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사보다 나은 순종
이 땅의 사역은 오직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순종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 복음에서 소외된 미전도 종족을 향한 부담과 열린 마음을 갖게 하시더니 그로부터 과거 10여 년 전 청년 때의 서원을 생각나게 하셨다. “주님이 보내시면 누구라도 가기를 꺼려서 복음에서 소외된 땅으로 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주의 사랑을 나누며 살겠습니다.” 이 서원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기도하게 되었다. “주님, 이곳이 제가 복음을 전할 땅 끝입니까?” 마음은 이미 당시의 사역지에서 떠나 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의 사역지에 대한 깊은 감동을 주셨다. 민족에 대한 비전이라기보다는 지역에 대한 비전이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구하는 기도에 주님은 응답으로 사무엘상 15장 22-23절 말씀을 거듭해서 주셨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 당시 어리석은 믿음으로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필자 말고도 세계에는 이미 부르심에 순종하여 활동하는 사역자들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고 한국교회의 예배 중심적 신앙생활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순종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보다는 정한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가 특별히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부르심에 붙들려 기도하는 가운데 거듭해서 주님은 순종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사심 없이 순종하는 종이 희귀하다.”고 탄식하셨다. 주님의 탄식이 너무 깊게 느껴져 나는 미지의 땅에 대한 부르심을 거절 한마디 없이 감격의 눈물로 응답했다. 답사하고 결정하여 가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져 무조건 순종한 것이다. 계속해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사심 없이 순종하라. 그 땅에 사역이 활발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너를 그 땅에 심기 원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도 이 땅에 살면서 거듭해서 묵상케 되는 음성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순종에도 그 마음에는 나의 인간적인 야심과 의지가 숨겨져 있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 온전한 순종을 훼방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단순하고 사심 없는 순종을 금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슬람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육안으로 보기에 이 땅은 감당할 수 없이 척박한 땅으로 보이지만 바울의 고백처럼 무능한 자를 오직 한 가지, 충성된 자로 여기셔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황홀했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서는 길이었으나 주님의 부르심은 당시 나에게 천하를 얻은 듯 풍성한 부요함을 느끼도록 했다.
사심이 없는 온전한 순종
최근 존 비비어의 『관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꽂힌 한 구절이 있어 거듭거듭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다.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 뜻에 따라 행동하라. 상황을 바꾸지 마라. 떠나지 말고 내가 너를 둔 곳에 머물러 있어라.” 이 말씀은 나의 연약함을 향해 비수를 꽂는 말씀으로 여겨졌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속임수, 미련한 믿음에 자리를 떠나 상황을 바꾸어 버리고 싶은 갈등으로 고민할 때가 많다. 주의 부르심의 음성을 못들은 척 하고 얼마든지 그럴 듯한 핑계를 댈 수 있다. 이러한 지뢰밭을 지날 때마다 붙들어 주시는 말씀은 “사심 없이 순종하라”는 말씀이었다. 순종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으로 신음할 때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의 생각을 앞세우도록 다스려 주신다. 경건의 모양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슬림들 앞에 성령께서는 중단 없는 열정으로 어리석고 세속적인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단련해 가신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경건의 능력으로 무장되기 원하시는 것이다. 사심을 버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영성을 갖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의 열심만으로 사망과 어둠의 그늘 가운데 내동댕이처진 저들을 감당할 수 있으랴! 시원치 않은 연장을 쓸모 있게 하시기 위해 풀무불로 거듭해서 담금질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두려운 마음을 느낀다.
가인의 속성과 아벨의 영성
지금보다 더 철이 없을 때는 가인의 행위와 나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했었다. 가인이 드린 제사의 속성과 그의 분노와 폭력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제사간의 질적인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4절에서 그들의 제사에 대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여전히 나의 수고로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가인의 속성을 갖고 있는 내가 유일신을 향한 믿음을 자부하는 무슬림들 앞에 나는 얼마나 깊이, 그리고 제대로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나가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가인은 자기 수고의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했다. 성과주의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나는 하나님이 이 문제를 노출시키시기 전까지는 내 속에 내재된 가인의 속성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가려져 왔다. 자기 수고의 결과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가려던 가인의 거절당한 이후의 인생은 너무도 절망적이고 파괴적이며 폐쇄적이었다. 손에 잡히는 수고의 열매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내세울만한 것이 별 반 없음으로 인해서 감추어진 가인의 속성은 감당하기 힘든 영적 갈등을 일으킨다. 겉으로 보기에 아벨도 자기 수고의 열매로 하나님께 나간 듯 보인다. 그러나 아벨은 피의 제물로 나갔고 가인은 자기 소산의 제물로 나갔다.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쉽게 손에 닿는 소산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드리기를 원한 것이다. 이것 외에는 하나님께 나갈 의지가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나는 아벨의 영성보다 가인의 속성이 유행하는 이슬람권에 서 있다. 때로는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든 내적인 죄성에서 오는 것이든 가인의 속성은 다윗 앞에 골리앗처럼 우뚝 솟은 존재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 제사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은혜로 무장되기를 갈망한다. 그들 속에 가인처럼 자기의 수고로 신에게 나가고자 하는 속성이 사실은 기대와 달리 오히려 그들을 은혜를 거절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케 되며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되는 분노에 붙들려 살아가게 되는 자신들의 영적 처지를 그들이 깊이 깨닫게 되기를 갈망한다. 가인의 속성에 찌든 그들은 자기의 종교적 수고로 신에게 나가는 노력이 바로 죄를 쌓고 더욱 진노 가운데 놓이게 한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복음을 듣지 못한 무슬림 뿐 만 아니라 이미 영생의 은혜를 맛본 나도 더욱 간절히 자기 부인과 오직 보혈의 피를 통한 은혜만을 의지하는 십자가의 영성이 아니고서는 내 속의 가인의 속성,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곁길로 빗나가고 말 것이다. 사단이 금식 후 예수님께 세상의 보이는 영광을 구하도록 유혹하고 특히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능력으로 나타내 보이라고 시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이슬람권 사역 가운데 고군분투하는 사역자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선한 목적이 아니라 정체성을 흔들고 넘어뜨리며 사역지에서 뽑아 버리기 위해 영웅적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고 유혹하며 재촉하는 것이다. 주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명백하게 증명하셨지만 사단의 시험에는 넘어지지 않으셨다.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들을 통해서 주님은 나를 낮추시고 또 낮추셔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주되심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이 땅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구원의 깊이와 은혜를 새롭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 (신8:2)
내 속에 숨겨진 가인의 속성이 노출되는 현장이 바로 영적 광야인 것이다. 꿈틀거리는 세상적인 가인의 야심이 통하지 않는 이슬람권에서 살면서 끝도 없이 펼쳐진 영적 광야를 걷는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낄 때가 있다. 고독감과 소외감의 지뢰가 묻혀진 광야의 여정을 통해서 나의 타락한 속성을 발견하며 신음하지만 이 고통의 경험들을 통해서 주께서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품고 있던 영적 우상들을 제거해 주시며 더욱 친밀하고 겸손한 교제로 인도해 주시는 은혜의 부요함과 사랑의 깊이에 매료되어 간다.
영적 장자권의 소중함
성공적인 사역으로 인한 승리감에 흥분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오직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됨을 인해서 기뻐하라고 하셨다. 얼핏 보기에는 제자들이 누릴 만한 기쁨을 홀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 당신께 속한 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느낀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누리기 원하시는 불변의 기쁨은 성취감에서 오는 일시적인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되기를 갈망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 (시4:7). 이 본질적인 기쁨의 근원을 상실할 때 에서처럼 비전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눈앞의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며 사소한 일들에 목숨을 걸고 혈기를 부리는 에서와 동질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부르심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 현실에 매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영성을 상실하여 하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사람으로 살아가던 에서가 했던 말은 내게도 큰 경종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25:32).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그를 향한 부르심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내게도 그와 같은 영적 부르심의 자리가 있다. 그런데 거듭해서 다가오는 현실적 유혹과 도전이 특별히 나의 수고로 높아지고 인정받기 원하는 가인의 속성이 꿈틀거릴 때마다 에서의 발언을 답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죽지 못한 에서와 가인의 속성이 나로 하여금 부르심에 충성된 자로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내게 유익한 환경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두 마음의 갈등 가운데 놓일 때마다 나는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곤한 자로다.’라고 신음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주의 구원하심을 갈망하게 된다. “죽어야 사느니라” 탐심의 우상이 부상될 때마다 나를 제어하시는 말씀이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26:39)
나는 주님의 기도, 주님의 중심으로 거듭나기를 소원한다. 나의 원대로 되지 않아 안달하는 나의 영혼, 아버지의 원대로 보다는 나의 원대로 행하려는 경향들로부터 온전히 구원되기를 원한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후손이 무수히 많으리라는 비전에 걸맞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아브라함이 그의 마음 속에 집착할 만한 현실적 소유를 제물로 드림으로 자기의 의도와 능력으로 비전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게 된 것처럼 미래의 비전과 현실의 격차 가운데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오늘의 부르심에 온전히 충성된 자로 서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과거가 반복될 때가 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독촉했다.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나도 여전히 사라처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지는 과정 가운데 나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혼돈할 때가 많다. 그래서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의 겸손한 순종을 배우기 원한다.
하나님의 비전은 나의 열심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인도하시는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확신한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현실의 격차 가운데 비전의 성취를 내가 염려할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만백성이 진리를 알기 원하시고 구원을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결국 이 땅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가실 것이다. 이를 위해 사심을 버리고 아브라함이 생전에 오직 하나의 아들로 만족해야 한 것처럼 나도 허락 하신 세월 동안 수에 연연하지 않고 순전한 믿음의 열매를 보기 원한다.
정바울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