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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  통권 67호  필자 : 이성민  |  조회 : 1987   프린트   이메일 
[기자의 눈에 비친 중국]
조선족과의 ‘관시’ 회복

지금 중국에 거주하는 30세 이하의 조선족 대부분은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조선족 학교를 세워 민족적 정체감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옛날 이야기다. 중국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철저히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한족(漢族) 학교에 자녀를 취학시키는 부모, 한족과 결혼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 자치주를 벗어나 대도시와 다른 나라로 떠나가는 사람들··. 더 이상 그들에게 있어 할아버지의 고향 ‘조선’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다.

문제는 조선에 대한 망각이 아니라 거부감이다. 한국으로 남편을 보낸 어느 조선족 아주머니가 5년이 지난 후 집을 장만하게 되자, 딸아이도 한국에서 돈을 벌게 해도 되겠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다. 재미교포나 재일교포에 비해 가난한 재중동포는 고국에서 환영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동포인 조선족이 ‘절대로’ 못 올 곳이 한국이어야 할 만큼 양자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국의 경제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조선족과 협력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조선족은 협력할 가치가 충분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 현지에서는 언어상의 매개 역할을 수행해 주었고, 그러나 한편으로, 경제적 목적 이외에 조선족과의 올바른 관계형성을 위해서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자문해보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혈육을 같이 하는 동포가 아닌, 단지 ‘경제적으로 이용가능한 중국인’으로 대우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과 조선족과의 상처난 관계 속에서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간간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들을 이용대상으로 여겼던 우리가 다른 무엇을 기대할 자격이 있을까? 이제 그들에게도 한국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이용 가능한 나라에 불과하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잠시 견뎌낼 수 있는 나라이고, 중국에 온 한국인들은 큰 돈을 만지게 해줄 수 있는 ‘돈줄’일 뿐이다. 앞으로 한중관계의 장도(長途)에서 조선족은 중국의 편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어 중국의 영향력이 거세게 한반도에 몰아칠 때에도, 그들이 우리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선족은 이제 ‘조선’을 떠나 중국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혹자는 200만 조선족 공동체의 와해위기를 우려한다. 정인갑 교수(조선족, 청화대 중문계 부교수)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동북삼성에는 수천 개의 조선족 자치마을과 상당수의 집단거주지들이 있다. 이런 마을들은 조선족의 요람이며 중국 이주 150년간 민족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회적 기초였다. 그러나 지금 이런 마을들이 해체되고 있다. 선양(沈陽) 교외에 있는 200가구 정도 되는 조선족 자치마을의 소학교가 문을 닫게 됐다고 하기에 가보니, 학생 수는 20명도 채 안되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200가구가 사는 마을의 소학교는 학생이 2백 명은 되었다.···」 과연 이들을 조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서로 가지고 있는 것 하나씩을 똑같이 교화하면 그대로 두 개이지만, 서로의 것을 합하고 나누면 몇 배가 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누룩의 법칙이다. 누룩의 법칙에는 상대방을 수단화하지 않고도 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올바른 관계형성을 원한다면 오랜 무관심을 버텨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신뢰 회복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수고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일은 예수 믿는 자들의 주특기가 아닌가 싶다. 더욱이 개방 이후 체제와 이념에 대한 도그마가 깨어진 신념체계의 공백시기에 물질중심의 가치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내고, 가난한 그들의 영혼에 복음을 전해주는 일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어지지 않았던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위하여 기도하는 일, 외면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는 일을 우리가 해나가야 할 것이다. 복음으로 회복되는 조선족과의 아름다운 ‘관시(關係)’를 기대해 본다.




이성미 / 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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