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은 광야였다(행 8:26). 한낮의 열기 속에 수레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천천히 지나간다. 안에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가 앉아 있다. 머나먼 길을 걸어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 왔다가, 이제 다시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의 무릎 위에는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고, 그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사야서였다.
그때 한 사내가 수레 곁으로 달려온다. 빌립이다. 그가 건넨 첫마디는 설교도 논쟁도 아닌 질문이었다. “지금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는 물음이었다. 내시의 대답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서늘하다. “지도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능히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0∼31). “읽는 것을 깨닫느냐” 읽는 일과 깨닫는 일 사이의 거리를 묻는 이 질문은, 정보는 넘쳐나지만 이해는 또 다른 영역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장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무릎 위에도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다. 어느 때보다 길고 빠르게 갱신되는 두루마리, 그 이름은 ‘중국’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와 유튜브, 쇼트폼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그것을 읽는다. 다만 깨닫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 사회만큼 중국 이야기를 많이 하는 곳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양과 이해의 깊이는 비례하지 않았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조사에서 중국을 비호감으로 본 한국인은 2015년 37%였다가 2022년 80%로 치솟아 당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2022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14개국 가운데 18∼29세가 50세 이상 보다 중국을 더 부정적으로 보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80% : 68%). 흐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퓨리서치센터는 2026년 7월 보고서에서 한국을 포함해 과거 매우 부정적이던 나라들에서 호감도가 다소 반등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70% 이상은 여전히 중국에 비호감을 표했고, 나이별로 34세 이하(78%)와 35∼49세(79%)가 50세 이상(63%)보다 높았다. 같은 조사에서 37개국 중앙값은 호감 51%, 비호감 39%였다. 이 변화 뒤에는 사드 갈등과 한한령(限韓令), 미세먼지, 코로나19 그리고 김치와 한복을 둘러싼 문화 논쟁처럼 구체적인 사건과 상처가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월터 H. 쇼렌스틴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Walter H. Shorenstein Asia-Pacific Research Center, APARC)의 한국 설문에서 중국에 비호감을 가진 응답자의 62%는 중국이 한국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55%는 문화 갈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 이해를 앞지르면 우리는 대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극에 반응하게 된다. 이 글이 문해력(Literacy)을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문해력의 확장과 언어의 맥락 문해력이라 하면 흔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의 문해력 논의가 가리키는 범위는 훨씬 넓다. 글자를 해독하는 힘, 문맥 속에서 뜻을 해석하는 힘, 출처와 의도를 따져 묻는 비판의 힘 그리고 쓴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상상력까지 포함한다. 한 나라와 사회를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민주’라는 단어를 보자. 우리에게 민주는 자유선거와 권력분립이라는 문법 속에서 읽힌다. 반면 중국 공식 담론은 2019년 무렵부터 ‘전과정인민민주(全過程人民民主)’라는 표현을 앞세운다. 이 말에 동의하든 반박하든, 먼저 그 단어가 그들의 체제 안에서 누구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 말인지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법치(法治)’도 그렇다. 당의 영도 아래 법으로 다스린다는 공식 해석과 우리가 아는 법치 개념은 같은 글자를 쓰면서도 겹치는 만큼 어긋난다. 단어를 정확히 읽는 일은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반박하기 위한 전제다.
‘종교의 중국화(宗敎中國化)’도 마찬가지다. 이를 단순한 ‘박해’라는 한 단어로만 읽을 수도 있고, 그 안의 정치 논리와 법·행정 체계 그리고 지역마다 다르게 작용하는 현장의 온도까지 겹겹이 읽을 수 있다. 중국은 2018년 2월 1일부터 신(新) ‘종교사무조례’를, 2022년 3월 1월부터 ‘인터넷종교정보서비스관리방법(互聯網宗教信息服務管理辦法)’을 시행하며 촘촘히 쌓아 왔다. 이 규정들이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막는지 아는 교회와 박해하는 한 단어로만 아는 교회는 기도와 선교적 연대의 방식이 같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중국을 ‘읽어낸’ 사람들 선교 역사에는 중국을 먼저 ‘읽어낸’ 선구자들이 있다. 1583년 광둥(廣東)성 자오칭(肇慶)에 정착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李瑪竇)는 한자를 익히고 유교 경전을 깊이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승려의 옷을 입었다가 1590년대 중반 유학자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천주실의》를 중국 고전의 언어와 논리로 썼다. 그는 중국을 가르치러 간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읽으러 간 사람이었다.
1807년 광저우(廣州)에 도착한 개신교 최초의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은 중영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옮기는 데 십여 년을 바쳤다. 신약은 1813년에 번역을 마쳤고, 동료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 米憐)과 함께 성경 전체의 번역을 1819년에 마무리해 1823년 출간했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戴德生)는 1850년대 중반부터 중국옷과 변발을 받아들여 동료 선교사들의 비판을 받았고,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현재 OMF)를 세워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적 용기이기 이전에 문화적·언어적 문해였다. 상대의 말과 옷과 책을 읽을 줄 알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번역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는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의 그늘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조약 체제 아래에서 선교사의 여행과 거주 권리가 보장되었다. 그래서 선교는 중국인의 눈에 외세의 일부로 비치기 쉬웠다. 중국인의 집단 기억에는 ‘백년국치(百年國恥)’라는 서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처럼 외세와 기독교를 향한 분노가 폭발해 수많은 중국인 신자와 선교사가 희생된 비극도 그 기억의 일부다. 서구선교가 그 서사 안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 그 과정에서 이웃 신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읽는 일, 그것 역시 오늘의 문해력이다. 역사의 빛만이 아니라 그늘까지 읽을 줄 아는 사람만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서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글 성경의 출발점은 압록강 너머 선양(瀋陽, 당시 봉천)이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는 의주 출신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그리고 이성하 등과 함께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 전서 단행본 《예수성교전서》를 펴냈다. 한문이 ‘진서’로 높임 받고 한글이 ‘언문’으로 낮춰 보이던 시대에, 여성과 평민도 읽을 수 있는 순한글로 복음이 옮겨졌다. 읽기와 번역은 가장 낮은 자리의 언어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 장로교는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열린 제1회 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에서 외국선교를 결의하고, 이듬해 박태로·김영훈·사병순 선교사를 중국 산둥(山東)으로 파송했다. 나라를 잃은 지 두 해밖에 되지 않는 교회가 교단 차원에서 보낸 첫 외국 타문화권선교였다. 복음을 받던 교회가 복음을 들고 현지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처음으로 다른 문화권을 향해 걸어간 장면이었다. 그 뒤로도 중국 땅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마다 우리와 깊이 얽혔다. 이 오랜 인연과 맥락을 아는 교회와 모르는 교회의 중국 이해가 같을 수는 없다.
오독의 위험: 경멸과 공포라는 쌍둥이 극단 문해력이 부재할 때 생기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오독’이다. 오독은 대개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경멸’이다. 14억 인구를 ‘시끄럽고 불결하고 짝퉁이나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몇 가지 낙인으로 압축하거나, 곧 무너질 나라라는 붕괴론으로 위안을 삼는 독법이다. 다른 하나는 ‘공포’이다. 중국이 곧 모든 것을 삼키리라는 필승론,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 일상까지 잠식했다는 침투론에 사로잡히는 독법이다.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쌍둥이다. 상대의 크기를 실제보다 작게 혹은 크게 어림하면서, 복잡하고 입체적인 텍스트를 끝까지 읽지 않은 채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 결론부터 내린 조급한 독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웃에 대한 증언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십계명 중 아홉째 계명은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한다(출 20:16). 일차적으로는 법정의 위증을 가리키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은 이를 이웃의 명예와 이름을 지키는 일로 넓혀 읽어 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2문은 누구도 변명을 듣지 않은 채 성급히 정죄하는 데 가담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4문은 이웃의 명예를 지키고 높이는 일을 이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로 꼽는다. 한 민족에 대한 부정확하고 자극적인 소문을 반복해 퍼뜨리는 일도 결국 이웃을 향한 증언의 윤리 문제다.
예수님의 경고는 더 날카롭다. 형제의 눈 속 티는 보면서 제 눈 속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마 7:3)은 우리가 중국을 바라보는 렌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듯 우리의 중국 이해 문법에는 냉전기 미국과 일본이라는 번역자를 거쳐 들어온 시각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 국내 정치의 진영 논리에 따라 중국을 자의적으로 소비하는 경향도 강하다. 오랜 세월 ‘중화’ 앞에 섰던 역사적 경험이 남긴 열등감과 그 반작용도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중국을 읽기 전에,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눈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은 문해력이 비판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는 법은 배운다고 해서 중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우려를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우려를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서 한국, 일본 그리고 호주 등 부유한 나라의 응답자 약 4분의 3 이상은 중국 정부가 국민 개인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 일본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중국과 이웃 나라의 영토 분쟁을 걱정하는 응답이 10년 넘게 80%를 웃돌았다. 문해력을 가르는 선은 비판이나 침묵이 아니라 근거 있는 비판이냐 낙인이냐 그리고 제도와 정책을 향한 비판이냐, 사람을 향한 혐오냐다.
미래 중국을 읽기 위한 네 겹의 문해력
■□미래의 중국을 올바르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겹의 문해력이 요구된다.
첫째는 언어 문해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접하는 번역어 뒤에 원어가 지닌 뉘앙스와 맥락이 있음을 아는 일이다. 모든 번역은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놓친다. 같은 단어가 길을 떠나며 뜻이 바뀌기도 한다. 중국 개신교 공식기구의 이름에 들어 있는 ‘삼자(三自)’가 그 예다.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이라는 삼자 원리는 원래 현지 교회가 스스로 서도록 돕는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 단어의 이력과 중국의 역사를 모른 채 삼자교회를 읽으면 선교 역사의 한 장을 통째로 놓친다.
둘째는 역사 문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질 무렵 인구의 약 80%는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2020년 유네스코 통계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15세 이상 성인 문해율은 97%에 이른다. 한 세대 남짓한 사이에 이룬 이 거대한 문해 혁명은 중국인이 갖는 자부심의 한 축이다. 1956년 공포된 한자 간소화 방안도 대중 문해 운동의 흐름 속에서 추진되었다. 다만 간체자가 문해율 상승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번체자를 그대로 쓰는 홍콩과 대만의 문해율도 높기 때문이다. 간체자를 ‘한자를 훼손한 일’로 폄하하기 전에, 그렇다고 ‘혁명이 성과’로만 미화하기 전에 그 역사적 맥락을 읽는 것이 역사 문해다. 1966년부터 10년 가까이 이어진 문화대혁명의 상흔과 1978년 이후 개혁개방의 기억 그리고 백년국치를 극복했다는 그들만의 서사를 함께 읽어야 오늘의 중국이 무엇에 자부심을 느끼고 무엇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비로소 보인다.
셋째는 정보 문해다. ‘만리방화벽(The Great Firewall)’ 안팎의 정보 생태계는 극명히 다르다. 관영 매체와 공식 통계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숫자를 불신하면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2023년 6월 16∼24세 청년실업률이 21.3%로 사상 최고를 기록한 뒤 발표를 중단했다가, 같은 해 12월분부터 재학생을 제외하는 새 방식으로 재개했다. 재개 당시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옛 방식이라는 25% 안팎이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2026년 5월 공식 수치는 15.7%이다. 방식이 바뀌면 숫자의 의미도 달라진다. 숫자를 그대로 믿거나 통째로 버리는 대신, 무엇을 세고 무엇을 세지 않는지 묻는 것이 정보 문해다. 거울은 한국 쪽에도 있다. 한국인이 중국을 떠올릴 때 ‘더럽다’, ‘짝퉁’, ‘이기적’이라는 단어들이 자주 거론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조회수 경쟁 속에서 자극적인 콘텐츠가 유리해지는 플랫폼의 구조는 이런 낙인을 날마다 복제하고 강화한다. “누가, 왜, 누구를 위해 이 말을 생산하는가?” 이 비판적 질문을 습관화하는 것이 정보 문해의 핵심이다. 여기에 두 질문을 더하면 좋다. 원자료는 무엇인가? 반대편은 같은 사안을 어떻게 말하는가?
넷째는 영적 문해다.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가장 고유한 과업이다. 눈부신 경제성장의 그림자 속에서 중국의 청년세대는 ‘네이쥐안(內卷, 소모적 과당 경쟁)’과 ‘탕핑(躺平, 바닥에 눕는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의미)’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두 가지 용어는 2020∼2021년 무렵 크게 퍼졌고, 청년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이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를 곧바로 종교적 갈증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세대가 겪는 깊은 피로감과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그 말들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적 문해란 사회적 표상 밑에 숨겨진 인간의 근원적 질문과 목마름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중국교회의 현실을 읽는 일도 여기에 속한다.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가르는 것은 복잡한 현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숫자부터 그렇다. 중국 정부는 2018년 《종교백서》에서 개신교 신자를 3,800만 명으로 밝혔지만 여기에는 등록되지 않은 가정교회 신자가 빠져 있고,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2017년 추정은 6,000∼8,000만 명이다. 숫자의 폭 자체가 읽어야 할 텍스트인 셈이다.
종교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신앙 공동체의 모습도 바뀌고 있다. 온라인은 많은 신자에게 중요한 통로였으나, 2022년 3월 시행된 ‘인터넷종교정보서비스관리방법’은 허가 없는 온라인 설교와 예배 중계를 금지했고, 신자들의 계정과 모임방이 정리됐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신앙 공동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는 지역과 교회마다 다르고,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확신에 찬 단정보다 겸손한 관찰이 필요하다.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되, 거대한 국가 체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별 국민을 동일시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명하셨다(마 10:16). 지혜 없는 순결은 순진함이 되고, 순결 없는 지혜는 냉소로 귀결된다.
범주에서 한 사람의 ‘얼굴’로 한 장면을 상상해 보자. 베이징(北京)에서 온 스물세 살 유학생이 서울의 한 대학 기숙사에 짐을 푼다.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즐겁게 배웠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자기 모습이 조금은 자랑스럽다. 그러나 첫 학기 학과 단체 대화방에 누군가 무심코 올린 혐오 밈과 농담이 그녀를 ‘중국인’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린다. 그녀는 상처를 숨긴 채 웃으며 넘기지만, 그날 밤 오래도록 스마트폰 화면을 끄지 못한다. 등장인물은 가상이지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하는 유학생과 이주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통계와 미디어는 14억을 단 한 줄의 프레임으로 규정하지만, 복음서는 언제나 한 사람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던 시대(요 4:9), 예수님은 한낮의 우물가에서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 앉으셨다. 예수님은 먼저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요 4:7). 도움을 주는 자리가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자리에서 대화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집단적 범주로 읽지 않으셨다. 그녀가 살아온 아픈 삶의 서사를 읽으셨고, 그 이야기 속 영혼의 진짜 목마름을 읽어내셨다. 범주가 아닌 얼굴로 얽힌 그 여인은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다(요 4:28∼30, 39).
문해력의 가장 깊은 단계는 결국 획일화된 범주를 읽는 데서 얼굴을 읽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원칙은 비판을 접자는 뜻이 아니다. 비판은 제도와 정책을 향하고, 사랑은 사람을 향한다. 중국이라는 거대 담론이 내 곁의 한 사람의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 경멸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던 공간은 사랑과 이해의 가능성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기독교 신앙의 한가운데에는 읽기와 번역이 자리 잡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훈계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언어와 시간과 문화의 한계 속으로 들어와 친히 이웃이 되셨다(빌 2:6∼8).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신 궁극의 번역이다.
선교학자 라민 사네(Lamin Sanneh)는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번역되는 종교’라 불렀고,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복음이 각 문화의 언어로 옮겨질 때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뿌리내린다는 ‘번역 원리’를 말했다. 오순절이 그 원형이다. 바벨에서 흩어졌던 언어는 성령 강림의 날 장벽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고향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다(행 2:6∼11). 복음은 하나의 제국적 언어로 통일되어 강요되지 않고 번역을 통해 각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렇기에 선교의 역사는 곧 성육신적 번역의 역사다.
느헤미야 시대에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율법을 낭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뜻을 해석해 백성이 깨닫게 도왔다(느 8:8). ‘읽는 공동체’에서 ‘깨닫는 공동체’로 나아간 것이다. 한국교회가 중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도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을 향한 기도는 막연한 당위나 감정에 머물기 쉽다. 맥락을 이해하는 이웃을 향한 기도는 그의 구체적인 이름과 형편을 부르며 깊어진다. 중국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지적·영적 노력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아주 구체적인 실천이다. 사랑은 상대의 언어와 맥락을 배우려는 성실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처음의 광야로 돌아온다. 빌립은 내시의 수레에 올라 곁에 앉았고(행 8:31), 내시가 읽던 바로 그 본문에서 말을 시작했다(행 8:35). 상대가 읽는 것에서 출발해 곁에 앉는 것, 그것이 문해의 선교적 자세다. 이해를 얻은 내시는 세례를 받고 기쁘게 자기 길을 갔다(행 8:39). 바른 이해가 그에게 영적 기쁨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중국에 대한 두루마리와 정보는 넘쳐난다. 부족한 것은 그 수레 곁으로 달려가 질문을 던지고 맥락을, 함께 뜻을 풀어 줄 성숙한 ‘빌립’이다. 우리는 중국을 깊이 읽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미디어의 자극에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의 다음세대는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진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지리적 위치는 바꿀 수 없고, 중국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이웃일 것이다. 이웃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이웃을 어떻게 읽을지는 우리의 신앙적 선택에 달려 있다.
■□오늘 우리가 미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문해력을 높일 방안은 무엇일까?
첫째, 다각도로 읽기. 자극적인 소문 대신 관영 자료, 서방 연구, 한국 학계, 중국 현지인의 길 그리고 교회사를 골고루 읽는다. 한 권은 반드시 중국인 저자의 책으로 한다.
둘째, 공유하기 전에 확인하기. 영상과 기사를 전하기 전에 출처와 의도, 원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한다.
셋째, 곁에 앉기. 교회 가까이에 있는 중국인 이웃과 유학생을 식탁에 초대하고, 선입견 없이 끝까지 들어준다.
넷째, 함께 공구하고 기도하기. 소그룹과 다음 세대 교육 현장에 ‘중국 이해 스터디·기도 모임’을 둔다. 월 1회 90분(읽기 30분, 나눔 30분, 기도 30분)으로 시작할 수 있다.
다섯째, 구분하며 기도하기. 제도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국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과 형편을 불러 기도한다.
소그룹에서 나눌 질문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내가 최근 본 중국 관련 영상이나 기사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경멸’과 ‘공포’ 가운데 내가 더 자주 기우는 쪽은 어디이며, 그 감정 뒤에는 어떤 경험이 있는가? 가까이 있는 중국인 이웃의 이름과 이야기를 나는 몇 가지나 알고 있는가? 제도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혐오를 나는 일상에서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의 중국을 위한 기도는 얼마나 구체적인가?
문해력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러한 작은 습관과 실천 속에서 증가한다. 무작정 좋아하자는 말이 아니다. 두려워하거나 낮추어 보지도 말고,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으로 ‘먼저 제대로 읽자’라는 말이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손은성 | 중국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