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평생에 해 온 사역과 삶에 대하여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오랫동안 글을 써 본적이 없었기에 며칠을 기도했다. 막상 쓰려고 하니 옛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스물세 살에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은 복막염 수술을 받다가 의사의 실수로 결혼한 지 3년 만에 나와 딸아이 곁을 떠나갔다. 두 살 난 딸아이를 아빠 없이도 보란 듯이 잘 키우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때 손에 잡힌 일이 옷 장사였다. 그렇게 혼자 발버둥을 치며 스물일곱 살을 맞이했다. 그 스물일곱의 어느 날,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없던 나에게 주님은 찾아와 주셨다. 그날 나는 주님을 본 것보다, 만진 것보다 더 생생한 체험과 기적을 맛보았으며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부르시는 대로
칼빈신학교에 입학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갔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영성교회 심방전도사로 첫 부임을 해 3년을 섬겼다. 그리고 강릉제일교회에서 4년, 부평중앙교회에서 3년, 한민교회에서 3년, 상도제일교회에서 7년을 심방전도사로 쉬지 않고 섬겼다. 1993년, 중국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다. 그 당시 6일 동안 진행된 홍콩선교대회에 참가한 것이 중국선교에 발을 내딛는 기회가 됐다. 그 후 20년 동안, 8개 지역에서 신학교와 성경학교, 성경통독반, 탈북자 사역을 했다. 중국선교사가 되어 처음으로 사역한 도시는 헤이롱장성(黑龙江省) 솽야산(双鸭山)이었다. 그곳에서 조선족 사역자인 YU집사와 의과대학생인 그의 아들, CHUNG을 만났다. CHUNG은 몇 년 후에 내 딸아이와 결혼해 사위가 됐다. 나는 그곳에서 농촌가정교회 사역을 했다. 그들의 요청대로 하루 3시간씩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과 찬송, 그리고 율동을 가르쳤다. 90개 이상의 한족교회와 조선족교회를 다닐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하셨다. 헤이롱장성의 영하 40도의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가 부르질 것 같은 고통에도. 위경련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로 농촌교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설교자들을 위한 단기 기초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을 구분도 못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탈북자들을 위한 도피성을 세우라!
어느 날 여호수아서 20장을 읽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만 명령하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날은 나에게도 명령하셨다. “탈북자들을 위한 도피성을 세우라!” 그 명령에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불순종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년 동안 탈북자들을 위한 도피성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힘을 주셨다. 말씀에 순종한 그 다음날 다롄(大连) 시내에서 첫 번째 열다섯 살짜리 탈북자를 만났다.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봤는지 그 아이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 사람이 하는 시장을 가고 싶은데 좀 가르쳐 주세요.” 아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먼저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게 있던 바나나 한 송이를 먹으라고 주었다. 한 입을 베어 먹던 그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먹지를 못하고 도로 뱉어냈다. 한 번도 먹어 본적이 없었기에 그 이상한 맛에 뱉어낼 수밖에.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니 이름에 ‘국(国)’자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그렇게 불렀다.
그때 나는 세 칸짜리 방을 얻어서 12명의 조선족 학생들을 통역요원으로 훈련하는 2년제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여러 지역에서 11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2년씩 혹은 5년씩 동역을 한 시간이 있었다. 2015년, DD신학교에서 동역하던 여선교사가 11번째로 추방을 당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단기선교라도 하고 싶습니다!’라며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이미 이 일이 있기 7년 전에 베이징(北京)에서는 우리 선교회 소속의 연세가 제일 높으신 할머니 선교사 한 분이 첫 번째로 추방을 당하셨다. 그 후 탈북자 사역을 하고 있던 우리 소속 선교사들이 줄줄이 추방을 당했다. 7년 동안에 열한 분 모두가 추방을 당하고 주위에는 동역자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집도 절도 없이 한국으로 나왔다.
“암 한번 걸려볼래?”
설상가상으로, 2015년 12월 24일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손톱만큼의 충격도 없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 말씀을 붙잡고 “사망아 네가 이길 수 있느냐 사망아 너는 못 이겨! 사망아 네가 쏜 것이 있느냐? 너는 못해!” 사망에게도 함부로 말 놓고 사는 선교사가 되도록 하나님은 내게 권세와 힘을 주셨다. “유방암 4기, 네가 사망보다 세냐? 난 암 덩어리인 네게 관심이 없어. 꺼져!” 하고 선포했다.
주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항암제로 만 배의 효력이 있다는 ‘글라비올라’라는 약초를 8일 만에 보내 주셨다. 또한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153가지로 만든 산야초를 한 달 동안 단식하면서 마시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간도 주셨다. 암환자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증상들이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암환자들은 “왜 하필 나야?”라며 원망을 하고, 짜증과 자포자기와 우울증이 오기마련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심지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나는 중국에서 강의를 할 때 성경을 읽고, 들어도 강퍅하고 메마른 심령의 학생들에게는 엄하게 호통을 치며 책망을 해주었다. “암 한번 걸려볼래? 암환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내가 기도해 줄까? 교도소에 한번 가볼래? 교도소에 갈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죽을병에 한번 걸려야, 교도소에 가는 일이 생겨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은혜를 받게 된다면, 그 방법이 제일 세다면 우리 그런 기도를 한번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엉터리 강의를 한 적도 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동행자로 살면서 쓰임 받고 싶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복 있는 자, 이기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스도의 사자,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위로로 살아가고 싶다. 구원의 영, 살리는 영인 성령 충만하여 기도하고 싶다. 최고의 법, 온전한 법, 경건의 법, 성령의 법, 예수의 법, 그리스도의 법. 오직 이 법을 기뻐하며 준행하며 이루어가고 싶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면 그것이 모두가 감사하다.”는 우리 선교회 대표의 가르침을 늘 생각한다. 우리 선교회에 속한 선교사들이 늘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주님이 잘 해주십니다. 정말 나에게도 주님은 매일 너무나 잘 해주십니다.”
“암을 선물로 받아 본적이 있으십니까?”오늘도 어느 집회에서 간증설교를 하면서 청중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유방암 4기를 선물로 받았는데 건강을 주셨을 때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 아침마다 눈을 뜰 때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신부의 영성으로 속삭일 수 있는 구원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가짜 선교사가 아니라 진짜 선교사로 살고 싶다. ▥
♣ 다비다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