 고국 생각이 간절했다. 목사, 선교사보다 사모나 자녀들은 더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선교사 일행이 라이양에 도착하자 그들을 원래 돕기로 했던 현지 중국인전도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일행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새로운 사역자들이 오게 돼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시기심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갑작스러운 돌출 행동에 선교사 일행은 이국에서의 밤이 무척이나 길었을 것이다. 급하게 필요한 가사도구를 빌려 보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들을 존중해 주던 고국의 교회들이 매우 그리웠을 것이다. 이때 옌타이에서부터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어 교사의 도움을 받아 일행은 중국인 가옥에 겨우 여장을 풀었다. 이렇게 해서 라이양현 서문내(西門內)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사모들은 현지 적응이 쉽지 않았다. 남편들은 언어공부, 외부인사 접촉 등으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아내들은 상대적으로 덜했기 때문이다. 사모들은 음식 장만을 하는 것부터 골칫거리였다. 자유롭게 시장을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쌀을 구경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식습관을 점차 바꿔가야 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곡물이라고는 밀가루, 소미(좁쌀)뿐이었다. 사모들은 매일 집안일을 하면서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쌀 대신 소미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자료를 보면 라이양은 높은 성곽으로 둘러있고 거주민이 100만 명에 달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청나라 조정과 서구 열강에 맞서 매우 강력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었다. 그중 하나가 1910년 산둥판 신해혁명의 서막이 된 농민봉기인 납세거부운동(항연항세·抗捐抗稅)이었다. 그 결과 복음전파가 여의치 않게 됐다. 라이양인들은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간주하고 선교사들의 전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문맹률까지 높다 보니 선교사들이 설령 전도했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사역을 해야만 했다. 

3명의 선교사는 중국인 어학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라이양에서 사역하려면 현지 방언 또한 익혀야 했기 때문에 산둥 출신 어학 선생에게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웠을 것이다. 표준 중국어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도 산둥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크다. 초기 선교사들을 돕는 어학 선생 월급은 본국 총회 전도국에서 세운 예산에서 지출됐다. 선교사는 어학 선생 월급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915년 가을 총회 전도국과 1916년 보고서를 보면 당시 한국선교사들의 중국어 습득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中華民國(중화민국)宣敎師(선교사)의 어학형편은 점점 진보하오며….” “中華民國 선교사가 다 한어를 배워 講道(강도·설교라는 의미)와 전도하는 데 잘하오며….” 설교를 잘한다는 보고이지만 사실 깊이 있는 말씀을 나누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말로 목회한다는 것은 일상의 대화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어라는 장벽은 매우 높았다. 박 선교사는 자신이 중국어 발음을 모르기 때문에 글자를 아는 무식자와 같다고 고백했다. 1917년 산둥선교사로 라이양에 파송된 홍승한(洪承漢) 목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세상에 학(學)키 용이한 문자는 별무(別無·없으되)하되 중국 한문자란 것은 자수(字數, 글자의 수효)의 번다(繁多, 번거롭게 많음)와 자의(字義, 뜻)의 변동과 성음(聲音)의 분별이 천태만상이라 학키 심난(甚難, 매우 어렵다)하여 10년 이상을 학습해야 서책을 간투(看透·알아차리고)하고 장구(章句, 문장의 단락)를 제작하는 고로 부가자제(富家子弟, 부잣집 자손)나 능히 입학하고 빈가자제(貧家子弟, 가난한집 자손)는 능히 배우지 못함으로….”(1920년 7월 20일 발행 신학지남 제3권 제2호)

선교사사모들은 더 힘들었다. 가사노동과 자녀양육 등으로 중국어를 제대로 익힐 수 없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 심지어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파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자녀교육, 의료 문제 등에 대해 어떤 대책도 없었다. 당시 라이양에는 의사가 한 명도 없어 질병에 걸리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선교사들이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선교사자녀 교육, 안식년제도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도 선교사자녀 교육 문제로 인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초기 선교사 역시 그러했다. 한 서양선교사의 언급을 통해 당시 선교사 자녀 교육 문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동료 선교사의 자녀들이 거리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저속한 말을 배워도 별다른 교육 방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선교사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1915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선교사자녀 교육 문제가 언급됐지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월 선교사자녀 교육비 항목을 두고 비용을 지출한 것이다.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의한 1912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 총회나 1913년 선교사 파송 이후 각종 회의에서 선교사 파송 규칙이나 규정이 문서화가 되지 않았다. 선교사 안식년 규정 또한 마련돼 있지 않았다. 훗날 2명의 선교사가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없이 사역지를 이탈한 지 1년이 지나도 선교사 안식년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안식년 규칙이 마련된 것은 1918년이었다.


선교사 이탈 문제 발생과 고군분투한 박태로 선교사의 소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 재정을 전국 교회의 감사헌금과 헌물로 충당하기로 했다. 당시 사회 여건상 감사절에 가장 많은 헌금과 헌물이 걷혔다. 1년 교회경상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액수였다. 각 교회의 감사절 헌금은 노회 담당자에게 보내졌다. 담당자는 그것을 총회 전도국으로 보내 선교 예산 책정 및 집행이 이뤄지게 했다. 선교사들은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만 재정 사용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 간 갈등이 생길 요소가 적었다.


3명의 선교사에게 지출된 항목은 다음과 같다.선교사 3인의 팔삭(八朔, 8개월분) 월급 690원, 팔삭 자녀금 143원, 어학 선생 팔삭 월급 117원, 김영훈·사병순 등을 도와준 것 50원, 선교사 여행비와 이사비 134원 12전1리, 응접실 용비 19원 52전1리, 가옥세금 200원, 특별비 78원 86전8리, 수리비 198원 34전9리, 전도비 12원 82전4리, 김찬성 시찰여행비 62원 1전, 박태로 시찰여행비와 월급 291원 79전 등(1914년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계보고), 선교사들은 귀국하게 될 때마다 전국 교회를 돌며 사역 보고만 하면 됐다. 3명의 선교사 가운데 사병순 목사는 본국 교회에서 선교사역 보고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사역을 끝마쳐야 했다.

3명의 선교사는 산둥성 라이양 사람들을 모으고 전도하는 데 힘썼다. 중국에서 전례가 없었던 주일 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1915년 봄, 박 목사의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주 기침이 나고 열이 났다. 마침내 박 목사가 더 이상 사역하기 어려워졌다. 1916년 4월 26일 박 목사와 그의 가족은 김영훈, 사병순 목사와 그들 가족과 작별을 고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박 목사 가족은 인천, 경성(서울)을 거쳐 황해도 봉산 사리원으로 이동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심해져만 갔다. 1916년 6월 초 그는 경성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내과의사는 박 목사 병의 이유를 정확하게 찾지 못했다. 단지 위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견만 내놓았다.

병중에도 박 목사는 그해 9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는 전도국장인 김익두 목사의 사회로 열린강설회(講說會)에서 중화민국선교 상황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그의 보고는 ‘어떻게 감사로 보답할꼬’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당시 어법이 쉽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보고를 현재 통용되는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부족한 이 사람이 선교사가 되고 조선인으로서 중국에서 사역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선교지에서 천대를 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고생과 병중에 있을 때 위로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믿는 이들이 점차 증가했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로부터 복음서를 구입한 군인 한 명이 자신의 동료를 전도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중국인들이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눠준 전도지를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강의도 잘 경청하기에 전도 가능성이 큽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 말씀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박 목사의 철수는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역하던 두 선교사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1917년 봄 총회 전도국의 허락 없이 선교지를 떠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에 총회 전도국은 치료 중인 박 목사에게 ‘SOS’를 쳤다. 그는 방효원(方孝元) 목사와 함께 다음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할 때까지 임시로 라이양으로 다시 나가기로 했다. 그의 중국행은 세 번째였다. 그러나 앞선 두 차례와는 달리 병약한 몸에 의지한 행로였다. 1917년 5월 7일 박태로, 방효원 목사는 고국을 떠나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9일 만에 라이양에 도착했다. 라이양의 중국인 성도들은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10리 밖까지 나와 선교사 일행을 맞이했다. 다음날에는 라이양 외촌(外村)에 있는 교우 43명이 모여 환영모임을 열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같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맞이한 것처럼 현지 성도들은 선교사들을 몹시 좋아했고 존경했다.


박 목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또 전도에 나섰다. 그의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라이양교회는 세례 받은 성도 18명 등 53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박 목사는 서리집사 2명을 세워 교회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위중해져서 옌타이로 떠나야만 했다. 교우 30여 명이 새벽에 모여 그를 위해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박 목사는 옌타이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옌타이 출신 교우들의 간호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이었다. 선교사란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스스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자기 몸을 아끼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박 목사는 느꼈을 것이다. 박 목사는 목회자로서 총회의 요청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황해도 재령읍교회의 위임목사 직분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 선교사가 될 것을 요구받고 중국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려 했다. 귀국한 박 목사는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걷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곧바로 경성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6개월간 치료를 받고 세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들조차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박 목사는 사리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한 번 누우면 옮겨 누울 수 없을 정도였다. 1년간 몸 한쪽만을 의지한 채 누워있어야 했다. 박 목사 부인의 주름살은 늘어가기만 했다. 자녀들도 한숨 속에서 지내야 했다. 박 목사는 결국 사리원 자택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1918년 9월 6일, 그의 나이 48세였다. 박 목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사리원 서부교회 앞에 있는 집에서 할머니가 된 박 목사 부인과 그의 아들이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질 뿐이다. 9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 초기 선교사 박태로 목사의 이름은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역사와 중화기독교회연감(中華基督敎會年鑑)에 똑똑히 기록돼 있다. 박 목사의 개척정신과 희생은 동생 박태화 장로를 통해 가계 모두 목회자로 헌신하는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졌다. 박태로 목사의 동생인 박태화 장로의 장남 박경구 목사는 순교자로, 박경구 목사의 아들 박창환 목사는 신학자로, 박창환 목사의 아들·손자인 박호진·박범 목사는 목회자로 하나님께 헌신했던 것이다. 

박경구 목사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 교사와 사리원 덕성보통학교 교장을 거쳐 진남포 득신학교(得信學校) 교장으로 헌신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한 후 1941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서부교회에 부임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이후 1944년 겸이포중앙교회에 부임했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45명의 교인들과 함께 정방산에 모여 수양회를 가졌다. 일제 경찰은 이를정방산 비밀결사로 몰아 모든 사람들을 체포했고 박 목사는 모진 고난을 받아야했다. 해방과 함께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박경구 목사는 석방돼 장연읍교회에서 시무했다. 

박창환 목사는 오산학교를 거쳐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에 입학한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다. 당시 졸업반에는 나운영, 전봉초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 말기였기에 유학생활은 몇 달 가지 못해 귀국해야 했다.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돼야 한다.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는 부친 박경구 목사의 편지와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진학, 공부하다가 일본 해군에 징집됐다. 징집된 지 한 달 만에 해방으로 인해 무사히 귀환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던 박경구 목사도 이때 석방돼 온 가족이 함께 모였다. 박경구 목사는 아들 창환에게 서울로 가서 신학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1946년 늦가을, 박창환은 어선을 타고 남하했다. 한편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교회탄압에 박차를 가했다. 신학교 동기였던 강양욱(김일성의 외척)이 박경구 목사에게 조선기독교도연맹 황해도 중앙위원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가까운 이들이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지만내 양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거절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박경구 목사는 체포된 뒤 해주감옥에 수감됐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공산군은 감옥의 죄수들을 모두 학살했다. 10월 15일 박경구 목사도 손과 발이  토막 난 채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남하해 조선신학교 2학년에 편입한 박창환은 조선신학교 편입 1년 만에 이른바 신앙동지회사건이 터져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박형룡 박사가 있는 부산 고려신학교로 옮겼다.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 9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와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자 박창환도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1948년 7월 9일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됐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1948년 9월 학기부터 신학교 어학 전임강사가 돼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후 미국 뉴욕의 성서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위트워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1년부터 3년간 인도네시아선교사로 사역한 기간을 빼면 1948년부터 1987년까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으로 봉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박창환 목사의 아들 박호진 목사는 사업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공부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박호진 목사는 서울동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뒤 명성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고,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한국교회의 순교역사를 후대에 알리는 일에 힘썼다. 2012년 4월 17일 예장 통합측 평북노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5대 목사 가계가 탄생했다. 박호진 목사의 아들 박범이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김영훈·사병순 목사의 미국 생활과 좌절
많은 선교학자들은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중국 산둥성 라이양에서 활동했던 3명의 선교사에 대해 도중하차라는 이유를 들어 실패한 선교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만 봐야 할까. 선교지에서 무단이탈한 김영훈과 사병순 목사는 훗날 어떻게 됐을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두 목사를 책벌하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했다. 총회의 관대한 처분으로 징계를 면한 두 목사가 고국에서 목회활동을 포기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기록을 찾아보면 반전 인생을 발견하게 된다. 1903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몇 명의 한인들이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 중 기독교인들이 숙소를 순례하며 기도회를 가진 것이 계기가 돼 세워진 상항한국인감리교회(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에서 김 목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는 필자가 지난해 이 교회 내부에 전시돼 있는 사진들에서 발견한 것이다. 1920년 12월 19일영코리안아카데미 제7회 총회 사진과 1921년 12월 18일 ‘흥사단’ 제8회 북방대회 사진 2장이 바로 그것이다. 또 이 교회로부터 건네받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에서 낯익은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책 부록 726∼727쪽 한인교회들의 통계(1914〜2002)에서 김 목사 이름이 또다시 발견됐다. 이 통계에 따르면 그는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새크라멘토 한인교회 목사로 있었다. 신한민보 1919년 6월 10일자는 김영훈씨의 목사 피임 새크라멘토 교회관리라는 제목으로 김 목사가 새크라멘토교회 담임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통계에 따르면 김 목사는 1921년 맨티카와 맥스웰, 윌로스, 스톡톤한인교회의 순회 설교자로 있었다. 당시 교세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새크라멘토교회 출석교인은 1917년 51명, 1918년 70명, 1919년 47명, 1920년 67명 등이며 1921년 맨티카교회 출석교인은 20명, 맥스웰교회는 35명, 윌로스교회는 30명, 스톡톤교회는 22명 등이었다.

두 목사는 1917년 7월 20일 차이나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해 7월 26일 신한민보에 따르면 그 배에는 리혜두, 리석원, 박영관, 김극로, 박영섭, 오정수, 김유신 등 여러 한인과 미주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의 약혼자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두 목사는 상항한국인감리교회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7월 30일 오후 8시 30분 옥(Oak) 스트리트에 있는 이 교회에서 두 목사의 미국행을 환영하는 행사가 이대위 담임목사의 인도로 열렸다. 두 목사는 다음 달 29일 맨티카한인회가 주최한 국치기념행사에도 참석하고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 사 목사는 이날 기도를, 김 목사는장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연설까지 했다. 그해 가을 김 목사는 상항한국인감리교회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중국어로 연설했다. 이는 중국선교사 경력을 인정받아 특별순서를 맡은 그가 예배에 참석한 중국인들을 배려해 중국어로 연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김 목사의 행로를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김 목사는 미주 한인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 한인청년 전명운에 이어 상항한국인감리교회 성도였던 장인환이 오클랜드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주미 일본영사와 함께 차에서 내린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스티븐스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에 임명된 뒤 일본의 한국 침략행위를 왜곡하는 데 앞장섰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 의거의 영향으로 재미 한인단체(공립협회와 합성협회 간) 통합이 이뤄지면서 국민회(國民會)가 조직됐다. 상항한국인감리교회 이대위 목사가 양회 합동 발기인이 되는 등 상항한인교회 인사들이 국민회 탄생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김 목사는 1918년도 국민회 북미지방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새로운 임원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는 1917년 12월 8일 선거를 통해 다음 해 임원을 선출했다. 그해 신한민보 12월 20일자에 따르면 회장 임정구, 부회장 김원서, 총무 하상옥, 서기 리살음, 재무 강천명, 학무원 백일규, 법무원 김영훈, 실업부원 황사선, 구제원 송찬균, 대의원 홍언 등이었다. 김 목사는 다음 해 1월 2일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및 부회장 취임식에서 대표기도를 인도했다. 그는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이대위 목사의 요청으로 총회 법무원을 맡게 돼 1월 20일 지방회 법무원 직책을 사임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소년서회를 넘겨받아 서회 경영에도 나섰다. 소년서회 주인은 원래 주원 씨였으나 그가 1월 19일 귀국하게 되면서 김 목사가 소년서회의 상호와 소유 서적을 모두 넘겨받았다. 당시 소년서회는 샌프란시스코 매손 스트리트 1242에 있었다. 1918년 9월 5일자 신한민보의 소년서회 광고를 보면 서회가 판매하던 일부 서적을 알 수 있다. 헌법요의, 외교통의, 간명교육학, 말의 소리, 웅변법, 말의 소담, 산술신서, 국가사상학, 대한역사, 초등식물학, 고등산학신편, 춘향전, 주역, 대학, 논어, 맹자, 중용, 해당화, 공산명월, 신약소본, 찬송가. 김 목사는 서회를 운영하면서 맨티카 예배당 건축헌금 3원(신한민보 1918년 9월 5일), 국민의무금 5원(신한민보 1918년 10월 3일)을 납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까지 소년서회를 운영하다 서적 사업 전부를 흥사단 본부로 매각, 처리했다. 새크라멘토교회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김 목사 새크라멘토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국민회 중앙총회는 그에게 중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직책을 맡겼다. 이에 그는 우리 민족의 활동과 중국 및 동양의 관계를 들어 강하면서도 간결한 중국어 문장을 작성, 샌프란시스코 지방 중국신문인 중서일보 1919년 4월 30일자에 발표했다. 김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거주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도와 달라고 호소한 뒤 6월 7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새크라멘토 거주 중국인들과의 교섭을 맡았다. 6월 15일 새크라멘토 지방 중화회당(中華會堂·현재 중화회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는 중국어로 연설했다. 김 목사는 중화회당에서 100여 명의 중국인이 모인 1919년 6월 15일 행사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연설 뒤에는 중국인 각 단체 직원들의 요청으로 중화루(中華樓) 만찬에 참석, 마침내 중국인들로부터 국민회 활동을 돕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김 목사는 1921년 10월에는 국민회 북미총회 총회장 후보가 됐다. 총회장 후보가 되기 전인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 그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회의록을 보면 김익두 목사는 “지금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영훈 씨가 중국 산둥으로 다시 보내 주시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다”고 밝혔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김영훈 목사는 고향인 평북 의주 의산노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의산노회장은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였다. 의산노회는 교인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은 의주읍 서교회 김창건 목사 대신 김영훈 목사를 임시목사로 파송했다. 김 목사는 1923년 2월 27일 의산노회를 통해 정식으로 서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1년 뒤 그는 의산노회장이 됐고 1925년에는 의주 최초의 사립학교인 양실학교장이 돼 인재양성에도 앞장섰다. 김 목사는 1927년 9월 9일 원산부 광석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청산유아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1932년 2월 그는 웬일인지 서교회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실로 경악스럽다.사경회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대접을 받으러 가는 길에 우리나라 장로교회 총회에서 제1대 선교사로 산둥에 파송됐던 김영훈 씨를 만났던 일이 있다. 그날 그는 술에 만취돼 지나가고 있었는데 최득의 목사님이 그를 지목하며 저이가 김영훈 씨인데 저렇게 타락됐다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고 떨리는 마음을 가졌다….” 이는 의산노회 겨울 사경회 강사였던 김경하 목사의 회고이다. 김 목사가 무엇 때문에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었을까. 우리나라 1대 산둥성선교사, 미주 독립운동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까운 말로를 맞았다. 그가 1939년 소천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그만큼 그는 한국교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된 것이다.


한편 사병순 목사는 비교적 소박하게 미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9월 5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사병순 목사는 김 목사와 함께 새크라멘토에서 남쪽으로 100㎞ 떨어져 있는 맨티카교회 건축을 위해 각각 5원씩 헌금했다. 그해 10월 24일자 신한민보는 그가 다뉴바 지방회 학무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뉴바지방의 한국어학교(1반 6명, 2반 4명, 3반 3명 총 13명)에서 대한역사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사 목사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다뉴바였다. 그가 담임했던 다뉴바한인교회는 웨스트 O(오) 스트리트와 알타 에비 교차로에 있었다. 현재는 더 이상 교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뉴바 경찰국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대신 교회 옛터 앞에는 기념비가 있었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하려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노력의 결실이었다. 기념비에는 이민 선조들의 믿음, 고난과 겨레 사랑을 기념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왔던 한인 노동자와 본국에서 온 정치 망명 인사 유학생들이 농장 일자리를 찾아 1909년부터 이곳 다뉴바시로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여름 수확기에는 한인인구가 350여 명을 넘었다. 1912년 10월 15일에 이 이민 선조들이 바로 이곳 204 웨스트 O 스트리트에 처음으로 장로교한인교회를 세웠다….” 비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 1주기를 맞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에서 열린 기념식 장면과 1940년대 다뉴바한인장로교회 성도들 모습, 다뉴바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사진도 새겨져 있다. 


다뉴바시 메인스트리트인 L(엘) 스트리트에서는 1920년부터 매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도 이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연설했다. 3·1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한인 여성들은 다뉴바한인장로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출범시켰다. 대한여자애국단이 1920년 3·1절 기념 시가행진에 앞서 촬영한 사진을 L 스트리트 한켠에 있는 기념비에 새겨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시가행진이 펼쳐진 그 장소에 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여성들은 마치 나이팅게일을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순결한 한민족의 고고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당시 어렵게 일하던 농장 노동자들을 독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 정부에 보냈다. 일본산 간장 안 먹기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사 목사의 활동 기록은 1921년 2월 17일자 신한민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뉴바 국민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 대표기도를 했다. 그해 2월 27일에는 국민회 다뉴바지방회에, 3월 1일에는 독립만세운동 경축행사에 참석했다. 1921년 3월 1일 새벽 5시 30분 새벽광복기도회에서 사회를 본 데 이어 오전 9시 경축회에서 대표기도를 인도하기도 했다.

또 다른 독립운동 기지는 리들리로 다뉴바로부터 11㎞ 정도 떨어져있다. 리들리는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머문 버거스호텔이 있는 곳이다. 이밖에 리들리한인장로교회, 한인공동묘지 등이 있다. 현재 J(제이) 스트리트에 있는 리들리한인장로교회도 더 이상 한인교회가 아니다. 오순절 계통 미국인교회로 변해 있다. 리들리에는 현재 안창호와 이승만 등 애국 지사 10명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독립문이 세워져 있다. 지난해 10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의 노력으로 건립된 독립문은 높이 4.2m로 실제 독립문 원형의 4분의 1 크기이다. 


사 목사에게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찾아왔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던 부인 송수은 사모가 1921년 일경에 체포된 것이다. 송 사모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에 가입했다가 군자금 모집과 배일사상의 선전 및 불온문서의 배포 혐의로 체포됐다. 송 사모의 징역형 선고 소식은 1921년 11월 10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됐다. 여성으로서 독립자금을 거둬 임시 정부에 보내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송 사모는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송 사모가 감옥생활을 하던 시절 사 목사는 미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다. 1921년 6월 다뉴바 교민들에게 구미위원부 경비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해 8월 5일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 지부 창립 기념식에 참석, 대표 기도를 맡았다. 아마 그때 고국에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눈물의 애국가를 불렀을 것이다.

사 목사는 다음해 갑작스럽게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그해 출옥한 송 사모는 고문의 후유증 탓인지 세상을 떠났다. 그때 사 목사와 송 사모 사이에는 9살 된 어린 딸 사인애(史仁愛)가 있었다. 사 목사는 고국의 고아원에 후원금을 보내는가 하면 한인의 장례 및 하관식 예배를 주관하며 1924년까지 다뉴바에서 활동했다. 1924년 로스앤젤레스 3·1절 행사를 끝으로 그의 미국 행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1930년대 잠시 중국에 나타났다. 1935년 8월 톈진(天津)에 머물던 사 목사가 교역자 공석인 톈진한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던 것이다. 관련 소식은 1937년 1월 19일자 기독신보에 나와 있다. 주야로 열심히 전도하던 김성수 씨는 임기가 돼 귀국해 (현지에) 머물던 전 조선장로회 목사 사병순씨가 예배를 인도하시며 수고하였다.” 

사 목사는 1944년 8월 9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서 67세의 나이에 소천했다. 이와 관련하여 사 목사의 외손자 김희준 권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외조부(사병순 목사)는 사망 1개월 전 강원도 금화경찰서 고등경찰계에서 혹독한 고문조사를 받으신 뒤 풀려났어요.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때가 저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사 목사가 소천 전까지 독립운동에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나가는 글
김영훈 목사는 1927년 7월 27일자 기독신보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무단이탈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당초 내가 철수한 본의는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도국이 (선교사들이) 선교할 때 제반 시설을 마련해줘야 한다. 서양(선교사)과 같이 풍족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빈약한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는 철수에 앞서 선교 목적을 완수했고 (선교)토대 또한 구축했음을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초기 선교사 3명은 주거 문제,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1913년부터 1916년 봄까지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가정은 한 집에서 함께 기거했다. 1916년 봄 박 선교사가 몸이 아파 귀국한 뒤에는 두 선교사 가정이 한 집에서 살았으며, 1년여가 지나자 각자 사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질병에 대처할 방도가 마땅하지 않았다. 김영훈 목사는 1915년 총회에 의사를 보내줄 것을 정식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태로 선교사가 병이 심해져 1916년 봄에 귀국하게 된 것이다.

3명의 선교사는 이 같은 난관에도 굴하지 않았다. 라이양 부근 각 촌에 있던 교인 5∼6인을 모아 마침내 성내에 교회를 세우게 됐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전도와 교회개척을 목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자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따라서 이들 선교사는 목회훈련 및 신학공부를 통해 목사선교사로서의 준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기에 선교지 부임과 함께 중국어를 익히며 문서를 통해 전도했다. 그 결과 1915년 가을과 겨울에 5∼6명의 신입교인을 얻어 전체 교인이 40여 명에 달했다. 평균 집회 참석자는 30여 명이었다. 1915년에는 중국인 3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선한 증거를 보인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전도하는 방법과 교회를 치리하는 것을 개량하여 다 진리대로 행하고 주일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를 설립한 일과….” 김영훈 선교사의 고백이다. 선교사들은 고국에서 하듯이 선교활동을 해나갔다.

1915년 성탄절에는 라이양교회 성도 30명이 인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당시 라이양교회는 완전한 조직교회가 아니었다. 전도실의 기능을 가진 미조직 교회로복음당(福音堂)이라고 불렸다. 1916년 가을경의 교세를 보면 세례인 12명, 원입인 30명, 집회 참석 인원 40여 명에 매주일 헌금이 80∼90전. 1년 주일헌금 총계는 50원이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헌금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중국교회가 자급해 나가야만 자립할 수 있다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외국 자본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 재정을 보조하는 것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조선에서 활동했던 곽안련 선교사는 당시의 중국 교인들의 연보정신에 대해 이같이 말한 적이 있다.우리 선교사가 말을 통해 전도하기 시작하자 중국 교인은 연보에 대한 정신이 도무하기 때문에 교회에 돈 드는 일은 전부 의뢰하는 것뿐이었고….”(곽안련, 장로교회사전휘집)


3명 선교사의 하차로 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 주거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총회가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를 위해 1917년 12월 2000원을 지원해 라이양 남문 밖에서 사택을 매입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선교사 사택으로 구입한 건물과 대지 평수는 800여 평에 와가(瓦家) 18간, 초가(草家) 6간 등 총 24간이었다. 선교기지 안에는 두 선교사 사택, 예배·전도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복음당, 어학 선생 방과 사환 방, 채소밭 등이 있었다. 총회는 1921년에는 3310원을 들여 방효원 선교사와 새롭게 파송된 박상순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게 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1920년 안식년을 맞아 국내로 왔다가 전국의 교회를 순례하며 사택건축비 1431원 41전을 모금하기도 했다.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 가족을 위해 어학 선생과 사환도 고용됐다. 이들은 언어공부와 잡무 처리에 도움을 줬다. 1917년 5월 1일부터 1918년 4월 30일까지의 자료를 보면 산둥선교 예산 가운데 어학선생 월급은 300원, 사환 월급은 100원이었다. 1918년 전도부는 총회에 두 선교사가 중국어를 잘 배워 전도를 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두 선교사는 중국어를 착실히 배우는 한편 라이양 외촌에서 적극 전도했다. 그 결과 외촌에서 전도할 때 주민 100여 명이 모여 두 선교사의 설교를 경청하기도 했다.

1918년 총회 전도부는 박상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한 뒤 어학 선생 1명을 추가 고용하도록 했고, 어학 선생과 사환 월급도 인상했다. 그해 총회는 전도국 규칙과 선교회 규칙도 제정했다. 선교사 어학공부는 3년으로 하되 매년 한 차례 시강(試講)을 통해 평가하고 전도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선교사 부인들은 집안일 때문에 목사들처럼 어학공부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교제와 상담에 필요한 중국어를 배워 실전에 사용했다. 1919년 제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전도부는 선교사 부인 중 방효원 목사 부인(계은승)의 중국어 실력이 최상이라고 밝혔다.


엄밀히 말해 초기 선교사 3인의 도중하차는 선교사에 대한 지원 부족과 빈약한 선교여건, 8개월여의 가뭄과 경제적 고충, 심리적 부담감 등 총체적 부실에 따른 결과였지만 하나님은 다음 선교사들을 위한 반면교사가 되게 하셨다. 즉, 박태로 목사에게는 선교사의 살신성인과 같은 불굴의지를, 김영훈·사병순 목사에게는 조국의 독립과 미국 현지 한인들의 신앙 증진 등 영원한 사역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남기도록 하셨다. 이뿐만 아니라 초기 선교사 3명의 철수는 의료와 질병의 사각지대에 있던 선교사들이 의사들과 동역할 수 있는 기초 석을 놓는 계기도 됐다. 1918년 총회 파송으로 박상순 선교사 가족이 라이양으로 올 때 한 의사 가정이 동행했다. 그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김윤식이었다. 김 씨는 라이양에서 개인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그해 12월 4일 계림의원을 개업했다. 계림의원은 당시 라이양에서 서양의학을 시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김 씨가 라이양으로 처음 왔을 때는 박상순 선교사에 앞서 파송된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방효원 선교사 가족이 질병으로 무척 고생하고 있었다. 방 선교사는 1918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4개월 동안 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계은승 사모와 한 아이는 독감으로 1개월간 고생했다. 두 아이 모두 40일간 홍역을 앓기도 했다. 계 사모는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선교사들은 선교보고를 통해 김 씨의 노고를 치하하며 총회 차원에서 감사의 뜻을 표시해야 한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김 씨가 라이양에 온 것은 총회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의료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 가족과 현지인들을 치료해주는 한편 현지인들에게 신앙서적을 나눠주며 전도했다.

1919년에 총회 전도부는 김 씨의 계림의원 매입비용으로 300원 예산을 요청하고 병원을 전도국 소유로 하려고 했다. 전도부의 청원은 평양 거주 성도 한 명이 비용을 전담하기로 해 가능하게 했다. 병원사역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의 관심을 넘어 동참이 이뤄진 것이다. 계림의원은 개업 때부터 조선장로회 선교병원으로 알려졌다. 서양선교사 가족들은 물론 현지교회와 학교 구성원 모두는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총회 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선교병원으로 더 이상 활성화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에 이어 한국교회는 5명의 목사 선교사를 더 파송했다. 방효원(1917년부터 1935년까지 활동), 홍승한(1917년부터 1924년까지), 박상순(1918년부터 1939년까지), 이대영(1922년부터 1948년까지), 방지일(1937년부터 1957년까지) 목사 등이다. 이밖에 최초의 여성선교사인 김순호(1931년부터 1939년까지)를 파송했고 선교사자녀학교 교원으로 김윤식 의사의 부인인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 출신 박희복 씨를 비롯해 조소임, 이영애, 편순남 등이 활동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최후의 중국선교사 방지일 목사가 1957년 불가항력적으로 철수해야만 할 때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교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초기 믿음의 선배들의 구령 열정을 잊지 말고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에 의한 중국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미지의 땅을 향해서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정신으로 떠날 수 있었던 선진들의 유지를 받들어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교회의 산둥선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중국교회 및 미국북장로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선교지를 선정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선교사들이 이런저런 이유(지병, 선교지 무단이탈, 재정 부족에 따른 철수 등)로 도중하차한 것을 그 이유로 든다. 또 선교사 동원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고 선교 토탈케어라는 면에서 준비 또한 미흡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교사의 현장 이해와 준비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라는 점이다. 

지난 2012년 재중선교사협의회가 펴낸재중 한인선교사 실태 및 의식조사에 따르면 중국선교사들의 사역 연수는 비교적 짧았다. 2000년대에 들어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 숫자와 그 이전 선교사 숫자와 비교할 때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파송년도가 2000년부터 2007년인 선교사는 56.42%, 2008년 이후는 17.57% 등으로 2000년 이후가 약 74%에 달했다. 1992〜1999년 파송된 선교사는 22.30%에 불과했다. 파송 전 훈련 기간을 보면 보다 문제점이 명확해진다. 파송 전 훈련 기간 1〜6개월은 33.78%, 7〜12개월은 18.92% 등 1년 이하가 52%에 달했다. 파송 당시 선교사의 중국어 능력은 완전초보 56.76%, 초급수준 28.72% 등이었다. 이는 선교사의 85%가 언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현장에 투입됐다. 선교와 목회라는 종합사역이다. 현지어를 어느 정도 구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산둥성선교는 복음을 받은 지 30년도 되지 않은 피선교국이, 그것도 나라까지 잃은 상태에서 부족하지만 선교국으로 전환됐다는 점에서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또 엄밀히 말해 선교사의 도중하차는 선교사에 대한 지원 부족과 빈약한 선교여건, 8개월여의 가뭄과 경제적 고충, 심리적 부담감 등 총체적 부실에 따른 결과였다. 하나님은 이후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보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들(주거 문제, 선교사 안식년, 선교사자녀 교육, 선교사 계속 지원과 훈련 등)을 깨닫게 하셨다. 아울러 첫 번째 3명의 선교사의 경우 하나님은 박태로 목사에게는 선교사의 살신성인과 같은 불굴의지를, 김영훈, 사병순 목사에게는 조국의 독립과 미국 현지 한인들의 신앙 증진 등 영원한 사역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남기도록 하셨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산둥선교에 대해 현재의 관점에서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인생의 또 다른 반전이 있었음에 흡족보다는 만족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나온 과거인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이 적실성이 있겠는가? 하지만 총회가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면서 선교사 관리 면에서 보다 신중하게 됐다는 것은 선교사 문제를 한 방향(절반의 실패 또는 절반의 성공)으로만 몰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맞게 한국교회는 선교 동원, 훈련, 파송, 관리 시스템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나갈 뿐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세계적인 선교신학자, 선교전략가, 실천가 등 전문화와 정예화를 이뤄나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하나님 자신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 한국교회 없이도 세계복음화의 꿈을 이루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감격으로 선교적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는 데 힘써야 한다. 중국선교의 비전은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이뤄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코람데오정신으로 순수함을 이어갈 때 중국인 등 전 세계인들과 더불어 중국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꿈은 동시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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