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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1  통권 133호  필자 : 김성곤  |  조회 : 6093   프린트   이메일 
[한시 강좌]
왕유(王維)의 <죽리관(竹裏館)>

대나무 숲에서

홀로 그윽한 죽림에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길게 휘파람도 분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
밝은 달이 찾아와 나를 비춘다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주석
1 竹裏館(죽리관) - 지은이 왕유가 만년에 거처하던 별장으로 집 주변에 대나무 숲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2 王維(왕유) - 당나라 시인. 산수시(山水詩)로 유명하다.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시불(詩佛)’로 불리며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소동파(蘇東坡)가 그의 시화를 두고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하기도 했다. 만년에 장안에서 조금 떨어진 남전(藍田)에 망천별서(輞川別墅)라는 별장을 마련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2 幽篁(유황) - 깊은 대나무 숲. ‘황’은 대나무의 뜻이다.
3 嘯(소) - 휘파람을 불다.
4 深林(심림) - 깊은 숲. 여기서는 대나무 숲을 가리킨다.
5 相照(상조) - 나를 비추다. ‘相’ 뒤에 ‘…하다’는 뜻의 동사가 올 경우에는 흔히 ‘나(너)를 …하다’로 번역한다. 

이 시는 왕유가 만년에 마련한 별장 망천별서에 속한 ‘죽리관’에서 지은 것으로 그윽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누리는 삶의 순연한 기쁨을 단순하고 평이한 언어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번잡한 세속의 삶을 떠나서 그윽한 죽림으로 들어온 시인은 홀로 고요 속에 침잠한다. 이른바 ‘홀로 앉음(獨坐)’의 세계이다. 그 얼마 만에 누리는 혼자만의 고요인가! 세상의 온갖 기심(機心)을 잊고 소슬 불어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처럼 긴 호흡으로 평화롭게 흔들린다. 이것이 바로 장자에서 말하는 ‘坐忘(좌망)’이 아니던가.   

안회가 말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후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예(禮)니 악(樂)이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후에 안회가 다시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大通)’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된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장자·대종사(大宗師)》

왕유가 안회처럼 완전한 좌망의 경지에 도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도 세상의 온갖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비로소 온전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장자》에는 ‘좌망’이 아닌 ‘좌치(坐馳)’ 라는 의미심장한 개념의 어휘가 등장한다. ‘앉아있어도 내달린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모든 것을 잊고 이젠 쉬어야겠다고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하고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 쉬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저 빈 것을 보라.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坐馳)’이라 하느니.   《장자·인간세(人間世)》

쉴래야 쉴 수 없는 현대인들의 맹목적 치달림의 병폐를 잘 드러낸 말이다.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의 환희라니. 우리는 언제나 그런 흰 빛의 순수를 체험할 수 있을까. 이 구절은 어쩌면 우리의 내면의 모든 욕망을 비울 때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요히 앉아 기도한다 한들 마음이 욕망으로 치달린다면 거기 어떤 응답도, 어떤 희열도 찾아오기 힘들지 않겠는가.

왕유가 고요함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환경적인 요인이 큰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윽한 대나무 숲(幽篁)’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움의 상징물이다.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비움으로 인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절조 군자의 영예를 얻었다. 소동파(蘇東坡)는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고기 없이는 살아도,
대나무 없인 살 수 없다네.
고기 없으면 몸이 마르지만,
대나무 없으면 사람이 속되어 진다네.
마른 몸이야 살찌울 수 있다지만,
속된 선비는 종내 고칠 수가 없다네.    <녹균헌(綠筠軒)>

비움의 상징인 대숲에 고요히 앉아있는 시인은 이미 ‘좌망’의 선경에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텅 빔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바로 진정한 행복이요, 진정한 위로이며, 진정한 평안이다.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 둘째 구절이다.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분다.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세상의 소란함을 뒤로한 채 죽림에서 유유자적 노닐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모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죽림칠현이 전제적 억압 정치에서 비롯된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불었다고 한다면 왕유의 경우에는 ‘좌망’에 들어 거기서 오는 기쁨을 표현하는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에 부르는 마리아의 환희의 찬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는 자기를 비우는 ‘좌망’이 있었기에 임마누엘의 거룩한 체험이 따랐으며 마침내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노라” 라고 환희의 찬미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경지를 뉘 이해하랴. 적은 것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큰 것으로 채우고, 하잘 것 없는 것을 버림으로 오히려 가장 값진 것으로 얻는, 이 오묘한 비의를 뉘 이해하랴. 제3구의 ‘심림(深林)’은 바로 왕유가 도달한 깊은 경지를 말한 것이고, ‘인부지(人不知)’는 그러한 깊은 경지를 이해해 줄 사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 깊은 깨달음, 이 광대한 환희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서운하지 않을까?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바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不?, 不亦君子乎.)

우리 모두는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가족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친구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직원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사장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교인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목사님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알아주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불평한다. 우리는 영원히 군자가 될 수 없는가. 그저 우리는 속인들의 무리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가. 그런데 이 말을 한 공자 역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았다. 14년을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으나 끝내 쓰이지 못했으니 남들이 공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내지 않았다. 그래서 군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바로 위 구절보다 앞서 한 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벗이 멀리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자신을 알아준 소수의 벗이 있었다. 그 벗이 있었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몰라줘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불평하지 않고 즐거워하며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다. 이 벗들은 공자와 함께 도를 추구하며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 벗들은 공자와 같이 도를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익혀 실천하면서 거기서 오는 내밀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왕유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등장하는 ‘명월(明月)’은 바로 이러한 벗을 상징한다. 나를 환히 비추는 달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응원하는 ‘지음(知音)’ 이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다음과 같이 달을 노래했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천지를 다 비추니
밤중 광명이 너 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나를 가장 잘 이해하기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 기뻐하고 교통함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왕유가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 속에서도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불며 내밀한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밝은 달과 같은 벗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삶에서 자주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달과 같은 벗이 부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벗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혼자 속상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없겠는가. 내가 맘을 비우면 그 빈 맘에 청량한 달빛을 부으며 찾아오는 참된 벗이 꼭 있기 마련이다. 유유상종이 아니런가.

무한경쟁의 시절이다. 사회건 교회건, 직장이건 가정이건 경쟁의 가파른 속도로 피곤하다. 어디서 쉼을 얻으랴. 대나무 숲으로 가자. 시비, 귀천, 빈부의 이분법적 가치에 끝없이 표류하는 세속적 욕망을 씻어내는 참된 비움의 숲으로 가자. 거기에 진정한 쉼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으려니. 거문고 타고 휘파람 부는, 명월이 달빛을 가득히 붓는 비움의 숲으로 가자.   


김성곤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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