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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2  통권 187호  필자 : 서게바  |  조회 : 2995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내 교회를 세우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2000년 2월에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중국 H성의 S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언어연수 과정에 등록하여 2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였기에 외국어를 익히는 데도 별 부담 없이 재미있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연세가 많으신 선교사님들이 언어연수 과정에서 힘들어 하시며 결국 중국어 학습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통역을 쓰거나 아니면 한인선교목회로 전환하시는 것을 선교현장에서 간혹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언어연수는 중국대학 안에 유학생들을 위한 언어연수반에서 이루어지는데 중국어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학 문화와 교수들의 성향,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개인학습 선생님을 통해 정기수업 외에 언어학습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개인학습 선생님이든지 우연히 만난 중국대학생이든 어느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고 교제하며 저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동안 기도만 하고 있던 학생들한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다시 일주일을 더 기도하며 복음전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첫 가정교회인 대학교회가 세워지다
당시 한 달여에 걸쳐 모두 10명의 대학생들한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중에는 저의 개인학습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역시나 이미 맺어진 관계를 통해서 저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따라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10명이 모여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모임이 다시 첫 가정교회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하는 중에 형제자매들 스스로 ‘대학교회(大学教会)’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첫 가정교회 이름을 ‘대학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첫 가정교회를 이끌어 가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도, 찬양도, 주기도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마다 모든 순서를 저 혼자서 도맡아 진행을 했습니다. 사회와 찬양인도, 기도, 설교, 광고까지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점심식사를 준비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첫 가정교회는 임대한 아파트 거실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거실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국대학생들한테는 신발을 벗는 것도 문화충격이었고 예배 시간 내내 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생각에 책상과 의자를 구입해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도록 바꾸었습니다. 겨울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여름에는 형제들의 발냄새 때문에 좀 고생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한번은 중국어로 설교를 하는데 다들 제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인지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아내가 답답했는지 중국의 사자성어로 제가 30분 동안 설명한 내용을 한 마디로 얘기했더니 그제서야 형제자매들이 ‘아’하고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내가 지금 말하는 수준이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냐고 물었더니 중학생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중학생 수준의 언어로 대학생들과 석사•박사생들한테 설교를 하고 있으니 전하는 저도 그렇고 듣는 대학생들도 참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10명이 20명이 되고 20명이 30명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대학가정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나중에 그동안 지도자로 훈련 받은 형제 한 명과 자매 한 명에게 교회를 맡기고 안식년의 시간을 보내고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한 기간의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의 시간을 마치고 다시 중국 S성의 C도시로 두 번째 기간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속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를 저희가 있는 지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캠퍼스에서 만난 영혼들을 저희 가정과 연결해주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 이름을 지었는데 주사랑교회(爱主教会)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주로 C도시의 중점대학과 민족대학, 그리고 사범대학을 거점으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고 성경공부로 통해 양육하고 훈련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될 수 있게 했습니다. 더불어 C성의 미전도종족을 리서치한 결과 Z소수민족이 가장 복음에 열악한 것을 알고 이 미전도소수민족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하고 단기선교 등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땅을 밟고 기도하며 영혼을 붙여 주시고 교회가 세워지게 자주 오가며 단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드디어 자주 갔던 소수민족의 거점도시인 K시에 그동안 교제하고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소수민족 학생과 한족 대학생들을 모아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교회는 ‘구자제일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두 달에 한번 정도는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꿈과 같은 시간을 그들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꿈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보낸 지난 선교사역의 시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함께 부족한 자를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복음전파를 위해 중국땅 가운데 보내셔서 사용하셨음을 고백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제가 자주 방문하는 지역의 한 절에 계신 주지스님과 대화하는 중에 주지스님이 워낙 영안이 밝고 마을 주민의 생사화복에 대하여 관여한다고 했다. 몇몇 형제자매들과 그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는 중에 한 형제는 언제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한 자매는 곧 취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는데 다들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저의 차례가 왔을 때,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 맞춰 보세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다시 “우리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아시나요?” 재차 물었더니 그제서야 이 주지스님이 입을 열어 대답하기를 “나같이 작은 신을 믿는 사람은 당신같이 큰 신을 믿는 사람의 일은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주지스님이 영안이 밝은 것이 맞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짧으면 짧고 길면 정말 길었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저희 가정을 통해 여러 지역에 가정교회를 개척하고 세우게 하시고 수많은 젊은 대학생들한테 복음을 전하고 여러 소수민족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다면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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