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번 호 특집은 지난 2019년 10월에 중앙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열린 천산포럼에서 발제한 글들을 소개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모든 글들을 한 편 한 편 모두 다룰 수 없기에 아쉬움도 남습니다. 귀한 글을 웹진 <중국을주께로>에 실을 수 있게 허락해주신 필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께는 천산지역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계획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Ⅰ. 서론
금번에 중앙아시아 A국에서 중국 사역자들이 함께 모여 선교중국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나누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천산을 사이에 둔 중국 신장(新疆)지역과 중앙아시아1)가 실크로드를 따라 문화와 종교 그리고 문물을 교류했었다면 이제는 선교를 위한 교류 협력을 기대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이 지역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신장지역과 중앙아시아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사회주의 초강대국들의 지배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상당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장은 1884년 11월 18일 공식적으로 중국(청나라) 영토에 편입되었다.2)
중국 정부의 끈질긴 중국화정책 강화와 탄압 속에서도 신장은 회족(回族)처럼 중국화하기보다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신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문화와 지리이다. 카슈가르(Kashga)지역은 중국 문화의 영향력보다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안디잔(Andizhan)이나 코칸트(Kokand)에서 접근하기가 훨씬 쉬웠다.3) 또한 신장지역의 이슬람 사회는 인종적·종교적·정치적인 다양한 차이와 갈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투르크어와 이슬람이다.4) 중앙아시아 민족들은 인종적·언어적 측면에서 투르크계에 속하며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5) 이에 필자는 신장과 중앙아시아의 공통분모인 투르크인들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전래 역사와 부흥과 특징, 독립 뒤 중앙아시아지역의 이슬람 부흥의 양상을 서술하고 선교적 방안을 모색하는 순서로 천산지역의 이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Ⅱ. 본론
1. 이슬람 전파 천산지역 투르크인들에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중반 아랍 이슬람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매우 오랜 시간을 통해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651년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우마이야왕조의 이슬람군대는 투르크족의 경계선으로 인정받고 있던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사산조 페르시아로 들어가 705년 트란스옥시아나(Transoxania)6)를 점령했다. 이때 우즈베크인들과 타지크인들이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9세기경에 이미 부하라(Bukhara)는 이슬람권의 학술·문화적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부하라, 사마르칸트, 히바(Khiva)를 비롯해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 있는 마드라사와 모스크들이 이후 약 1200년간 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와 사회적 정체성을 이루는 데 깊은 영향을 끼쳤다.7) 그렇지만 유목민이었던 키르기스인들과 카자흐인들은 18세기 무렵까지도 아직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세기 무렵에야 겨우 이슬람 이전의 민간신앙들이 이슬람화가 되었다.8) 신장지역의 이슬람 전래는 960년경 사만조(875-999년)의 전 왕자가 신장의 카슈가르로 망명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때 신장지역 동 카라한왕조의 카칸은 왕자를 관리로 임명하였고 그의 영향과 설교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9) 이슬람이 중앙아시아로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투르크 토착민들은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고 싶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부족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거부하였다. 역사학자 아부 바크르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 알-나르샤히(Abu Bakr Muhammad Ibn Zafar Al-Narshahi, A.D 899-959)는 《부하라의 역사(Description of Bukhara)》에서 부하라의 주민들을 이슬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매번 주민들은 집권층의 강압적 강요를 거부하고 토착신앙으로 회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시키기 위해서는 회유와 강압적인 정책의 제도화가 동시에 수반되어야 했다. 우선 이슬람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개별 인두세인 ‘지즈야’를 납부하게 했다. 군사령관인 쿠타이바 이븐-무슬림(Qutayba Ibn Muslim) 장군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정복한 뒤 피정복지 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사회개혁과 군사개혁을 하였을 뿐 아니라 부하라에 이슬람 사원을 짓고, 금요일 이슬람 사원 모스크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의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인하여 지역 토착민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0)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이슬람화가 추진되고 가속화하였던 것은 탈라스전투에서 당나라가 압바스왕조에게 패배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압바스왕조는 개종한 투르크족에 대해서 인두세를 완전히 폐지하였고 요직에도 기용하기 시작하였고, 이슬람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적극적인 포교 사업에 들어갔다. 9세기 후반부터는 압바스왕조와 투르크족 국가들 간에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교역의 결과로 이슬람 전파가 더욱 활발해졌고 이슬람 개종 열풍이 일었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족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는 카라한왕조(Karakhanid, 840-1212)이다. 카라한왕조의 사투크왕(Sultan Satuq Bughra Khan)은 893년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투르크 국가들은 급속도로 이슬람화가 된다.11)
2. 부흥의 원인 투르크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성행한 이슬람 사조는 이슬람 신비주의로 알려진 수피즘(Sufism)12)이었다. 수피즘은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 사이에서의 이슬람 전파는 주로 수피 전도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체의 허례허식과 관념적 사치를 부정하고 신비주의 춤인 사마(sama)13)와 지크르(Dhikr)14)를 동원하여 몰아적 명상을 통하여 인간과 신의 일체감을 추구했다. 수피 전도자들은 처음부터 모스크를 짓거나 다수의 성직자들을 양성하지 않았다. 이들 수피 종단의 선교 방식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영적·사회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초창기부터 다수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위해 청빈한 삶을 유지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호했고, 둘째, 이것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원하는 소박한 대중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셋째, 지나치게 교리적인 이슬람보다는 수피즘의 보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내용들이 스텝(steppe)의 유목민인 투르크족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융통성 있고 자유로운 해석을 하는 수피즘이 더욱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넷째, 수피들이 사용하는 음악, 시, 주문, 춤 등이 정통 이슬람에서는 이단시되지만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을 끌었다.15) 이 같은 신비주의 수피즘은 정통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신앙의 내용이나 형태에 있어서 상당히 융통성을 보였다. 그런 수피들이 투르크인들의 전통적 토착신앙과 자신들의 신비주의 이슬람을 접목하여 열정적으로 이슬람 포교활동을 했고 그 결과 이슬람은 투르크인들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슬람이 투르크 부족들 사이에 신비적인 형태로 전파된 것은 이슬람이 신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수피즘의 신비주의가 투르크인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무속적 토착신앙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6) 이슬람을 수용하기 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부족들이 지니고 있었던 전통신앙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자연숭배, 조상숭배, 샤머니즘과 함께 이란에서 전파된 조로아스터교와 동쪽에서 전파된 불교 등과 같이 신비적인 성격이 강한 것들이었다. 투르크인들의 이러한 신비주의적 종교 성향이 이슬람 수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이슬람 해석과 실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17) 수피들의 선교방식이 투르크인들에게 이슬람을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교리나 코란(Koran)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기게 함으로 미신적이고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갖게 하였다.

3. 수피 종단들 중앙아시아는 야사위(Yasawi), 낙쉬반드(Naqshbandi) 등과 같은 중요한 수피 종단이 발생한 지역이다. 1) 야사위 종단 야사위 종단은 12세기 남부 카자흐스탄에서 호자 하오멧 야사위(Khoja Ahmad Yasawi, 1166년 사망)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그는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수용과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종교적 영감을 알라(Allah)의 징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한 율법 주의적 묵상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매력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강조하는 멜라메티예학파의 수피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또한 수피즘을 투르크인들의 전통과 신앙, 삶의 방식과 혼합하여 투르크인들이 쉽게 이슬람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직 투르크어로만 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야사위 종단은 ‘투르크 민족 공동체’적인 성격을 띤 종단이었고 이 종단의 의식은 주로 투르크인들의 문화와 종교적인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다. 야사위 추종자들은 세상의 쾌락이나 오락을 금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고, 정치나 세상의 권력에서 떠나 신에 대한 더 깊은 헌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소리내는 디크르(Dhikr)를 고수했다.
2) 낙쉬반드 종단 낙쉬반드 종단은 쉐이크 바하 알딘 낙쉬반드(Shaykh Baha al-Din Naqshband, 1389년 사망)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무덤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이 종단은 조용한 디크르를 고수하고 있는데 알라의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깊은 영적인 집중과 더불어 조용하게 읊조린다. 낙쉬반드 종단의 핵심적 교리는 샤리아에 대한 엄격한 준수와 절제와 헌신을 요구하며, 음악과 춤을 멀리하면서 일상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민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가장 유명한 계율은 ‘제도 안의 은둔’으로 사회를 떠나거나 사회로부터 격리됨이 없이 마음으로 신을 찾는 ‘군중 속의 경건’을 유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리고 구도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상업, 제조업, 농업에 열심히 종사하면서 마음속으로 신을 계속적으로 묵상할 수 있게 했다.18) 낙쉬반드 종단의 분파들은 민간신앙의 모습들을 제거하지 않은 채 신장 각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정치적·군사적 영향력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산파(Ishan)라고도 하는 낙쉬반드 종단의 영향은 신장 이슬람에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19)
4. 이슬람의 특징 천산지역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혼합주의20)일 것이다. 종교적 혼합주의가 가능했던 요인을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수피즘의 신비주의적 특성과 토착지역 문화의 조화를 들 수 있다. 수피주의 이슬람은 기존 토착신앙인 텡그리즘이나 조로아스터교, 샤머니즘 등을 모두 수용하고 포괄하여 비아랍인인 투르크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융화시켰는데 이런 측면이야말로 결정적으로 투르크인들에게 이슬람이 확산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다. 수피즘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는 성인들의 영묘숭배인데 이 영묘 숭배는 투르크인들의 전통인 성인숭배, 조상숭배 전통과 그 맥이 닿아 있다. 투르크인들은 조상들이 누구인지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천신사상은 조상숭배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성인들의 영묘로는 부하라의 낙쉬반드 영묘, 사마르칸트의 호자 아흐라르 영묘, 타지키스탄 두샨베(Dushanbe)의 마울라나 차르히 영묘, 카자흐스탄 투르게스탄에 있는 야사위 영묘가 있다. 투르크인들의 개인적인 삶에 매우 깊숙하게 침투해 있는 한 인간의 통과의례에 해당하는 출생, 결혼식, 장례 등 관혼상제에 관계된 모든 의례는 수피교단의 ‘물라(mullah)’들이 주관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피 법학파의 교리적 포용력과 유연성이라고 들 수 있겠다. 아부 하니파(Abu Hanifa)에게서 시작된 하나피파는 압바스왕조가 지원하고 후원하였기 때문에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광범위하게 세력을 확산할 수 있었다. 하나피 법학파는 교리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적용되는 범위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해석이 유연하고 엄격하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피 법학파는 현지 전통에 가장 순응적이며 관용적인 법학파였으며, 투르크의 기존 관습들을 이슬람의 법규에 모순되지 않게 성공적으로 가공하고 이슬람 이전의 고대로부터의 전통과 일반적 법규들을 법제화하였다. 그들은 투르크인들의 텡그리즘(Tengrism)을 이슬람 유일신사상으로 해석하여 교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텡(Theng)’은 ‘하늘’을 뜻하는 것으로 ‘텡그리’인 하늘신은 ‘우주의 근원’이며, ‘천지창조의 주인인 ‘천신(天神)’을 의미한다. 천신, 하늘신이 ‘알라’ 혹은 ‘하나님’과 같다고 해석하여 대체되는 개념을 만들어 냄으로 투르크인들이 쉽게 이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아직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알라를 고대 투르크어인 ‘텡그리’ 혹은 ‘후도’, ‘쿠다이’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5. 이슬람의 분류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세 가지 형태의 이슬람이 공존하고 있다.
1) 공식 이슬람21) 독립 직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비에트 시대의 무신론을 폐기하고 이슬람을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의 표지로써 받아들였다. 중앙아시아 통치자들은 이슬람의 가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독립 후 초기 대통령들은 취임식에서 코란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으며, 국기의 문양에 이슬람적인 상징을 도입하기도 했다.22)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타지키스탄 내전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 세력의 부상을 계기로 급속히 가라앉게 된다. 그로 인하여 이슬람은 국가에 의하여 엄격히 통제를 받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각국은 제도적 차원에서 이슬람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종교활동을 규제하는 법들을 만들었으며23), 국가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지원하는 공식적인 종교 기관으로서 ‘무슬림종무청(ДУМ:Духо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Мусулман)’을 설치·운영하고 있다.24) 원래 무슬림종무청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비에트 정권과 이슬람 세력의 원활한 소통과 협조를 위해 세워졌는데 사실상 무슬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기구였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투르크인들의 역사에서 국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종교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대셀축제국 시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25) 무슬림종무청은 소비에트 시대에 이슬람의 존속과 독립 이후 이슬람의 부흥을 위하여 나름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 일반 무슬림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었고26), 공식적 종교기관에 기대되는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의 모색을 위한 사회적 구심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식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역사에서 여전히 형식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고, 오히려 통치 세력의 정치적 요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온 비공식 이슬람27)이야말로 실제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2) 민속 이슬람28) 민속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주류인 순니 하나피(Sunni Hanafi)와 수피즘(Sufism)이 지역의 고유한 토착신앙과 전통문화와 오랫동안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형성된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독특한 형태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중앙아시는 이슬람이 전해지기 전까지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하여 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토착 샤머니즘이 번성하였고, 페르시아 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래 초기부터 종교라기보다는 문화로서 받아들여졌던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의 고대 토착 민간신앙, 특히 샤머니즘 전통과 서로 결합되면서 ‘혼합 이슬람’29)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민속 이슬람은 소비에트 시대에도 공식 이슬람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무슬림 대중들의 종교적 의식과 관습에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하며 그들에게 종교적인 위안과 가르침을 제공했다. 민속 이슬람은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순응주의, 금욕주의적 수동성으로 인해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비판세력이 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순응주의 금욕주의는 직접적인 박해와 탄압으로부터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이것은 독립 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붐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30) 민속 이슬람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속 이슬람은 금욕적·신비주의적 체험에 기초하는 수피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개인적인 경건주의와 함께 환상적·주술적 경험이 강조된다. 그 결과 성묘참배와 성인숭배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체제에 대항해 순교한 수피 지도자들의 무덤은 무슬림들의 경배와 순례의 대상으로 성지화가 되어 있다. 사회 지배층에서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길에 동참하며 그곳에서 이맘(imām)의 기도를 받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인숭배와 함께 민속 이슬람에서 많이 나타나는 토속적인 요소로는 돌, 샘, 나무, 동굴 등 자연물을 신성한 대상으로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관행이다. 이슬람이 전파된 뒤에도 애니미즘적 숭배 관행은 우상숭배로서 배척된 것이 아니라 신비한 자연현상과 더불어 자연의 영(靈)을 통하여 알라를 숭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키르기스스탄의 오쉬(osh)에 있는 솔로몬산은 무슬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 중의 하나이다. 그곳에 있는 동굴, 샘, 나무들은 각종 질병과 불임을 치유해 주는 성지(mazar)31)로도 유명하다. 또한 민속 이슬람은 샤머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투르크의 전통 문화에 속하는 다양한 풍속과 관례가 접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출생, 결혼, 장례 풍습, 할례, 전통음식, 가족중심주의, 융숭한 손님 접대, 윗사람에 대한 존경 등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이슬람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지만 무슬림들이 기리는 전통도 이슬람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나브루즈(Navruz)축제32)가 그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민속 이슬람은 말 그대로 생활 속의 이슬람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수의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특별한 종교적 지식이나 이해 없이도, 심지어 그것의 기본적인 의례에 대한 준수 없이도 자신을 쉽사리 무슬림으로 여기고, 이슬람을 자신들의 삶의 뿌리로 간주한다. 이러한 면이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부흥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3) 저항 이슬람33)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에 불어 닥친 이슬람 부흥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저항 이슬람의 출현과 전개이다. 저항 이슬람은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식 이슬람과 민속 이슬람과는 달리 전환기에 새롭게 등장한 시대적 현상이었다. 저항 이슬람은 이슬람 부흥을 이끈 다양한 내외적 요인들 즉 대중 의식의 이념적 공백 상태, 해외로부터의 급진적 이슬람사상과 세력의 유입,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 통치, 정부의 무능과 부패, 경제적 상황의 악화 등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하여 낳은 역사적 산물이다.34)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태동한 저항 이슬람이 권력으로부터 탄압받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다.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들이 내세우는 세속정권의 전복과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의 비현실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활동 중인 대표적인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들인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IMU), 이슬람해방당(HTI), 타지키스탄 이슬람부흥당(IRPT)35) 등은 공통적으로 샤리아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주창하고 있지만, 샤리아 자체가 코드화한 경전이 아닐뿐더러 이슬람 신정국가의 모델도 불분명하다. 생활 속의 현실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갈구하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대중들에게 이러한 이상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둘째는 지배정권의 무차별적 탄압이다. 세속정권의 전복이라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위협은 중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들에게 이들을 비롯한 야당과 인권단체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일체의 억압과 통제의 빌미를 제공한다.36)
셋째는 이슬람의 정치세력화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전통에 매우 낯선 것이다.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주류인 하나피파는 세속 권력을 존중하고 정치 개입에 부정적이며, 고유한 금욕주의와 관용성을 지닌 수피즘은 이슬람주의의 적극적 개혁과 저항에 이질적이다. 이러한 신앙관에 익숙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주의의 원칙성과 엄격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넷째는 정치적·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슬람주의는 중앙아시아인들에게 이질감이 강하다.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적 총체로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토대는 생활 속의 민속 이슬람이며 그것이 무슬림적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다.37)
마지막으로 과격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저지른 일련의 폭력 행위와 불법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정부와 일반 무슬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타지키스탄 내전(1992-1997), 타슈켄트 폭탄테러(1999), 바트켄지역 인질사건(1999), 미국인 납치사건(2000), 우즈베키스탄 검찰청과 이스라엘과 미국 대사관 폭탄 공격(2004), 안디잔 사건(2005) 등은 잔인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무슬림 대중들에게 부정적 인상을 남겼고, 활동자금 마련을 위한 마약 밀매와 불법 무기 거래와 같은 조직적인 범죄에 연루된 것은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렸다.38)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저항 이슬람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으나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내외적 요인들 특히 경제적인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저항 이슬람의 확대 재생산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6. 독립 이후 이슬람 현황 독립 이후 이슬람의 부흥은 내외부적으로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사회·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할 대안이자 통합의 도구이고, 정치적 차원에서는 민족·국가 형성에 필수적인 권력의 정통성과 대중의 지지력을 확보하는 수단이며, 경제적 차원에서는 취약한 구조와 심각한 사정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문화적 차원에서는 민족 문화의 뿌리이자 도덕적 가치의 중심이며, 국제정치적 차원에서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위한 공통의 기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슬람 사원39)과 교육기관의 복원과 신축40), 종교활동과 조직 결성의 합법화, 종교적 축일의 기념과 공휴일 지정 등 제도적 차원에서 이슬람 부흥을 지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 중의 하나인 금요 기도회에 참여하는 무슬림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메카로의 성지순례 규모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1992년에는 40명, 1993년에는 300명이 다녀왔다.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599명, 1993년 1000명이 다녀왔으며, 우즈베키스탄은 1990년 500명에서 2005년에는 5,000여 명이 메카를 방문하였다. 중국 정부는 신장지역 무슬림들을 위해 강온양면정책을 구사하였다.41)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복장의 경우 도시지역 남성들은 대체로 서구 스타일을 따르고, 여성들도 베일을 착용하지 않지만,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농촌지역에서는 이슬람 전통양식의 복장을 여전히 준수하고 있고, 비슈케트에서도 부르카를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들의 모습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42)

7. 복음전파의 돌파구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근거로 기독교 선교의 돌파 방안을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선교지에 대한 전략적 분석과 이해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선교의 위임명령을 완성하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의 민족·역사·지역·정치·지형을 지혜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투르크 이슬람의 특징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꼽을 수 있는데 중동 이슬람과는 달리 정치가 종교를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 나라마다 종교법을 두고 있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종교법 개정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거대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기독교 선교도 이러한 법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정치 상황과 법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선교전략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복음전도 시 개인 간증을 사용하라. 민속 이슬람에서는 율법을 준수하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건조하게 여기며, 초월적이고 신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객관적 진리,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종교적 교리보다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을 중시한다. 삶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귀를 열게 하며, 간증은 마음을 열 뿐 아니라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셋째,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고 전해야 한다.43) 지금까지 만나본 중앙아시아 무슬림 가운데 죽은 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병과 죽음, 인생의 문제 앞에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그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죄 사함의 복과 모든 저주와 두려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담대히 전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 코란을 근거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전하게 만들어진 Any3 전도법은 무슬림들에 복음을 전하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담대히 전해야 한다. 키르기스스탄의 정신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의 100%는 정신 심리치료를 받기 이전에 이미 민속 치료사들을 만난 이후에 정신과 병원을 찾는다고 한다.44) 민속 무슬림들은 영들, 마귀들, 흉안의 저주, 마술 등에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함마드(Muhammad)보다 마술에 더 몰두한다. 그래서 부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 Bill Musk는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이런 지적을 한 적이 있다. “능력 있는 사역자들이 없기에 능력 대결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4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19)고 명령하셨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마다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난다. 중앙아시아의 7200만 명과 신장의 1000만 명의 무슬림들이 여전히 복음에 소외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신비주의 수피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투르크 무슬림들은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기 위해 매일, 매주 금요일 사원을 찾으며 라마단 금식을 하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신령한 마자르를 찾아다닌다. 그들이 진리에 목말라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타리카트)을 찾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미 경험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무슬림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을 대하는 말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변화된 삶의 모습은 또 다른 무슬림들에게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46)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강조와 신자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친밀한 관계였다.47) Ⅲ. 맺는말
천산지역은 지금도 세계 강대국들의 전략적인 핵심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러시아는 소연방(蘇聯邦) 해체 이후 경제 공동체를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중국은 일대일로의 중요한 교두보로 중앙아시아를 활용하기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은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방대한 부존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북반부와 남반부, 기독교와 이슬람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의 정치와 종교적인 변화로 인해 중국사역자들이 선교중국 차원에서 중앙아시아지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된 것 같아 감사하다. 이번 포럼이 천산지역의 투르크 이슬람을 깊이 이해하며 중국 내의 신장지역과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 대한 전략적인 협력 선교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미주 1) ‘중앙아시아’는 협의의 의미로 대체로 구소련에서 독립한 CIS 5개국(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의미한다. 광의의 의미로는 중앙아시아에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인 알타이 공화국, 몽골, 아프가니스탄,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 티베트자치구,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을 포함하며 경우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같이 중앙아시아 지역 범위 설정에 차이가 나는 것은 주로 문화적·역사적·민족 분포에 따라 분류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2) 황병하. 신장의 이슬람 역사와 중국의 대 이슬람 정책. 110. 3) Ibid. 114. 4) Ibid. 114ff. 5) 중앙아시아 5개국 가운데 비록 타지크인들은 페르시아계에 속하지만 그들 모두는 유라시아 중앙 대륙에 함께 이웃하며 살면서, 오랜 기간 동안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나누어 왔고, 무엇보다 이슬람이라는 연대의 끈을 간직해 왔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인들에게서 무슬림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은 민족적 정체성에 훨신 앞서고 우위에 있다.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P.13. 6) 트란스옥시아나는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대부분 그리고 카자흐스탄 남서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주로 8세기 전후의 이 지역을 지칭할 때 쓰이는 표현이.(위키백과 참조). 7) Jeremy Gunn, T,, "Shaping an Islamic Identity: Religion, Islamism, and the State in Central Asia." Sociology of Religion, 64 no 3 Fall 2003, p.390. (오요셉 재인용,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을 위한 전략적 탐구.p.41). 8) O.Roy, New Central Asia:The Creation of Nations, p.143f (오요셉 재인용, Ibid,p.41f) 카자크 민족과 키르기즈 민족의 이슬람으로의 개종 시기에 대해 15세기와 16-17세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오은경, 중앙아시아 이슬람과 종교적 신크레티즘. p.7.) 9) 황병하, p.110. 10) 최영길, 이슬람 문화사,p.90-92 (오은경 재인용, p.7.) 11) 오은경, 중앙아시아 이슬람과 종교적 신크레티즘. p.7. 12) 이슬람에서는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이라고 부른다. 아랍어에서 유래한 이 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수피즘이 아랍어 양털을 뜻하는 ‘수프(suf)’에서 유래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터키 이슬람 신학자 이브라힘 추북추(Ibrahim Chubukchu)는 신비주의가 수피즘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랍인들이 양털 옷을 입은 사람들(sufi)을 신비주의자(tasavvafa)로 불렀는데, 그들은 알라의 길을 추구하는 금욕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성운, 형제의 나라 터키 이슬람 들여다보기, p.88) 13) 세마는 음악을 듣는 것으로, 연주된 음악이 아니라 일종의 음성적인 환각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생각을 집중시켜 어떤 감정적인 단계로 인도하는 수피즘의 영적 체험방식이다. 14) 디크르는 코란 2장 152절 “신을 자주 기억하라(dhikr Allah)”에서 기인했다. 아랍어 ‘dhakara'는 ‘암기하다’ 또는 ‘기억하다’의 의미이다. 수피들은 알라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방법으로 디크르 방식을 채택하였다. 디크르는 종종 지크로(zikr)로 불리기도 하며 문자적으로 기억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도나 묵상의 수단으로 조용히 혹은 큰 소리로 알라의 이름을 부르거나 코란의 구절을 읊조리는 것을 가리킨다. 디크르의 종류는 암송(디크르 알 카피)와 낭송(디크르 알 자흐리)로 구분된다. 정통 이슬람이나 개별적 의식에서는 암송의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시아파나 집단적 의식에서는 낭송의 방식을 선호한다. 일부 종단은 춤과 음악과 음주와 함께 과격한 행동을 병행하는 디크를 행하기도 한다. 황병하, “이슬람의 수피즘과 영성”, p.98 참조. 15) 오선택,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을 위한 전략적 탐구, p.42f. 16) 김성운,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 p.8. 17) Ibid. 18) 오선택, 중앙아시아 수피즘 운동과 선교적 교훈, p.99. 19) 김충환, 신장위구르 무슬림 신앙 속에 나타나는 민간신앙 요소 연구, p.40. 20) 종교혼합주의는 원래 상이한 두 종교가 융합하여 새로운 종교가 창시되는 것으로 쓰였다. 예를 들면 기독교와 조로아스트교, 그리고 불교의 여러 요소가 혼합하여 마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였고, 이슬람과 힌두교가 결합하여 시크교가 만들어진 것이 그 사례이다. 투르크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템, 텡그리즘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민속 이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1) 공식 이슬람은 국가주의 이슬람이라고도 불려진다. 공식 이슬람은 국가의 이념 혹은 정치권력이 종교를 우선한다. 공식 이슬람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국가 없이는 이슬람도 없다는 공식을 세워 국가가 합법적으로 이슬람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통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가 종교를 통제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던 사람이나 단체들도 일단 정권을 잡게 되면 이슬람을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다. 김성운,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31. 22)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초승달을 사용하고 있으며, 타지키스탄 국기의 녹색은 이슬람 신앙을 의미하고 있다. 위키백과 중앙아시아 국기 참조. 23) 카자흐스탄(1995), 우즈베키스탄(1992), 투르크메니스탄(1992), 키르기스스탄(1996), 타지키스탄(1994) 은 각각 종교 관련 법을 재정하였고, 종교활동에 관한 하위 법으로 카자흐스탄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1997), 우즈베키스탄의 <신앙의 자유와 종교조직에 관한 법>(1998), 키르기스스탄의 <종파의 자유와 종교조직에 관한 법>(1991) 투르크메니스탄의 <양심의 자유와 종교조직에 관한 법>(1998)이 제정되었다. 우덕찬(2000), 159.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5.재인용. 24) 각국의 무슬림종무청 설립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즈베키스탄(1993), 카자흐스탄(1990), 키르기스스탄(1993), 타지키스탄(1996), 투르크메니스탄(1996). 25) 대셀축제국(1040-1157)은 11세기 초반 우즈베키스탄지역에 거주하던 오우즈족이 이슬람을 수용하고 호라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투르크 국가이다. 대셀축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반도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셀축제국은 정치, 문화, 사회적 관점에서 이슬람 세계에 하나의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다. 김성운,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 p. 31. 26) 독립 이후에도 소비에트 시대와 마찬가지로 집권 세력의 입장과 방침을 추종하고 그것에 의해 관리되는 국가의 하부 통치 기관으로 자리 매김하였기 때문이다. I islamov(2006), 275,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p. 7. 재인용. 27) 공식 이슬람에 병행하는 비공식 이슬람의 커다란 두 조류는 ‘민속 이슬람’과 ‘원리주의 이슬람’이다. 이들은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부흥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28) 전 세계 무슬림들 중 4분의 3이 민속 이슬람이다. 키스 스와틀리, 인카운터 이슬람, 예수전도단, 2008, p. 241. 29) 이슬람의 혼합주의에 관한 내용은 오은경 박사의 ‘중앙아시아 이슬람과 종교적 신크레티즘’,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27-1집을 참조. 30)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p. 7. 31) 무슬림들이 마자르(mazar)를 찾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나브루즈(NAVRUZ), 노동절 혹은 독립 기념일등 공휴일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들 중에 하나가 마자르인데 이곳은 방문하기 좋은 곳이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영적으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무슬림 관습 중에 하나로서 선지자들을 기억하고 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서이며, 넷째는 출산, 질병 치유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방문한다. 홍성빈, 키르기스스탄 마자르 숭배에 나타난 민속 이슬람 신앙에 대한 소고, p. 7f. 32)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신년맞이축제로서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을 알리며 매년 3월 21일에 진행된다. 33) 중앙아시아의 저항 이슬람은 형태와 성격에 따라 이슬람주의, 정치적 이슬람, 근본주의(원리주의), 극단주의, 광신주의, 이슬람 테러리즘, 와합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칭해진다. 대표적인 원리주의 이슬람 세력으로는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 해방당, 타지키스탄 이슬람부흥당, 이슬람과 민주주의, 인민전선, 아돌라트, 헤즈볼라, 타브바, 알라쉬 민족독립당 등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최한우,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의 현상과 과제, p. 174-199 참조. 34) 오원교, 중앙아시아의 민족적, 지역적 소통과 상생의 토대로서 생활 이슬람, p. 181. 35) 타지키스탄의 이슬람 부흥당은 1990년대 내전이후 정권 참여가 공식적으로 보장되었던 것이 2016년 5월 개헌을 통해 부흥당의 합법적인 제도권 정치참여와 활동이 헌법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김상철 손영훈, 현대 중앙아시아 정착지대 이슬람에 대한 문명사적 접근: 타지키스탄을 중심으로, p. 67 참고. 36) 저항 이슬람에 대한 중앙아시아 각국의 강압 정책에 관해서는 손영훈, 중앙아시아 국가의 강압 정책과 이슬람 저항 운동 연구, 중동연구, 제26권, 2호, 20-990342 참고. 37)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만, p. 10. 38) 현승수, 중앙아시아 해방당의 활동 양상과 담론의 유형 분석, 슬라브학보, 제22권 3호, p. 223-250. 39) 정치 지도자들의 이슬람 지원은 정부에 등록된 모스크 수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64.1.1.일 우즈베키스탄 67개, 카자흐스탄 25개, 키르기스스탄 33개, 타지키스탄 18개, 투르크메니스탄 4개 였으나, 2007년 우즈베키스탄 2,052개, 카자흐스탄 2,128개, 키르기스스탄 1,668개, 타지키스탄 2,842개, 투르크메니스탄 110개 등 등록된 모스크 수는 나라별로 큰 변화를 보인다. 슬라브학보 제34권 1호(2019) p. 156 및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p.2 참조 40) 1995년 통계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는 대략 380개의 마드라사가 운영 중에 있고, 대표적인 마드라사인 바락 칸(Barak khan)과 미르 아랍(Mir Arab)의 학생 수는 3배 이상 증가했다. 1999년 4월에는 ‘타슈켄트이슬람대학’이 설립되었고, 우즈베키스탄 전역의 이슬람 교육 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는 대략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 되었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두샨베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고등신학원이 문을 열었고, 대략 1,700여 명의 학생들이 이슬람 교육을 받고 있다고 전해진다. 카자흐스탄에는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드라사가 1991년 개교하였고, 모스크, 대학, 도서관, 기숙사를 갖춘 이슬람 센터가 건립되었다. 1991년 10월 키르기스스탄에도 첫 번째 마드라사가 문을 열었는데, 후에 하자라테 우마르이스람신학원(Hazarate Umar Islamic Institute)으로 개칭된 이 학교는 비슈케크와 보스토치니 두 곳에 갬퍼스를 가지고 있는데, 총 760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키르기스스탄에만 총 2,085개의 이슬람 종교시설이 등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762개- 모스크 1,639개, 마드라사 45개, 기타시설(재단, 연구소, 센터) 78개 - 는 키르기스스탄 무슬림종무청에 소속되어 있다. 오원교, 중앙아시아 이슬람 부흥의 양상과 전망, p.2. 41) 중국 당국이 신장위구르지역 주민들에게 취한 대표적인 온건정책은 1985-1989년까지 모스크의 건설을 허용한 것과 위루르족 출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메카로의 순례를 허용하였으며, 경제개발정책 추진과 언어정책 등이었다. 언어정책은 TV와 라디오 방송에서 위구르어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였으며, 정부 기관이나 민간단체 간판 포스터에 위구르어를 중국어보다 먼저 적었다. 황병하, p. 132 참조. 42) 타지키스탄의 경우 이슬람과 관련하여 주변 국가들과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2005년 10월 타지키스탄 교육부는 일반학교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을 포함한 여타 종교적인 표식 노출 행위는 헌법과 신교육법에 위배됨을 밝혔으며 관련된 규제로는 여성들의 모스크 출입 금지,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교육의 국가 통제, 모스크의 금요 기도회에 18세 이하 참석 금지 등이 있으며, 타지키스탄 정부는 모스크들에 대한 폐쇄조치와 외국 종교단체들에 의한 교육을 금지했는데 2011년초부터 1,500여 개의 모스크들이 폐쇄되었으며, 어린이에 대한 히잡 착용 금지, 기도에서 고성능 확성기 사용금지, 이맘과 해외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모니터링, 이슬람 사원에서의 설교 시간 15분 제한과 설교 내용에 대한 정부의 승인 조치, 종교법에 의한 결혼식에서 이맘의 설교 제한 등의 조치들도 취하였다. 김영철 손영훈, 현대 중앙아시아 정착지대 이슬람에 대한 문명사적 접근, p. 71 참조. 43) 능력 대결의 종류들과 치유를 위한 기도에 대해 '씨앗에서 열매로'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J. 더들리 우드베리 엮음, 씨앗에서 열매로. p. 370-376. 44) Elena Molchanova. Folk Healing, spirituality and offical mental health sphere in Kyrgyzstan, p. 81, 홍성빈, 키르기즈스탄 마자르(Mazar) 숭배에 나타난 민속 이슬람 신앙에 대한 소고, p. 18 재인용. 45) Bill A. Musk, The unbeen face of Islam: sharing the gospel with ordinary Muslims ay street level, Monarch, 2003, p. 228, 홍성빈, p. 17 재인용. 46) J. 더들리 우드베리, p. 200. 47) 김성운,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 p.79.
※참고문헌은 저자와 합의하여 생략하였습니다.
황새벽 |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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