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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통권 110호  필자 : 김임재  |  조회 : 1875   프린트   이메일 
거룩하게 쓰임받는 삶을 기대하며

선교사로 준비되기까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들였던 8년간의 노력은 선교지에서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해주었다. 대학 재학시절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라는 슬로건을 보면서 선교의 꿈을 꾸던 청년은 1979년부터 10년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선교단체 속에서 살았다.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후 나는 대학시절에 헌신했던 선교사의 비전을 접을 수 없었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젊었을 때 선교사로 나갈 껄”하는 후회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선교사로 준비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은 모두 나의 부족한 믿음을 키우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선교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족들과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다리던 중 총회 파송을 받도록 후원해줄 교회가 결정된 것은 선교사 훈련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 당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었다. 후원교회가 확실하지 않았지만 선교사로 잘 준비되어야 한다는 열정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선교사로 준비되는 길을 걷게 하였고 선교지로 나가기 위해 온 가족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달려가던 중 한번 멈칫거린 적이 있었다. 신대원 졸업을 앞두고 세 자녀의 교육문제가 선교지로 가려던 나를 망설이게 하였다. 세 명의 대학교육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후원으로 자녀교육을 할 수 있을까? 가장으로서 책임을 깊이 느끼게 하였던 일이었다. 선교사의 지난 삶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민과 걱정을 다 아시고 넉넉하게 책임 져주셨다. 위로 두 명이 대학공부를 마쳤고 막내가 대학 4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이다. 선교지에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잘 적응하고 자신의 삶을 세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선교지에서 맡겨진 첫 번째 사역 
1997년 3월 1일, 우리 가족은 입을 옷과 책만을 챙겨서 선교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의 첫 사명은 죽음을 앞둔 한 자매를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었다. 선교지에 도착한 이듬해인 1998년에 한국인 여학생 두 명이 내가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중국 대학에 유학을 왔다. 5월부터 두 여학생은 주일마다 우리 집에 와서 아내가 만들어준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한국인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려고 했다. 그중에 불신자인 한 여학생을 아내가 전도했고 이어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매주 주일 오후에 두 여학생과 함께 시작했다. 우리는 선교지에서 현지인들만을 대상으로 사역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국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양육을 시작하였다. 양육하는 일이 6개월 정도 지난 11월 우리 부부가 사역하러 일주일정도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전도했던 여학생이 갑자기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위가 아파서 위내시경을 해보겠다고 귀국하면서 바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바로 돌아오겠다던 그 자매는 전화로 “교수님 저 암이래요. 기도해주세요.”하고 연락을 해왔다. 주변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 여학생을 위해 금식하면서 기도했지만 12월, 그 여학생은 하나님께로 갔다. 같이 유학을 왔던 여학생은 충격으로 더 이상의 공부를 못하겠다고 귀국하였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집에 올 때 자주 속이 아프다고 말해서 한국에서 비상약으로 가져온 위장약을 나누어 주곤 했던, 김치가 맛있다고 잘 먹던 학생이 위암 말기로 죽었다. 공부하고 싶어 했고 중국어를 더 잘 배우고 싶어서 그렇게 애쓰던 학생이 갑자기 죽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안타까웠지만, 만일 우리 부부가 이 학생을 전도하지 않고 나중에 한국에 가서 믿게 되겠지 하고 전도하지 않았다면 이 여대생의 영혼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면, 그 자매가 비록 젊은 나이에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하나님께로 가 있게 된 것이 위로가 되었고, 주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이 여학생의 이름은 고옥희 인데 여군하사관을 마치고 더 공부하고자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중국어연수를 위해서 유학 왔던 학생이었다. 중국 대학생들이 이 여학생을 잘 따랐었고, 한국인이 드문 도시에서 중국 대학생들에게 참 좋은 인상을 주던 여학생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개학이 되자 나는 중국 대학생들에게 고옥희 자매의 죽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너희 고옥희 알지? 그 학생 지난겨울에 죽었어. 젊었지만 죽었다. 그런데 그녀는 천국에 갔다. 예수 믿고 지금은 하나님께 가있다. 너희도 앞일을 알 수 없지 않니?”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자기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말하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전도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중국 청년들이 매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의 전도의 열매를 나는 갈퀴로 긁었다고 말하고 싶다. 1999년 봄 학기에 아내와 나 그리고 삼남매가 함께 전도한 학생의 숫자는 수십 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후의 5년간의 모든 사역은 이 때 전도한 청년들을 양육하고 키우면서 이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때 키운 제자들 가운데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제자부부도 있고, 중국에서 박사가 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제자, 의사가 되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제자들이 있다. 이 당시에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전도했던 한 청년은 대학원을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졸업을 하고 한국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 나는 중국의 청년 대학생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면서 이들 가운데서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미래에 중국을 이끌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기독인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성령님과 제자양육사역
우리 가족은 선교지에서 힘든 이사를 세 번 할 때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새로운 사역이 열리고 새로운 기회와 만남을 가졌다. 우리 가족은 첫 번째 도시를 중국의 고향으로 생각한다.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머물렀으나 첫 인상을 안겨준 그 도시를 고향처럼 생각하며 잊을 수 없다. 중국에서 11년 8개월을 보내는 동안 가장 오래 머문 두 번째 도시에서는 자녀 셋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자녀교육비가 없을 때는 학교에서 학비를 깎아주어서 공부시킬 수 있었고, 막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 때는 기도하고 학교를 옮겨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할 수도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자녀들은 친구들에게 전도하기를 힘썼다. 이 도시를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데 내 친구들이 어떻게 전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세 아이가 경쟁하듯 노력했는데 그 때 전도했던 세 자녀들의 친구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막내의 친구는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주어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오면서, 비록 자기가 생일이 빨라 언니지만 복음을 전해주어 너를 언니라고 말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였다. 아들은 두 명의 친구에게 전도하였는데 그중의 한 명이 한국에 대학원 과정을 유학 와서 공부를 마쳤다. 하나님은 두 번째 도시에서 우리 가정을 통해 한 개의 교회를 세워 영혼 구령의 기지가 되게 하셨고, 또 한 개의 학교를 세워 그곳 디아스포라 한인 어린이들의 교육을 돕게 하셨다.
  선교지에서 우리 가정의 생명줄은 가정예배였다. 선교지에 들어가기 2년 전부터 시작한 가정예배는 선교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고, 모든 사역과 삶의 모습은  그 때 기도한 대로 흘러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은 이전에 드렸던 가정예배에서 드렸던 기도 응답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 있다.

관계전도와 새로운 사역의 개척
우리 가족이 전도하는 방법은 관계 전도로써 먼저 현지인들과 시간을 들여서 친밀한 사이를 맺는다. 자주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교제를 하며 사랑으로 섬길 때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연다. 그러면서 기회를 보다가 우리는 예수 영화를 보여주는데, 이 예수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현지어 실력이 부족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내용을 전해준다. 그 다음에 중국어 사영리로 전도하면 92% 결신한다. 이때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듯 하다. 개인전도에 이어 그룹전도는 대개 한 해 동안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성탄절에 맞추어 전도하며 추수를 거두는데 성탄절이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그분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화 예수를 보여주고 전도하면 한꺼번에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우리 가족을 인도하신 곳은 중국의 중남부의 한 도시이다. 막내까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을 때 자녀 교육의 부담이 없어진 우리 부부는 선교사가 없는 도시로 가서 새롭게 사역을 개척하기로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대학이 17개나 있는데 아직 선교사가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다. 아내와 나는 개척의 깃발을 꽂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도시로 지도 한 장을 들고 들어가서 새로운 선교의 교두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선교의 방향을 놓고 기도하면서 대학생 중심으로 관계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그곳에 도착한 이후 점차 한국인들이 들어오면서 한인교회의 필요를 보여주셨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한국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한인교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2005년 9월 25일 우리 집 거실에서 어린이까지 11명이 모여서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점점 부흥이 되어 지금 4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다시 전진 명령을 기다리며
교회를 시작한지 1년 뒤에 대학에 교수사역의 기회가 생겼다. 그 기회를 아내가 맡아 대학에서 근무하며 사역의 기회를 맡았다. 아내가 사역을 시작하면서 전처럼 학원전도의 열매가 맺히고 양육하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007년 선교사들의 사역을 예의 주시하던 사람들의 눈에 아내의 사역이 포착이 되어 사역 도중 체포되어 바로 추방을 당했다. 아내는 중국에 온 지 만 10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추방 직후 아내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 이어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세밀하신 위로가 뒤 따랐다. 아내는 지금 신대원 과정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U턴’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다시 직진하라는 선교의 총사령관이신 성령님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선교지에서 우리부부는 보이는 위기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숨어있는 위기들이 참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많은 위기들을 잘 견뎌 왔다.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더 나아졌고 성숙해졌고 온전해져왔다. 부부애도 더 깊어졌고 자녀와의 관계도 더 친밀해져갔다.
  나는 아내가 사역지를 떠난 후 1년간 더 머물며 교회를 섬긴 후 지난 여름, 반년간의 안식년을 얻어 귀국했다. 아내가 사역지에 들어갈 수 없어서 사역에 제한을 받고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인내하고 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를 기억한다. 현재의 위기가 새옹지마처럼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남은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계속하려한다. 선교지에 도착하면서부터 나의 기도제목은 “끝까지 거룩하게 쓰임 받는 선교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였다. 이제까지 귀한 사역에 쓰임 받았던 삶을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쓰임 받는 선교사로 살아가기 소망한다.

김임재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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