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일찍이 깨달음이 있었다. 말과 글이 민족문화를 담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성어나 격언으로서 곧 중화 민족의 고난에 대해서 심오한 지혜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고생의 가치에 대해 ‘갖은 고생을 견뎌낼 때 비로소 큰 사람이 된다(吃得苦中苦)’,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失败是成功之母)’ 등의 격언이 있다. 만약 우리의 오천 여 년의 문화가 고난 중에서 숙련이 된 정신이라고해도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주를 위해 고난 받을 자격
성도들의 수많은 아름다운 간증을 접할 때, 나는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고난을 인내하며,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고초를 인내했던 것처럼 원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중국을 섬길 때, 나의 영적 스승께서 나를 크게 질책하신 적이 있다. “교만한 사람아, 네 머릿속의 학문으로 중국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중국 교회의 목사는 평균 17년 반 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갖은 고난을 받는다네.” 이 말씀은 내가 대륙의 교회에서 섬길 때, 항상 생각나게 되어 늘 겸손하게 섬기도록 해 주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소유한 수많은 주의 종들을 보았기에 나도 모르게 감옥에 들어가 몇 년간의 고난을 받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지! 이 몇 년 동안에 나는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해 배워왔다. 중국에 오는 다음 세대 배양에 참여하는 사역자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 학생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진정으로 교육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흉수(凶手)와 하나님(神) 사이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행 28:3-6)
‘흉수가 아니라 하나님’ 이라고 생각의 바꿈이 얼마나 빠른지! 최근에 중국의 교회에서 나는 이 ‘토인의 고난관’을 가진 지체들을 자주 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의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격’이 힘을 잃어가는 듯 했다. 나는 효과가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점차 학생들에게 주는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발견했다. 특히 1980년대 후에 출생한 학생들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청년의 때에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선생 내지는 주의 종에게 기껏해야 동정을 표시하는 정도이다. 어떤 이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내가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주님께 벌을 받는지 아닌지 예의 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토인들에게 나를 ‘흉수’로 여기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수업태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나는 단지 명함을 꺼내 나의 소개를 할 뿐이다. 이러한 토인들을 만났을 때, 나의 학력의 배경을 밝히며 그들로 하여금 내가 주를 섬길 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졸업장도 있음을 알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곧 열심히 나의 수업을 듣는다.
예전과 다른 고난 : 똑같은 성숙의 기쁨
이러한 귀한 경험은 내게 많은 고난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도록 해 주었다. 나의 스승이 취한 방법은 확실히 현대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고난을 받는’것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종은 당연히 성경의 진리로 기본을 삼고, 지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간증이 있어야한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결코 가장 중요한 ‘자격’이 아니라, 실제의 생명의 경험이 반드시 진리와 연결되어야 하며, 일생동안 배움에 대한 뜻을 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주를 위해 20년 동안 고생을 한 사람은, 또 진리 위에서 배워야한다. 또한 젊은 주의 종이 영적이지 않거나 생명의 간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예전과 같이 감옥에 갇히거나 칼과 창에 의한 핍박은 아니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경험은 새로운 도전이다. 모순과 다툼이 가져오는 압박감, 영적인 고통과 상처는 옛날 선배들에 비해 적은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그들이 그중의 영적인 과정을 거친다면, 영성 또한 노련하게 성숙할 것이다.
토인의 ‘고난관’
토인의 고난관을 분석하면 사실은 ‘인과응보’의 원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 자연에 세워놓은, 해석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정해진 법이다. 인과응보가 보여주는 것은, 이 우주 가운데, 빛 위의 하나의 공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일찍이 인과응보의 원칙을 간파하여, 잠잠히 이 세상의 기본적인 공의를 유지해왔다. ‘선인(先人)은 나무를 심고, 후대 사람들은 그늘을 누린다, 선한 일을 하면 보답이 있다’ 등의 인과응보에 관한 격언이 있다.
일반적으로, 재앙은 단지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임한다고 여겨, 그들의 죄가 깊기 때문에 하늘의 벌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올해 5월에 일어난 사천 대지진을 본다면, 지진이 일어난 것이 사천의 사람들이 다른 중국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인가? 지진 중에 죽은 사람은 다른 사천의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게 된 것인가?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2-3)
예수께서는 여기서 불행한 일은 죄악의 경중(轻重)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님을 밝히셨다. 재앙은 비록 개인의 죄악의 경중과는 무관하지만, 인류 전체의 죄악과는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 재앙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모두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재앙과 사망이 임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사망은 단지 육체의 사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죽은 후에 영혼 또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날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가장 궁금해 하는 문제이다.
다시 중국문화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의 간단한 ‘인과응보’의 논리로 모든 고난의 문제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인의 사상’을 벗어나
결론적으로, 어찌되었든 중국교회는 반드시 이 ‘토인의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위에 완전하고 정확한 고난관을 세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성경의 진리로 본을 삼아 다시 두 가지의 이념(흉수와 하나님) 사이에서 배회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신께서 죄인들이 당신을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삼으시며, 성도들을 성숙하게 하는 은혜의 손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인류가 범죄를 선택한 후에, 고난과 사망의 고통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고난과 사망의 법을 택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속죄제로 삼으시고, 또 고난을 사용하여 그들을 성결한 주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 그들로 사망을 넘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고난이다. 우리의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집중하여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을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출처 | www.ccchina.org
번역 | 송지은 · 본지 편집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