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전후를 돌이켜보기 <중주>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달 하순, 특히 24일을 전후해서 매스컴은 한중수교 30년과 관련된 특집들을 많이 내보냈습니다. 8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30년 동안 한중관계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교역량은 얼마나 증가했고, 유학생 교류는 얼마나 이뤄졌고, 이런 문제들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그 같은 보도들을 대할 때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30년을 잠깐씩 돌이켜보았습니다. 한중수교는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선 선교사들이 중국 현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선교활동의 범위가 다양해지고 넓어졌으니 말입니다. ‘중국선교’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인 것도 한중수교 이후입니다. 저는 한중수교 직후에 ‘중국선교는 특수선교에서 이제 일반선교, 지하선교에서 지상선교로 전환되었다’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에서는 매년 세계 각지에 파송되어 있는 선교사들의 숫자를 발표하는데 저는 지금 그 자료들을 다시 들춰보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제일 많이 파송되어 있는 나라는 언제나 중국이라고 발표되던 것을 <중주> 가족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참 치열했습니다.
한중수교 이후 한중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사드 문제가 발생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입니다. 한중수교 30년 기사에서도 ‘삐걱인다’는 말이 두어 군데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4일 저녁에 서울과 베이징에서 열린 축하 파티는 축하 일색이 아니고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중국선교도 마친가지입니다. 중국선교는 다른 나라를 대상으로 한 선교보다 왕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의 정책과 태도가 변하면서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많은 선교사들이 비자발적 귀국을 하거나 선교지를 바꿔야 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치열했던 중국선교가 ‘멈칫기(期)’에 들어섰다고 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30년을 돌아켜보다가 내친 김에 30년 이전도 돌아보았습니다. 한중수교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중국어 선교방송이 국내에서 줄기차게 중국을 향해 송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좁은 틈을 헤집고 틈새선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1992년 이전이 오히려 더 순수했고, 더 열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는 것인지 <중주> 가족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지금은 더 순수해지고, 알차게 준비하고, 이른바 ‘내공(內工)’을 쌓아야 할 때가 아닌가?’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110년 전 9월을 돌이켜보기 30년 전의 한중수교 전후를 돌이켜보다가 좀 더 멀리 110년 전 이 달, 9월에 있었던 일도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110년 전이면 1912년이지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景昌門) 안에 있는 여성경학원에서는 예수교장로회 제1회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러 회무를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9월 4일에 전도국 위원의 보고와 청원 순서가 있었습니다.
전도국 위원의 청원서는 모두 3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1항은 “우리 교회에서 주일마다 구원지도를 전파할 뜻으로 가르치는 것이로되 총회에서 1년 중 한 주일을 특별히 택정하여 각 교회에 명령하시와 전도국을 위하여 예배보게 하시되 그 주일에는 전도의 뜻으로 강도도 하고 외국전도도 할 뜻으로 기도도 하고 그 주일에 특별히 힘써 연보도 하되 그날은 감사일로 정하시고 각 교회의 인도하는 이들이 그 전 주일의 예비로 힘있게 광고할 일이옵고”였습니다. 이 청원서는 110년 전에 벌써 외국전도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청원서에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제2항입니다.
"노회를 시작할 때에 제주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전도를 시작하여 지나(支那, 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 지나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청원인데 장로교 총회는 이 청원을 받아들여 1913년에 박태로(朴泰魯) 목사님 등 세 명의 선교사를 산둥성(山東省)에 파송해 중국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한국장로교의 중국선교 결의 110년이 되는 해인 것입니다.
그리고 청원서 제2항의 앞부분, “노회를 시작할 때에 제주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은 1907년에 제1회 독로회(獨老會)에서 제주선교를 결의하고 이기풍(李基豊) 목사님을 제주에 파송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이 선교의 DNA를 지닌 교회였습니다. 정세, 형편 이런 것이 변해도 DNA는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 제주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린 이기풍 목사와 가족들
지난 7월 30일, 성남의 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유기성)에서는 ‘선교중국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중화권과 한국교회의 선교 협력에 대해 나누며 토론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을 주관한 중어권한인선교사협의회는 한국의 중어권 선교사역의 대표, 각 기관의 대표 그리고 철수한 중국선교사들의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서 대만 중화복음신학원 다이지쭝(戴继宗, 제이미 허드슨 테일러) 원장님이 ‘중화권과 선교중국 협력상황’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번 호에는 그 발표원고를 기획글로 실었습니다. 다이지쭝 원장님은 국제 OMF선교회 홍콩OMF동아시아지역 디렉터로 섬긴 적이 있는 중국사역의 핵심 리더 가운데 한 분입니다.
다이지쭝 원장님의 원고를 살피면서 “중국선교운동을 이해하려면 중국선교운동이 하나님이 세계교회 가운데서 일하시는 사역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선교사역은 당을 결성하는 사역이 아니라 연합하여 하는 사역이다”, “고난은 생존의 일부일뿐 아니라 더욱이 신앙생존의 문제이다”, “선교는 기도를 잊지 말고 기도는 선교를 잊지 말라” 등 가슴을 찌르는 말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중주> 가족 여러분께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달이 점점 커지고 동그래지고 있습니다. <중주> 가족 여러분, 추석 즐겁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사진 출처 | (위)바이두/ (아래)제주일보 유관지 | 중국어문선교회 고문, 웹진 <중국을주께로> 발행인, 용산감리교회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