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嘉慶) 교안의 발생 1784년 건륭대교안 이후 중국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금교 기조가 이어져 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천주교 선교사들이 청조를 위해 북경에서 복무하는 것은 용인되었고, 이들 스스로의 신앙 활동은 허락되었으며, 북경 이외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건륭제 뒤를 이은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 치세 중반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큰 탄압을 받지 않고 계승되던 중국에서의 선교사역은 가경 10년(1805)에 발생한 덕천사(德天賜)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전국적인 단속과 옥사를 야기하였다. 이로써 북경 이외 지역에 적용되던 선교 제한 조치가 북경 지역 천주교회에 대한 금교 조치를 동반하여 선교 통제와 탄압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북경에서 27년 동안 주재하고 있던 이탈리아 어거스틴선교회 소속 아데오다토(德天賜, Santo Agostino Adeodato) 선교사가 1805년 직예성의 선교 지도와 서신을 중국인 신도 진약망(陳若望)에게 맡겨 마카오로 전하게 했다. 이 서신에는 북경 인근 마을에서 발생한 교무 분쟁에 대해 로마로 보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진약망 일행은 마카오로 가던 중 강서 지역을 경유하다가 발각되었고, 강서 순무 진승은(秦承恩)은 1805년 2월 9일에 이 사실을 청조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는 가경제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이에 앞서 1802년에 영국은 마카오 보호를 구실로 군함을 보내어 광동 연안에 9개월 동안 정박시킨 일이 있었고, 인도에서 영국 군대가 제2차 마라타전쟁(1803-1804)을 승리로 이끌며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기에 서구 열강의 중국 위협에 대한 우려를 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선교사들의 보고 문서와 지도가 서양으로 전해지면 서양 제국이 중국 땅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염려가 커졌고, 특히 영국이 산동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기에 이러한 염려는 근거 여부와 무관하게 더욱 심각한 것으로 여겨졌다.
체포된 진약망은 3월 북경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고, 북경에 있던 천주교회당 네 곳에서의 신앙 활동에 대해 진술도 하였다. 북경 천주교회가 다양한 선교 서적을 출판하고 많은 중국 신도들을 입교시켰음이 알려졌는데, 특히 입교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만주족 기인(旗人)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가경제를 다시금 더 크게 놀라게 했다.
가경제의 금령 강화 이에 가경제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심각한 사안인 것으로 간주하여 천주교 금령을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천주교를 ‘양교(洋敎)’라 지칭하고 ‘사교(邪敎)’라고 단정하였으며 천주교회의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천주교 경전과 선교 소책자와 목판을 전부 압수하여 소각하도록 했다. 선교사 아데오다토는 열하(熱河)로 압송 구금하고, 진약망과 함께 체포된 본 사건 관련 중국 교도들은 이리(伊犂)로 유배하여 노비가 되게 했다. 아울러 서양교회 관련 관리 지침과 선교 관련 처벌 지침을 정리하여 세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다.
가경 16년(1811) 5월 20일 가경제는 모두 10조항의 〈관리서양당장정(管理西洋堂章程)〉1)을 비준하여, 선교사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지침을 세웠다. 관원과 병사들을 파견하여 교회당을 관리 검열하게 하고, 왕래하는 서신은 모두 열어서 심사하고, 선교사의 출근과 외출은 모두 사전 보고에 따라 관병의 호송을 받게 하였으며, 천주교회당 앞에 황제의 허락 아래 세워졌다는 ‘칙건천주당(勅建天主堂)’이라는 표기까지 제거하게 하였다. 또 관리가 천주교를 신봉하면 면직하고, 기인은 형벌을 가중하고, 신도들은 도형(徒刑)으로 다스리게 했고, 입교를 참회하면 죄를 감해 주고 출교가 확인되면 죄를 면하게 했다.
가경제는 가경 16년(1811) 5월 말 〈엄정서양인전교치죄조례(嚴定西洋人傳敎治罪條例)〉를 제정하여 건륭대교안 이후 내려오던 천주교도에 대한 다소 온건한 처벌 기준을 엄벌하는 방향으로 기준을 새로 세웠다. 천주교를 전파하는 서양인과 중국인은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고, 추종자나 입교자는 유배를 보내고, 기인 중 입교자는 기인 명부에서 삭제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규정을 명료히 하였다.
가경제는 7월 19일에 천주교와 단속의 책임이 있는 관원들에 대한 치리 지침 〈실찰문관처벌전조(失察文官處罰專條)〉와 함께 〈실찰무관처벌전조(失察武文官處罰專條)〉, 〈실찰팔기각관처벌전조(失察八旗各官處罰專條)〉 등 3개 지침이 공포되었는데, ‘팔기각관’ 관련 지침은 ‘팔기’ 즉 ‘만주 귀족 기인’들로서 각급 관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일반 문과나 무관보다 가중 처벌을 받게 하는 내용으로 특별히 추가 공포한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단속으로 입교자가 자수하거나 취조 처벌한 경우는 징계를 면제하고, 포교 활동을 단속하지 못한 관료에게는 강등, 벌봉의 처분을 내리고, 포교 내용을 감추고 보고하지 않으면 파면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징계 규정을 명료히 하였다.2)
가경 후기 선교 통제 가경제에 의한 천주교 포교 단속 지침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선교사와 교인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귀주성에서는 3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체포되었고, 중심 인물 오국성(吳國盛), 장대붕(張大鵬) 등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 사천성에서는 1814년 선교사 뒤프헤스가 신진현(新津縣)에서 체포되어 성도(成都)에서 참수되었고, 30여 명의 교도들이 변경으로 유배되었으며, 조사정(趙斯定), 동오(童鰲), 원재덕(袁在德), 유한좌(劉翰佐) 등 중국 신부들도 체포되어 옥사하거나 처형당하였다. ■ 호북성 마반산(磨盤山)에서 선교하던 유극래(劉克來) 신부가 교수형에 처해졌고, 기타 신부와 교도 24명은 변방으로 유배당하였다. ■ 호남성에서 선교하던 이탈리아 국적 프란시스코회 신부 란트루아(蘭月旺, Giovanni Lantrua, 1760-1816)는 5년간 투옥되었다가 1816년 장사(長沙)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이러한 금령 강화가 공식 발표되었지만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선교사들의 경우 개인적인 종교 생활에 대해서는 금지와 통제가 있지 않았다. 다만 직무상의 무능으로 인한 귀국 조치 등 일부 관리 감독이 강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조치는 북경과 주요 지방 정부에서는 견고히 집행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엄격히 집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지역에 따라 은밀한 선교는 여전히 이어졌음을 관련 보고와 추가적인 교안이 일어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미주 1) 《仁宗實錄》 卷143, 嘉慶 10년 5월 乙丑조. 2) 이상 가경 연간 교안과 처벌규정 제정 경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준갑, 《건륭제와 천주교》 (서울: 혜안, 1993) 제3편 제1장 참조.
사진 설명 | 秦承恩墓志-西安碑林墓志(진승은표지-서안비림묘지) 사진 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