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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3  통권 223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076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명말청초(明末淸初) 서양 선교사들
프란치스코 파시오
프란치스코 파시오(Francesco Pasio, 巴范濟, 1551-1612) 신부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으로 1572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파시오는 1578년 마테오 리치, 루지에리와 함께 동방선교를 위해 파송되어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하여 그해 9월 인도 고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그는 인도 예수회 경리신부의 직무를 담당했다. 

파시오는 이후 순찰사 발리냐노의 지시에 따라 마테오 리치와 함께 마카오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1582년 4월 고아를 떠나 8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사역을 시작했다. 1579년에 이미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 선교사역을 진행하고 있던 루지에리와 함께 내륙 사역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1582년 12월 조경(肇慶)으로 들어갔으나 거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마카오로 되돌아왔다. 이후 발리냐노의 명에 따라 1583년 선교 사역지를 일본 나가사키로 옮기게 되어 중국을 떠났다. 파시오는 1608년에 일본과 중국선교를 감독하는 직을 맡게 되었고, 1613년 3월 22일 시찰 목적으로 마카오로 왔다가 병으로 그해 8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에도아르도 데 산데
에도아르도 데 산데(Edoardo de Sande, 孟三德, 1547-1599)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1562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산데는 1578년 3월 마테오 리치, 루지에리 등과 함께 동방선교를 위해 파송을 받아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하여 그해 9월 인도 고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사역하던 산데는 1585년 7월 안토니오 아쿠아비바 신부와 함께 마카오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는 1585년부터 1597년까지 중국 예수회 선교단의 감독직(관구장)을 맡아 재직했으며, 특히 마테오 리치의 내지선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1597년에는 조경 선교지를 시찰하였고, 1591년에는 소주(韶州) 사역지를 시찰하였고, 1599년 7월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Antoino de Almeyda, 麥安東, 1557-1591)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1576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585년 3월 고아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7월 마카오로 옮겨 왔다. 1589년 8월 15일 조경을 떠난 마테오 리치 신부를 수행하여 8월 24일 소주에 도착하여 사역을 도왔다. 하지만 병이 들어 마카오로 철수하였다가 소주로 복귀하여 사역하다가 1591년 10월 17일 병사하였고, 유해는 마카오로 옮겨 안장되었다.

프란치스코 데 페트리스
프란치스코 데 페트리스(Francesco de Petris, 石方西, 1563-1593) 신부는 이탈리아 로마 출신으로 1590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선교에 합류하였다. 마테오 리치를 도와 소주에서 사역하였고, 중국어 학습이 뛰어나 마테오 리치로부터 크게 신뢰를 받았다. 1591년 야간에 침입한 도적에게 머리를 다친 이후 건강이 좋지 못하였고, 1593년 11월 5일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마카오로 옮겨 안장되었다. 

조아오 다 로차
조아오 다 로차(Joao da Rocha, 羅如望(羅儒望), 1565-1623)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이며 자(字)는 회중(懷中)이다. 1583년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591년에 마카오로 와서 이듬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로차는 1597년 7월 이후 소주 선교팀에 합류하였고, 이듬해 6월 남창(南昌)으로 이동하여 사역하였다. 1600년 마테오 리치가 북경으로 떠난 이후 남경으로 옮겨 와서 성모회를 조직하고 선교사역을 주관하였다. 서광계가 1603년 그에게서 《천주실의》와 《천주십계》 등 교리서를 전달받았고, 마침내 그에게서 영세를 받았으며, 황명사(黃明沙), 구태소(瞿太素)와 그의 아들 구식곡(瞿式穀)에게도 영세를 주었다. 

1616년 남경에서 교난(敎難)이 일어나자 남창으로 피하였고, 이후 복건성 장주(漳州)에서 선교하던 중 교난이 일어났을 때는 항주(杭州)의 양정균(楊廷筠)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1622년 니콜로 롱고바르디의 뒤를 이어 중국 예수회 감독(관구장)이 되어 중국선교를 총괄하였다.

조아오 소에이로
조아오 소에이로(Joao Soeiro, 蘇如望, 1566-1607)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1584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586년 4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 고아로 와서 선교하다가 1591년 마카오로 파견되었고, 159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 바로 남창으로 파견되어 사역하다가 1607년 남창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마카오로 옮겨 안장되었다. 

라자리우스 카타네오
라자리우스 카타네오(Lazarius Cattaneo, 郭居靜, 1560-1640)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581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589년 인도로 와서 고아에서 선교하다가 1593년 마카오로 옮겨 왔다. 

가타네오는 1594년 이후 소주에서 마테오 리치의 사역을 도왔고, 1598년 마테오 리치가 남경을 경유하여 북경을 다녀올 때 동행하였으며, 마테오 리치를 도와 《중서자전(中西字典)》을 편찬하였다. 1599년 8월에는 마카오로 복귀하였고, 내륙 선교현황을 보고하고 진상물을 확보하여 1600년 3월 남경에서 사역하고 있던 마테오 리치 선교단에 다시 합류했다. 1601년 다시 마카오로 복귀하였고, 1604년에는 말라카 선교지를 다녀왔다. 1606년 남경으로 와서 선교사역을 담당하였고, 이후 서광계의 요청으로 상해(上海)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611년에는 이지조의 요청을 받아 절강성 항주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1620년에는 상해 서북의 가정(嘉定)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1622년 이후 항주로 돌아와서 선교하다가 1640년 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가스파르드 페레이라
가스파르드 페레이라(Gaspard Ferreira, 費奇規, 1571-1649)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1589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593년 4월 마카오로 와서 중국선교를 시작하였고, 1604년 2월 마카오를 떠나 남경, 북경 등지에서 사역하였고, 1612년 소주에서 교난이 발생한 이후 남웅(南雄)으로 옮겨서 사역하였다. 1649년 12월 광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설명 | 로차(羅儒望) 신부가 번역한 《천주성교계몽(天主聖敎啓蒙)》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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