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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Goa)에서 마카오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인도 고아항으로 오는 반년에 걸친 긴 항해로 몸이 아주 쇠약해져서 고아수도원에서 수개월 동안 요양한 뒤에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그가 인도에 도착한 1578년 9월 13일 이후 마카오를 향해 떠나는 1582년 4월 15일까지 인도에 체류한 4년 동안의 주요 활동은 대략 다음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고아, 코친(Cocin) 등 수도원에서 인문학과 교사를 맡았다가 후에 명을 받아 신학과정을 계속 공부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고아에서 1년 남짓 인문학을 강의했고 코친으로 옮겨 교사로 4∼5개월 일하면서 병약한 몸을 추스렸다. 그는 1580년 7월 26일 코친에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고, 같은 해 말 고아로 다시 옮겨 로마에서 못 다 이룬 신학과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근 명령을 받게 되어 신학과정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인도를 떠나 마카오로 옮기게 되었다.
둘째, 마테오 리치는 신학공부 외에도 역사, 지리학, 시계, 기계, 인쇄 공예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며 실력을 연마하였다. 그는 마페이(馬菲伊, P. Maffee)의 《포르투갈 령 인도사(印度史)》 편찬작업을 위해 인도 현지에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보내는 지원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는 또한 일식(日食) 상황을 조사 정리한 인도지역 지도와 기타 문헌 자료도 전달하였고, 보조 선교사들의 실습공장에서 시계, 기계, 또는 인쇄기술 등을 배우고 익혔다. 후일 그는 시계를 활용하여 중국 사대부나 황실과 교류하게 되었고, 이것이 마침내 북경(北京)에 정주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가 고아에서 익힌 인쇄기술 역시 중국에 들어온 이후 종교 저작물 번역 또는 저작 출간을 하는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다.
셋째, 마테오 리치가 고아지역의 수도원 내 인도인 제자들이 불공평한 처우를 받고 멸시와 탄압을 당하고 있는 데 대해 분노와 동정을 표하면서, 편애를 금하여 오던 수도원의 원칙에도 분명 어긋나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인간 자체의 존엄성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주목하는 인문주의적 소양이 충실함을 보여 주는 일면임과 동시에, 중국선교의 전개과정에서도 인간 자체를 중시하는 자세와 인간 자체에 필요한 요소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실천의 자세를 갖추게 했다.
마카오에서의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에게 마카오로 가서 루지에리를 도우라고 하는 예수회 성회장 발리냐노의 명령이 1582년 3∼4월간 일본에서 고아로 도착하였다. 루지에리가 마테오 리치를 마카오로 파견되도록 발리냐노에게 요청한 것은 마테오 리치가 수학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그의 재능을 중국선교를 위해 활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마테오 리치가 인도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형편도 고려되었다. 그는 아직 수학 중이던 신학과정을 중단하고 4월 15일 고아를 떠나 말래카를 경유하여 8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긴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중병을 앓았다. 하지만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곧 건강을 회복하면서 우선 중국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는 중국어가 그리스와 독일어에 비해 어려워서 안타까워 하기는 했지만 중국어 발음, 문법, 쓰기의 기본 체계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의 중국어 공부에는 그동안 루지에리가 잘 훈련한 통역인 몇 명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마네오 리치는 일 년 정도 마카오에 머물면서 중국어 학습 외에 성 마틴 경언학교(聖馬丁經言學校)의 관리도 맡았다. 이 학교는 루지에리가 발리냐노의 승인을 얻어 마카오의 예수회수도원에 부설하여, 입교한 중국 청년에게 주로 기독교 교리를 강의하던 곳이었는데, 루지에리가 조경(肇慶)에 가서 현장선교를 진행하게 되면서 그를 대신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선교의 교두보라고 생각하여 이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머물면서 담당한 또 하나의 임무는 발리냐노가 편찬한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전기》의 일부 장절(章節)에 대하여 추가 서술하는 일이었다. 발리냐노는 유럽인들이 중국 사정에 대하여 아주 궁금해하고 있는 만큼 사비에르의 전기가 속히 편찬되어 유럽에 전달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인도에서 지도제작과 역사 자료 수집에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마카오 도착 이후 바로 사비에르 전기 완료작업에 투입되었다. 발리냐노 신부가 쓴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전기》의 제3장 〈론중국적기적(論中國的奇迹)〉은 마테오 리치가 집필하여 추가한 부분이며, 이 장은 같은 제목의 단행본 소책자로 간행되기도 하였다.”1) 이 책은 라틴어로 쓴 원문 뒤에 마테오 리치가 그린 중국 지도 한 장을 첨부하고 있다. 당시 마테오 리치가 아직 중국 문화와 실정에 익숙하기 전의 작업이어서 정확성이 떨어지고 사실과 다소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가 보다 더 깊이 중국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미주
1) [프] 裴化行 著, 管震湖 譯, 《利瑪竇評傳》 上冊, p. 62.
사진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