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티베트 사회와 사람들이 불교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의아해 한다. 티베트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 중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자연이 신비롭다는 것도 있겠지만 이런 특별한 사회종교체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에 대해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 이유 중 하나를 밝히기 위해 지난 호에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본교나 인도불교가 현 티베트불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거기에 정치세력이 가세하여 권력화하여서 승려가 왕이고 그 왕을 신이라고 믿고 절하는 지금의 독특한 티베트불교가 나온 배경을 보고자 한다. 이 글이 불교 없이 티베트를 말할 수 없는 그들의‘현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교합일의 정권 등장 얼렁따르마 사건 이후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하던 티베트왕조는 923년 완전히 해체 되고 1270년 몽골의 원나라에 편입되기까지 300여 년 동안 사분오열되어 흩어지게 된다. 지금의 아리 지역에는 거개(古格)왕조, 라다크왕조 등이 들어서고, 윗쪙에는 라싸왕조와 야롱왕조, 지금의 암도 지역에는 쫑카왕조(중국인의 역사서술에서는 왕의 이름을 따서 왕조라 하지 않고‘지아쓰루어 부(部)??라고 함), 깐쑤성(甘肅省) 일대에는 서하(西夏)왕조 등이 들어섰다. 이들 왕조는 티베트 왕족이나 귀족 출신 또는 승려집단들이 세운 정권들이다.
그중 티베트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윗쪙 지역을 보자. 라싸를 중심으로 한 라싸왕조가 점차 힘이 약해지면서 야롱왕조를 건설하고 티베트왕조의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었다. 이때 이미 어느 정도 종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승려들은 종교지도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해당지역 정권에 간섭하게 되고 심지어는 지방정권의 군사와 정치 대권을 장악하는 경우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힘을 이용하는 정치세력들도 등장하게 되어서 티베트에는 한 개의 정권에 한 개의 불교 교파가 함께 결합하는 정교합일의 정권들이 탄생하게 된다.
결국 윗쪙 지역은 한 개의 불교 교파와 한 가족집단이 독립 국가를 세우는 형태가 되었다. 10여 개의 작은 지방 정권들이 서로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독립된 정치, 경제, 군사,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싸지아(?迦), 파무주빠(?木竹巴), 까쥐(??) 등이다. 이렇게 하여 불교가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세력화하고 티베트 지역에서 불교가 이른바 국교(國敎)가 되어 간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한 파벌이나 지방정권의 영향력이 그리 강하지 않아 이것이 사회에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다가 어느 한 종파가 티베트 지역의 전체 권력을 갖게 되면서 정교합일체제가 더욱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의 출발이 싸지아파다.
싸지아파와 퍼그빠 싸지아파의 정치적 영향권 확대과정은 다음과 같다. 쿤꾼치요지에뿌(昆?秋杰布)는 1034년에 태어났는데 밀종에 정통하여 이름을 날린다. 1073년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싸지아사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싸지아파가 나온다. 이 사람은 죽을 때 산 정상에 탑을 세우고 자신의 시체를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탑 속에 넣으라고 유언 했는데 이것이 탑장(塔葬)의 시작이다.
그가 1103년에 죽은 후 그의 아들이 18세에 싸지아사의 지주가 되어 그 뒤를 이어받고 또 현종과 밀종을 두루 공부하였다. 그의 조카 중 껀가지알쨘(중국어로는 꽁까지엔짠(????), 1182-1251)이 인도, 네팔 등을 다니며 불교를 배워와 학자가 되는데 사람들이 그를 빤즈다(班智?) 라고 부른다. 그가 지금도 티베트의 많은 격언 중 사람들에 의해 가장 많이 읽혀지는 유명한 「싸지아격언」을 썼다.
이 사람이 1244년 몽골의 쿠빌라이의 요청으로 조카 퍼그빠(중국어로는 八思巴(빠쓰빠)를 데리고 지금의 우웨이(武威)에 해당하는 깐쑤성(甘肅省) 량저우(凉州)로 간다. 거기서 그는 티베트 윗쪙 지역을 몽골에 귀속시키기로 쿠빌라이와 협정을 맺고, 모든 티베트의 승려들과 수령들은 몽골의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공개편지를 쓴다. 원래 싸지아현 일대에서 세력을 갖고 있었던 싸지아파는 쿠빌라이에 의해 원나라에 중시되고부터 티베트족과 몽골족 원나라 중앙정부 사이에 관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1260년 원나라의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퍼그빠를 제사(帝師), 즉 황제의 스승으로 삼는다. 이를 국사(國師)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에게 몽골제국 영내에 있는 모든 종교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한다. 퍼그빠는 1276년까지 16년 간 제사 역할을 하였고 쿠빌라이 시대에 제 4대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1358년까지 싸지아파에서 11명의 제사가 100년 동안 황제의 스승 역할을 하며 몽골제국의 종교 사무를 관장하였다.
김호동은 그의 책 「황하에서 천산까지」에서 의미 있는 서술을 한다. 허난성(河南省) 소림사에서 몽골제국 초기에 만들어진 네 개의 비석이 최근 발견되었는데 그 중 세 개는 위구르 문자이고 하나는 퍼그빠 문자로 되어 있다. 이 중 한 비문에 허난 지역에 있는 모든 승려에 관한 문제를 처리할 때 최종적으로 퍼그빠의 말에 따르도록 하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추측은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고려의 사찰들도 퍼그빠가 주도하는 싸지아파의 관리 체제 속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원나라에 드나들었던 고려의 승려들과 티베트의 승려들과의 접촉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증거로 전남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는 티베트어 필기체로 된 고문서를 든다.
앞에 언급한 퍼그빠 문자라고 하는 것은 쿠빌라이의 부탁을 받고 퍼그빠가 만들어준 몽골의 문자이다. 그 전까지는 몽골인은 위구르인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빌려서 사용했는데 고유한 자신들만의 문자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몽골 문자를 퍼그빠 문자 라고 한다. 그는 1265년 티베트로 귀국할 때, 명을 받아 이 문자를 만들어 1269년 쿠빌라이에게 바쳤다.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 티베트어 · 산스크리트어 ·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는데, 원래는 몽골어 ·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표음(表音)문자인 음절(音節)문자로 만들어졌다. 쿠빌라이는 같은 해 이 문자를 공용문자로 채택 · 공포하였으나, 빨리 쓰는 데 적합 하지 않아 그 후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티베트문자를 개정, 왼편부터 세로로 쓰게 된 네모 진 문자로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되어 있다.
티베트인들의 지혜와 존경의 대상인 퍼그빠 원 조정에서 퍼그빠가 누린 지위는 대단했다고 한다. 티베트 측의 자료에 의하면 퍼그 빠가 쿠빌라이의 종교적 스승으로서 황제에게 자신을 만날 때는 절을 하고 낮은 자리에 앉도록 요구했는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럴 수 없고 가르침을 받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원나라 역사를 보아도 문무백관이 황제를 알현할 때 황제의 옆 위쪽으로 제사(帝師)를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으며 황제나 후비도 그에게 경배했다 는 기록이 있다.
쿠빌라이가 이렇게 티베트의 승려에게 존경을 표한 원인이 무엇일까? 그의 지혜에 감탄하여 존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퍼그빠는 3살에 금강경을 줄줄 읽었을 정도로 어릴적부터 총명했다고 하는데 숙부를 따라 우웨이로 간 때가 겨우 10살 때였다. 지금도 티베 트 사람들은 퍼그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이것이 몽골족이 지금까지 티베트 불교 를 신봉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티베트에서 사역하며 언어를 배울 때 티 베트 교수는 예문으로 티베트인들의 지혜를 담은 「싸지아격언」을 들어서 설명하곤 했는데 그들의 격언은 마치 탈무드를 보는 것 같이 상당히 풍부한 자연에 대한 지식과 철학을 담고 있으면서도 또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들로 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하고 이해 할 수 있었다. 지금도 티베트인들은 언어학습을 하는데 이 격언을 사용하고 학생들에게 암송을 시키기도 한다.
싸지아 정권의 몰락 이제 원나라와의 관계는 접어두고 다시 티베트 안으로 들어가자면 1265년 잠시 귀국할 때 퍼그빠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싸지아사에 내 놓아서 원래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이 상당한 규모의 사원이 된다. 이렇게 원나라 조정의 지지를 힘입어 싸지아파는 전체 티베트 지역에서 정치와 종교의 통치권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몽골제국이 티베트 지역을 통치하게 된 시기에 황제의 스승 역할을 하는 제사를 배출하는 싸지아파가 티베트의 통치권을 부여 받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군소 교파들을 다 통일시킨 단일 교파인 싸지아파의 수장이 정치까지 통치하게 되는, 이른바 티베트 지역에 승려가 법왕(法王)이 되어 종교와 정치를 다 관할하는 정교합일의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통치체제는 100년이 채 가지 않았다. 먼저는 싸지아 가족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계속 되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해 갔고 기타 세력들이 강해지면서 정권에 위협이 되었다. 퍼그빠를 이어 제사가 된 승려들은 싸지아파 내의 중요 자리를 차지하고 부자 세습을 하면 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결국은 내부 분열로 스스로 해체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원 조정 도 쇠락의 길을 가면서 티베트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세력들이 일어날 조건을 준 것이다. 이 중 파주(?竹)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1349년 싸지아는 내부분쟁이 더 격화되어 서로 전쟁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파주는 한쪽을 지지하고 한쪽을 치는 식으로 하나씩 격파하여 결국 싸지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 후로는 파주의 세력 하에 들어간다.
싸지아파 뒤에 나오는 교파들은 자연스레 앞의 종파의 세력을 뒤집으면서 티베트의 정치 권력을 갖게 되고 사원경제체제를 장악하여 종교와 부와 권력을 동시에 손에 쥐는 독특한 종교형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종교가 한 국가나 민족에서 절대적 위치 를 차지하게 되면 타락하게 되어 있다. 성과 속은 분리되어야 한다. 성이 속의 권세를 가질 때 그 순수함을 잃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티베트 불교도 본교와의 힘겨운 투쟁을 할 때 에 생기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불교를 반대하던 귀족세력들이 무너지고 왕족도 분열하여 흩어졌을 때만해도 승려들은 권력자들을 피해 다니며 숨어 도를 닦았다. 그러다가 지방의 작은 정권들마다 통치수단으로 승려와 불교를 필요하게 되자 정치권력에 편승하여 많은 교파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한 종교적 타락은 싸지아파가 원 나라의 지지 하에 막강한 힘을 얻으면서 싸지아파가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게 되니 종교적 타락은 더욱 가속화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정치적 힘의 뒤에는 이런 강압통치를 조장하고 백성들을 위협하는 종교논리가 있었다. 정치세력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곧 신에게 대항하는 것이 되는 정교합일의 체제 속에서 권력자는 전권을, 백성들은 완전한 복종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교합일이란 이런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서는 그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제 이런 현상들이 사라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지리적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이유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어 살아 온 티베트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발전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중세기적 종교관 속에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 세계에서 티베트를 신비하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신비로 채색되어서는 안 된다. 순전히 강압의 통치논리에 의해 나온 현상이라고 본다.
그 뒤로 파주 정권이나 겔루그파의 달라이라마 정권도 이 통치체제를 계승한다. 이 새로운 정권의 등장도 역시 종교권력을 차지하면 정치권력에나 사원경제체제 하의 경제적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되어 진 일이다. 드러나기는 새로운 종파의 등장이지만 속셈은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집단의 정치권력화가 지금껏 유지되어 내려왔지만 이제 대부분의 티베트지역이 중국으로 편입되고 달라이라마가 중국을 떠나 망명한 지 50년이 흐른 지금 그 정교합일체제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점차 그 종교의 영향력도 함께 약해지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승려가 왕이 되고 신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교합일 체제가 얼마나 견고한 진이었는지 알게 된다.
라마의 전세(轉世)제도 그 뒤로 정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고 어떤 종파들이 있었는지는 지난 호에 간단히 다루었으니 마지막으로 이들의 정교합일 체제가 견고해지는 데 또 다른 결정적 영향력을 준 라마(중국어로 활불(活佛)이라고 한다. 라마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티베트 불교의 승려를 뜻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티베트에서 일반 승려는‘짜와??라고 하며 라마는 고승이나 살아있는 부처라고 여겨지는 활불을 가리킨다)의 전세(轉世)제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티베트 불교를 신비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며 백성들을 정교합일체제 속에 굴복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라마의 전세제도는 참도(昌都)에 사원을 세우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던 까마(?瑪)까쥐파에서 시작되었다. 제 2대 조사(祖師) 까마빠시(??拔希)가 죽을 때 예언하기를 어떤 이가 자신의 자리를 이을 것이라 했는데 이것이 본인이 윤회해서 다시 오는 것으로 해석했고 1288년 다섯 살이던 랑지용뚜어지에(??多杰)를 윤회한 까마빠시로 인정해서 그들의 추뿌쓰(楚布寺)의 보좌에 등극하게 한 것이다. 이는 윤회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 제도는 티베트불교의 사원주지 계승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 동안 사원마다 주지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데 경제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전세이론을 통해 지도자의 계승문제를 해결하였고 정교합일의 새로운 조직형태를 통해 통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상층집단의 조종을 받기도 해서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때로 부터 다른 교파에도 이 활불제도가 전해지고 활불보계는 점점 많아지게 되고 티베트 사회의 한 특수계층이 되었다.
활불의 특권 티베트인들은 라마를 부처나 보살이 세상 사람들을 구도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활불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뿐 아니라 정치, 경제의 특권도 누리게 되어 종교의 지도자뿐 아니라 정치의 지도자도 되고 많은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짜 시비도 있고 활불 안에서도 등급이 생기게 되었다. 티베트 사회는 매 사원마다, 매 지역 마다 활불들이 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활불이라고 하면 달라이라마나 빤찬라마를 생각하는데 사실은 승려가 몇 십 명 있는 작은 사원에도 활불이 있다. 그 활불은 자연스레 그 사원의 주지승이 되고 그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활불은 한 지역에서 종교적으로는 지역을 지배하는 신이요 정치적으로는 수장으로서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활불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은 거의 사회의 한 특수계층이 되었다. 공산화 이후의 중국에서는 오히려 중국정부가 티베트불교의 이 제도를 악용하여 공산당에 충성을 맹세한 티베트족 가문에서 활불을 세워 정치 경제권을 장악하게 하고 통치수단으로 삼는다. 그런데 작은 사원의 활불은 다른 지역에 영향력이 없다. 암도의 경우 암도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활불은 라졍곤빠(拉卜楞寺)의 지암영 활불, 흣껌범(塔?寺)의 주지 활불(몇 년 전 미국으로 망명) 등이다. 이들은 암도 지역에 초원으로 인해 지역 간 분쟁이 일어나면 조종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많은 활불의 보계 중 모든 지역을 통틀어 영향력이 있는 것은 겔루그파의 달라이라마와 빤찬라마이다. 달라이라마는 과거 티베트 사회의 정치, 종교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모든 티베트 지역과 티베트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에 미친다.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 이라 생각한다. 빤찬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생각하며 시가체에 있는 쟈션룬뿌사의 주지를 한다.
가장 늦게 나온 겔루그파가 활불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면서 싸지아와 파주의 뒤를 이어 티베트의 정권을 가져가면서 지금의 티베트 불교, 민족의 모습을 갖게 된다. 겔루그파에 의해서 승려의 정치통치가 가속화되고 강력한 신권통치국가가 되었다. 달라이라마정권의 시작부터 지금 망명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 다루게 될 것이다.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티베트불교 결국 싸지아파에 의한 싸지아 정권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달라이라마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교합일의 체제가 이어오면서 티베트를 지배하였다. 이 체제가 티베트를 이상한 나라로 만들었고 이 이상한 체제가 지금껏 유지되어 내려오는 신비한 땅이라는 인식이 외부에서는 어떤 종교적 특이성이 있지 않나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 체제는 사실 종교적 억압에 의해 철권통치를 한 정치집단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런 현 티베트의 모습을 만들기 시작한 싸지아정권은 특히 그들만의 힘이 아니라 몽골이라는 외세를 빌어 통치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종교적 이유이든, 민족감정으로 보든지 간에 결코 환영 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티베트에서의 권력 확산을 위해 몽골족의 티베트 지배를 약속하고 외세의 지배를 티베트에 끌어 들인 것은 매국적인 행동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군웅 할거하던 각 교파들도 정권다툼을 하다가 힘에 의해 권력을 잡고 겉으로는 불교로 위장하여 정권을 교체하여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 과정에 나중에 등장한 겔루그파가 최대 교파가 되어 다른 교파의 사원들도 개종시키고 지금껏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소수의 승려집단이 신이라는 강압으로 백성들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권력에 복종하게 했고 그 절대 권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통치이데올로기로서 불교를 필요로 했던 역사적 상황, 그 중 외세를 힘입어 티베트 지역의 통일권력을 잡게 된 싸지아 정권의 등장과 뒤이은 종파들도 꿩 먹고 알 먹는 이 효과적인 통치수단인 정교합일 체제를 계속 이용하는 상황, 이 지배체제를 가속화시킨 활불제도, 외부의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물결이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철저한 종교적, 사회적 통제와 지역적 고립이 21세기에도 티베트 지역에 이런 체제를 유지하도록 영향을 준 것이다. 이 굴레는 티베트 민족을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속박하여 온 악이다. 이들이 진리 되신 예수를 알도록 하고 이 굴레를 벗겨 주어 광명의 길로 나오도록 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티베트의 젊은이들이 이런 것을 인식하고 이제 다시 중요한 역사적 결단을 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 인식이 티베트의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역사와 불교에 대해 바르게 이해시키며, 불교가 그들의 삶의 전부였지만 사실 자신의 민족을 파괴한 전부였음을 깨닫게 해 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티베트의 젊은이들이 이 잘못된 정치와 종교의 연결고리를 끊고 기드온처럼 스스로 바알의 단을 헐 날이올 것이다.
유은식 목사 | 전 중국 티베트 선교사, 현 산돌성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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