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정 할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이 땅을 떠나셨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89세를 일기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신 것이다. 당시 자손들이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는 예수를 믿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인 만큼 기독교장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고모님 두 분이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기독교장으로 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장례식은 유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유교식으로 장례가 진행된다는 것은 장례를 치른 뒤에도 유교적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집안에 상청(丧厅, 돌아가신 분의 혼백을 모신 상자를 놓고 광목 같은 천으로 네모난 천막을 대청마루에 만들어 둠)을 만들어 아침, 저녁밥을 지어 받치며 귀신을 달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보통 1년 혹은 3년을 하는 경우도 있다. 큰집 당숙 아저씨가 나의 친정 어머니에게 말했다. “형수님, 아이가 태어나도 백일상과 돌상을 차려주지 않습니까? 상청을 설치하고 작은 어머니께 일 년 상식(上食)을 드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관습은 유교에서는 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죽은 조상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외며느리인 우리 어머니는 내가 전도하여 교회를 나오고 계셨지만 집안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상청을 차려 놓고 아침, 저녁 상식(생자[生者]처럼 하루에 세 번 먹는 망자[亡者]의 끼니_한국민속대백과사전)을 하기가 싫다고 하셨지만 대세는 장례가 끝나면 상청을 설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집안 아저씨가 이미 오동나무로 만든 혼백상자(상자 안에 고인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을 넣어 두고 그곳에 고인의 혼이 머문다고 여김)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꼼짝없이 일 년 동안은 귀신에게 아침, 저녁 음식을 바치는 일을 안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공원묘지를 향하여 장의차는 출발했다. 나는 공원묘지로 가는 내내 장의차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안 믿는 가족과 친척들이 대다수인데 방언으로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나는 왠지는 모르게 기도를 시키시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공원묘지로 가는 내내 장의차 안에서 방언으로 소리내어 기도하였다. 나는 이때만 해도 잠시 후 무덤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단지 예수 안 믿는 대부분의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할지가 관심사일 뿐이었다. 공원묘지에 도착해서 하관을 하고 봉분을 한 다음 다시 음식을 차려 놓고 마지막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며느리인 어머니에게 어서 와서 절을 하라고 하였다. 순간 나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어머니를 꽉 껴안으며 절을 못하게 말렸다. “엄마 절하지마. 할머니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하는 거야. 절하면 엄마도 귀신을 섬기는 거라구” 그러자 엄마는 조용히 나를 타이르셨다.
“얘, 조용히 지나가자. 내가 한 번 고개 숙이면 된다. 안 그러면 시끄러워진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어머니를 끌어 안은 채 끝까지 절을 못하게 말리면서 소리쳤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성경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우리 할머니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이미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시체 앞에 절하는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일입니다.”이렇게 내가 무덤 앞에서 마지막 제사를 드리려는 것을 훼방을 놓자 마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의 작은 고모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별안간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년아, 왜 우리 엄마에게 외며느리가 절을 못하게 해” 고모의 주먹은 내 입을 때렸고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정신이 어찔했다. 하지만 엄마를 뒤에서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입안이 얼얼하더니 앞니 두 개가 흔들거렸다. 나는 앞니가 분명히 빠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고모와 싸우고 있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당숙 아저씨가 우리 할머니의 혼백상자를 발로 밟아 부수면서 분한 듯이 “에이, 저것들 하는 짓거리를 보니 우리 작은 어머니 상식 얻어 잡수시기는 다 틀렸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친척들이 당숙 아저씨를 위로하는 소리도 들렸다. “저 집이 예수 믿는 애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예수 믿는 사람들 하는 방식을 따라 하겠지. 어떻게 하든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야 자네도 이제 그만두세” 하고 말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실로 예견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벌어진 영적 전투였다. 화가 난 친척들은 삼오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연락해서 목사님을 모시고 삼오날에 할머니의 무덤에 찾아가서 몇몇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비록 할머니의 장례 절차는 손녀인 나보다는 더 가까운 할머니의 아들인 우리 아버지와 할머니의 딸인 고모들에 의해서 유교식으로 치러졌지만 삼오날은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승리인 것이다. 하지만 무덤 앞에서 벌어진 영적 전투의 진정한 유익함은 따로 있었는데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어머니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상청에 조석으로 상식을 차리지 않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셨다. 만약에 혼백상자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장례 끝나고 돌아와서 상청을 설치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꼼짝없이 그곳에 아침, 저녁밥을 지어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이 영적으로 어머니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깨닫고 보니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격렬한 영적 전투가 벌어질 것을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서 나에게 기도로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당시 안 믿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의차 안에서 소리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민망하게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 대놓고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하나님은 무덤 앞에서 벌어질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주시기 위해 나와 함께하시며 돕고 계셨던 것이었다. 오늘 내가 특별히 이 영적 전투에 대해서 회고해 보게 된 것은 지금도 영적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이 땅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와 억압, 신앙과 불신앙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서 강력한 기도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사진 | 미주뉴스엔조이 나은혜 |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문학 석사, 미국 그레이스신학교 선교학 박사, 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지구촌 은혜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