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분류보기 > 주제별보기
북쇼핑
2023.8.3  통권 252호  필자 : 한종석  |  조회 : 2100   프린트   이메일 
[특집] - 제8차 세계선교전략회의를 통해 세계선교를 읽다
세계 기독교 상황에서 한국선교의 변화를 위한 제언1)

들어가는 말 
우리는 바야흐로 세계 기독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2)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세계 기독교의 상황을 살피고, 한국선교를 되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인이신 선교의 참여자로서 한국선교에 필요한 변화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위해 애쓴 노력과 결과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급변하는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에 단순하게 대응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논의되는 논점들은 필자의 현장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선교지에 대한 인식과 자세에 대한 자기 성찰에서 출발했으며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에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에 있어서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제언임을 밝힌다.
 
선교지에 대한 편견 
사람은 사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편견은 사람 간의 관계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데 편견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인 편견으로 발전하게 되면 한 집단과 다른 집단 간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도구인 미드저니(Midjourney)에게 “선글라스를 낀 채 한 손에 커피를 든 여성이 거리를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그려줘”라고 입력했더니, 미드저니는 대부분의 경우 백인 여성을 모델로 해서 이미지를 생성했다. 반면 “거리 가판대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여성을 그려줘”라고 입력을 했더니, 모두 머리와 가슴을 두빠따(dupatta)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숄로 가린 인도 혹은 파키스탄의 중년 여성이 허름한 골목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3) 흑인 여성이 선글라스를 낀 채 커피를 들고 거리를 걷기도 하고 백인 여성이 가판대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경우도 수없이 많을 텐데 말이다. AI가 인간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볼 때 이 사례는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집단적인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사인 우리는 혹은 한국교회는 선교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점검을 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가 선교지의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지적으로 우월하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거나 혹은 “우리가 그들을 영적·지적·문화적 무지의 상태에서 구해주어야 한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선교지 하면 구호단체들의 모금 방송에서 나오는 모습이 자동으로 떠오른 다면 우리는 선교지에 대한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일으키는 첫 번째 원인은 경제적 불평등이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물질의 풍요함으로 인해 선교지의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는 혹은 측은해하는 경향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상대적인 빈곤이 영적 혹은 지적인 무지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데도 말이다. 경제적인 불평등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선교지의 교회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4) 

서구교회가 선교지교회를 열등하게 인식하고 자신들은 그들보다 우월하므로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우리도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선교지 교회와 불평등한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은 그 관계 안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미 유물이 되어버린 ‘식민주의’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16세기 이후 선교와 식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지적한다.5) 여기서 식민주의는 단순히 정치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 우월주의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하셨다는 선민 의식도 포함한다.6) 따라서 정치체제로서의 식민주의는 종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요소와 사회·경제적 권력의 역학관계에서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식민주의가 갖는 그릇된 편견은 경제적 우월주의뿐 아니라 정신적인 우월주의도 포함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고 더 잘 알고 있다”는 특권의식이다. 알버트 메미(Albert Memmi)가 지적한대로 특권 의식은 식민주의적 관계의 중심에 있다. 예를 들어 “가장 가난한 식민지배자도 자신이 어떤 피식민지배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7) 이는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지적 도덕적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신식민 시대’는 이러한 식민주의적인 편견이나 구조들이 공식적인 식민 시대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명백한 힘을 발휘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교회 구조 안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만약에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갖고 있는 피선교지인들에 대한 인식에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고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식민 시대의 특징은 다국적 기업의 지배력이다. 한편으로 다국적 기업의 편리함, 저비용, 효율을 무기로 전 세계를 지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자립, 공동체, 정체성들을 희생하고 있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의 특징은 다국적 선교단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위험이 있다. 서구교회가 선교지교회와의 협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 만으로는 과업을 완수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었다.8) 만약에 다국적 선교단체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저비용 고효율로 선교지교회가 대신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다국적 기업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 시대보다는 두드러지지 않겠지만 여전히 많은 재정적 권한과 영적인 권위가 의문의 여지없이 선교사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식민의 정신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또 다른 식민주의의 모습은 구원자 콤플렉스이다.9) 구원자 콤플렉스는 한마디로 가난하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내적인 갈망이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도움을 주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거나, 현지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면 이것은 건강한 선교사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선교사 개인의 모습이 겸손하고 현지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가 있다. 선교지 교회와의 관계 및 협력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다. 식민 시대에 살고 있는 지배국의 주민이 자신은 지배국 국민이 아니라고 외쳐도 여전히 지배국 국민이고 식민지 주민이 아무리 자신은 식민지인이 아니라고 외쳐도 여전히 식민지인일 수밖에 없다. 선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선교 구조가 이러한 신식민주의 안에 갇혀 있다면 개인의 저항 혹은 노력은 거대한 물결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국제선교단체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는 필자도 구조적인 문제 앞에서 개인의 노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었다.

요어그 리거(Joerg Rieger)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신식민주의에 둔감한 것은 자신들이 공식적으로는 식민 지배 세력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10)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제국주의에 의해서 식민지배를 당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식민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식민지배자였던 적이 없고 오히려 피지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안에 위에서 말한 식민주의적인 생각과 구조가 있고 그 안에 갖혀 있다면 우리와 현지 동역자들의 관계는 건강한 관계로 발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변화의 영역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변화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선교의 참여자로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 가지 영역에서의 인식 변화가 요구된다. 이 영역은 첫째, 의사 결정 둘째, 성경해석 셋째, 재정의 영역이다. 이 영역들은 삼자원칙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선교지의 교회가 스스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전),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외부에 재정적/영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급),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의사 결정을 하고 (자치),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자신학화) 노력이 필수 적이다. 필자가 현지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어떠한 변화가 요구되는지 제안하도록 하겠다.
 
의사결정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의 주민이 이슬람을 믿는 곳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억압, 편견, 법률에 대한 오용 등으로 현지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숫자의 현지인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선교를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쓰고 열매를 맺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무슬림 대상으로 선교를 하는 데 대부분의 경우 현지교회와 동역하지 않고 자기들이 직접 선교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현지 기독교 지도자들은 불편해하고 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중요한 결정에 현지교회가 제외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0년대 초반에 번역의 문제로 현지 성서공회와 번역을 주관하던 국제단체에 큰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 일은 한 언어 공동체를 위해 국제단체와 같이 번역을 하던 현지 성서공회가 갑자기 번역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문제를 국제단체의 본부에 단체의 현지 지부가 잘못된 번역을 하고 있으니 후원을 취소하고 제재를 가하라는 편지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번역 문제가 첨예한 이슈였는데 선교단체와 현지 성서공회 간의 갈등에서 선교단체 내부로 번져서 하나님의 아들의 상황화한 번역을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으로 나뉘어 논쟁을 하며 내부에서도 큰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내부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국제복음연맹에 사건을 위임하고 지도를 따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번역이 올바른 번역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사례를 이야기하는 목적이 아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어느 번역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언어학적, 주석학적, 혹은 신학적인 문제를 넘어서 이러한 결정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교학적인 성찰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현지교회가 언어학적, 주석적, 신학적으로 외부인 선교사들에 비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외부인들 간의 갈등과 논쟁이 있었고 수많은 외부인들이 관여를 했지만 정작 현지교회는 배제되었다. 현지교회 패싱의 전형적인 예이다. ‘우리가 더 잘 안다’라는 그릇된 편견이 드러난 그리고 시간이 걸려도 현지교회와 대화를 하고 함께 가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어찌되었든 우리(외부인)가 결정을 내려서 번역 프로그램이 진행되게 하려는 ‘과업 중심’의 모습이 드러난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외부인인 선교사가 주도권을 갖는 상황에 대해 제이 마텡가(Jay Matenga)의 글은 우리에게 통찰을 제시해주고 있다.11) 마텡가는 뉴질랜드 마오리족 그리스도인으로 서구 교육을 받고 서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다가 마오리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로 발견하고 토착화한 교회가 선교의 주역이 되는 일에 다양한 기여를 하고 있다. 먼저 마텡가는 식민주의적 개념에 대비해서 토착 문화와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지역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미개하고 발전이 필요하고 문명화가 되지 않았다고 치부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있는 곳을 미개하고 덜 발달되어 있고 문명화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들이 우리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설 수 없다는 편견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마텡가는 코로나19 이후 선교에서 지역에 적합한 혁신과 의사결정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12) 이는 코로나19 이후에 이동의 제한과 선교사의 거주가 제한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선교사가 참여하고 있던 의사결정 과정의 혁신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의 혁신은 반강제적으로 필자가 거주하는 나라에서 이미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의 선교기관이나 신학교에서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에는 지금까지 상당수의 외국인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외국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선교기관이나 신학교 등은 외국인선교사들이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신학교나 선교기관에 외국인이 이사로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재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주어진 제도 내에서 외국인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정부의 결정에 의해서이지만 의사결정 과정의 현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 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도 적지 않지만 오히려 선교사들이 이양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던 것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현지 중심의 의사결정 과정으로의 변환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야 한다. 



성경해석 
두 번째는 성경해석의 권위와 상황화에 관한 문제이다. 마텡가는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화의 문제는 “우리가 이해한 복음을 다른 문화 상황으로 번역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것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한다.13) 먼저 우리에 의해서 복음이 해석되어지고 그 해석된 결과를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마텡가는 복음은 “외부에서 들어온 선교사에 의해서 번역된 인식체계”가 아니라고 한다.14)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복음이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학 작업을 자신학화라고 이야기한다면 자신학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물론 이 자신학화는 고립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교회와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해석의 권위는 토착화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고 외부인들은 현지 기독교인들의 초대에 의해서 선교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외부인의 역할은 현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질문을 하도록 돕는 것이지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얻어진 해답을 제공하는 것을 아니다. 이는 우리가 믿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새로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황과 문화에 맞는 복음의 이해를 제공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외부인인 선교사는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현지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외부인이 가진 힘으로 외부인이 생각하는 대로 능력을 키우던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에 가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현지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고국에서 하듯이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에 관련해서 필자가 사역하는 현지 신학교의 학장과의 대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나라에도 외부에서 강사들이 와서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세미나, 워크숍 등을 많이 개최한다. 그 학장의 말에 의하면 며칠 동안 진행되는 세미나에서 외국인 강사들은 마치 세일즈맨이 상품을 팔듯이 자신들이 가지고 온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이 프로그램을 현지에서도 진행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이 패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현지인들의 의견을 묻거나 현지에서의 필요성 적용 가능성에 대해서 물어보는 프로그램을 자신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 훈련의 과정도 외부에서 결정해서 “아, 이런 것이 현지에 필요할 거야”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면 현지인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마텡가의 지적대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외부선교사들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더라도 현지인 주도의 선교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지인 주도의 성경해석과 자기계발이 시작되려면 외부인들은 자신들을 지도자, 교사 혹은 대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손님, 학생 그리고 섬기는 자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마텡가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15)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교활동의 네 가지 단계의 마지막 단계인 참여 단계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선교사들은 현지교회가 있는 곳이라면 의지적으로 부모 단계, 파트너 단계를 넘어서 마지막인 참여 단계부터 시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선교가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고민하는 이양의 문제는 시작부터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재정 
현지교회와 관계에서 우리의 한계가 드러나는 영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선교지교회와 건강한 동역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재정의 문제이다. 경제적인 불균형은 선교지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들에게 의지하게 하였고 선교사들에게 선교지의 교회들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여지를 제공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선교지의 처지를 보면 경제적인 도움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경험을 나누도록 하겠다. 현지에 있다 보면 한국교회가 가진 재정적인 힘으로 인해서 현지인들은 한국선교사에게 혹은 서구선교사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음을 경험한다. 필자가 강의하는 신학교 졸업생 중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지역 사회 개발을 포함한 다양한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있다. 열악한 기독교인들의 교육과 이에 따른 안정된 직업을 찾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아이들의 학업을 돕기 위한 방과 후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학교의 개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애초에는 필자를 초청하려고 했으나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학교는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전히 교회 구성원들의 협력을 통해서 시작하고 운영되는 학교인데 외국인 선교사가 개교 예배에 오게 되면 참석자들이 외국인선교사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학교를 시작한 것이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이 학교가 외부의 도움 없이 시작되는 학교임을 알리고 시작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외국인의 존재와 재정의 도움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좋은 결정이다”라고 말하며 그 목회자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폴 벤더-사무엘(Paul Vendor-Samuel)은 서구선교사들이 재정과 교육 수준의 차이 그리고 단순히 서양인이라는 사실이 가져오는 힘의 불균형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6) 이러한 힘의 불균형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에 한국선교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고민에 요한에 의해서 소개되는 오병이어 사건은 선교사와 현지인동역자 그리고 재정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이야기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예수님과 제자 빌립, 안드레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제공한 한 아이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이겠느냐”고 물어보시자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며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 그나마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어서 한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예수님 앞에 두지만 그 또한 부정적이다. 그는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니까?”라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아마도 서구교회가 선교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혹은 우리가 선교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까 싶다. “현지에서 조금씩 조달해 봤자 턱도 없이 모자랄 거야. 현지에서 조달한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재정에 비교하면 얼마나 되겠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 명은커녕 한 명도 배불리 먹을 수 없을 걸. 그냥 우리가 외부에서 조달해서 채워주는 게 빠르겠어.”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기셨다. 마찬가지로 현지에서도 예수님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현지의 재정 능력 자원을 가지고 충분히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마도 자기가 먹을 도시락을 가지고 온 사람이 그 아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교사가 해야 할 것은 현지의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외부에서 조달해서 주기 보다는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형편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가진 것을 발견하고 나누도록 격려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교에 동참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리거나 우리의 시간표대로 일이 진척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오병이어의 주님이 또한 선교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한국선교가 세계 기독교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참여자로서 긍정적인 기여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과 자세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선교는 현지 이양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양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양을 할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는 자로 혹은 결정권자로 현지에 있지 않고 손님으로 있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양할 것들이 시작부터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된 것들은 이러한 상황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언들이 다소 이상적이고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선교지에서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지의 상황이 다르다고 우리의 지향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선교지마다 변화의 시점과 속도는 다를지라도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의지와 자세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가 현지에 있는 것은 현지에 무엇을 주는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 그리스도인과 연합함과 하나 됨으로 그리고 함께 삶을 살아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샬롬의 증인으로 현지에 있는 것이다. 선교지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권위를 가지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며 (자치), 외부에 재정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급),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얻은 경험과 성찰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며 적용할 때 (자신학화), 비로소 스스로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는 (자전) 공동체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이 한국선교의 긍정적인 변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미주  
1) 이 글은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에서 출간된 《선교, 이제 어떻게 하지? –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모색》(서울: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 2022)에 수록된 필자의 글 “진정한 동반의 길을 찾아서” 중 일부를 사용하고 본 발제의 목적에 맞게 편집 및 수정되었음을 밝힌다. 
2) 임태순은 기독교 역사학자 마크 놀(Mark Noll)의 세계 기독교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면서 ‘세계 기독교’는 단순히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는 의미를 넘어서 세계적이면서 지역적인 정체성이 공존하는 기독교를 말한다고 쓰고 있다 (임태순, 2022, 78). 
3) 네이트, 〈커피 든 선글라스 여성 요청에…편견쟁이 AI, 이 그림 그렸다〉, https://m.news.nate.com/view/20230404n01067/ 2023. 06. 05.
4)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가 기존교회와 신생교회의 관계에 미친 영향은 요어그 리거(Joerg Rieger) (2004)의 소논문과 테일러 덴여(2018)의 논문 2장을 참조하였다. 
5)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American Society of Missiology Series, no. 16. (Maryknoll, N.Y: Orbis Books, 1991), 303.
6)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298. 
7) Albert Memmi, 1974. 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London: Earthscan Publications, 1974). 
8) Samuel Cueva, Mission Partnership in Creative Tension, (Cumbria, UK: Langham Partnership, 2015).
9) Taylor W. Denyer, “Decolonizing Mission Partnerships: Evolving Collaboration between United Methodists in North Katang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DTh diss., (The University of South Africa, 2018), 56.
10) Joerg Rieger. 2004. “Theology and Mission Between Neocolonialism and Postcolonialism.” Mission Studies 21, no. 2 (2004), 209.
11) Jay Matenga, “Centring the Local: The Indigenous Future of Mission.” Paper presented at the Wycliffe Global Alliance/SIL “Together in Christ 2021” Conference, https://jaymatenga.com/pdfs/MatengaJ_CentringLocal.pdf. 
12) Jay Matenga, “Centring the Local”, 4.
13) Jay Matenga, “Centring the Local”, 3.
14) Jay Matenga, “Centring the Local”, 3.
15) Jay Matenga, “Centring the Local”, 4.
16) Paul Vendor-Samuel, 《선교, 이제 어떻게 하지? –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모색》(서울: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 2022), 226-227.

※참고문헌 
        Bosch, David,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American Society of Missiology Series, no. 16, (Maryknoll, N.Y: Orbis Books, 1991).

     Cueva, Samuel, Mission Partnership in Creative Tension, (Cumbria, UK: Langham Partnership, 2015).

        Denyer, Taylor W., “Decolonizing Mission Partnerships: Evolving Collaboration between United Methodists in North Katang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DTh diss., (The University of South Africa, 2018).

        Matenga, Jay, “Centring the Local: The Indigenous Future of Mission.” Paper presented at the Wycliffe Global Alliance/SIL “Together in Christ 2021” Conference.

    Memmi, Albert, 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London: Earthscan Publications, 1974).

    Rieger, Joerg, “Theology and Mission Between Neocolonialism and Postcolonialism.” Mission Studies 21, no. 2: 201-27, 2004. 

        임태순, “지난 세기의 선교 패러다임 변화들과 코로나 이후의 선교,” 《선교, 이제 어떻게 하지? –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모색》(서울: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 2022), 63-95.





한종석 선교사 | GBT & PCK, P국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