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최고의 환관으로 악명 높은 인물 위충현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한 권력자이다. 그는 특무 경찰인 ‘동창(東廠)’을 지배하고 동림당을 탄압하며 공포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자기가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로 하여금 ‘만세’에서 천세를 뺀 ‘구천세’ 라고 부르게 하고,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사당을 짓게 한 인물이다. 예리한 통찰력과 냉혹한 판단력으로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을 누렸으나, 단명으로 끝나게 되었으며, 그의 권력의 황포로 명왕조는 국운이 쇠하고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환관으로 궁정에서 지내는 위충현
환관의 발호는 명나라 멸망의 한원인을 제공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위충현이다. 위충현(魏忠賢: 1568~1627)은 본래의 이름이 이진충으로 1568년 허베이(河北)성 하간(河間)부 쑤닝(肅寧)현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글을 전혀 모르던 무식한 사람으로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며 지내는 무뢰한이었다. 아내도 다른 곳으로 재가하고 자식도 없었기에 그는 자진하여 거세하고 환관이 되어 궁정에 들어갔다. 일설에는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게 되자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다고도 한다. 환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신종(神宗,연호는 萬曆1572~1620)이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황태자는 동궁에 있었음에도 생활이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였고, 황태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관 이진충은 궁정에서 그들을 돌보며 식사 시중을 들고, 여러 가지 놀이 기구를 마련하여 함께 놀아주기도 하였다. 신종이 죽은 후 광종(光宗, 연호는 泰昌,1620)이 즉위하였는데, 평소 병약한 광종은 시의 (侍醫)가 준 알약을 먹고 급사(紅丸의 案,1620)하였다. 이 일은 즉위 한 후 겨우 한달 만의 일이었다. 광종의 뒤를 이어 16세의 희종이 제위를 물려 받았다.
황제를 대신한 실권
희종(熹宗, 연호는 天啓, 1621~1627)은 어렸을때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乳母) 객(客)씨 밑에서 자랐다. 그는 객씨를 신임하고 존경하였으며 그녀를 극진히 대우 하였다. 희종이 즉위하였을 때 유모의 나이는 30세였고, 즉위하자마자 유모에 대하여 ‘봉성부인(奉聖夫人)’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봉성’이란 황제를 기른 유모에게 내려지는 호칭으로, 객씨 한 사람에게 국한된 칭호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역사적으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봉성부인’이라 하면 희종의 유모 객씨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황제로부터 신임과 종경을 받고 있던 그녀는 후비나 궁인을 세우는 일에도 깊게 간섭하였다.
위충현은 유모 객씨와 가까이 지내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 역시 황제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얼마 후에 그는 희종으로부터 ‘위충현’ 이라는 이름도 하사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관의 조직인 사례감(司禮監)의 최고관직인 병필태감(秉筆太監)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병필태감이란 황제가 조정에 올라온 건의 문을 읽고 비답을 내릴 때 그 일을 도와 문장을 작성하는 임무를 띤 직책이었다. 무식한 사람이 이러한 중대한 일을 담당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위충현은 황제가 있는 건청궁에 의젓하게 앉아 비서에게 상주문을 읽어 올리게 하여 황제의 비답을 대리하였으니 그 지위가 실로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희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공예 제작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 궁정 안 깊숙한 곳에서 톱, 대패, 망치 등을 가지고 매일 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는데 그의 칠기를 만든는 기술은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연장을 가지고 어떤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완성할 때까지 식사도 잊고 더위도 모를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었다가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었다가 부수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또 승마나 무술 경기를 즐겨 하였고, 정각에서 연극에도 몸소 출연하였다. 이처럼 도락에 빠져 정무에 무관심하였던 희종은 급기야는 모든 정사를 위충현에게 맡겨버렸다. 어쩌면 이것은 황제가 해결할 수 없는 당쟁의 격화 속에서 손을 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당쟁은 더욱 격화되어만 갔다.
1626년, 위충현은 특무 비밀 경찰기관인 ⌜동창(東廠)」의 장관이 되어 경찰권을 장악하게 된다. 모든 정보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위충현의 권력 장악은 황제의 유모 객씨와의 결탁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계는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양파로 나뉘어져 격렬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위충현은 이러한 정쟁을 교묘히 이용하여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포정치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까지
관계(官界)에서 파벌이나 당파의 존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로 명말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대의 관료는 그 출신지에 의해 향당을 결속하는 일이 많았으나 명말에는 종래의 지연관계의 결합을 넘어 사회 정세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 입장에 의해 결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신종 때는 ⌜광세의 화」등의 징세문제를 둘러싸고 환관과 결탁하여 정권을 좌우하는 관료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관료는 뇌물로 환관에게 아첨하고 환관은 인사에 개입함으로써 관료 사이에 세력을 펴나갔는데 이렇게 결합한 이들을 ‘엄당’(閹黨)이라 한다. 물론 엄당에 가까운 결합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그것이 엄당이라는 형태로 정계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이 때쯤의 일이었다. 그리고 위충현의 등의 엄당은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무두 ‘동림당’ 이라 불렀는데, 동림당의 지도자는 고헌성이었다. 고헌성은 관직에 있다가 면직되어 고향 쟝쑤성 우시(無錫)에 내려가 동림서원을 짓고 여기에 지식인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강학’이란 학문을 강의한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토론회로서 정치 시국에 대한 비판이었다.
일반 지식인들이 볼 때 정국은 분개할 정도로 부패하여 있었기에 동림서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환관과 결탁되어 있는 부패정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동림서원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학자, 관료, 지식인이 그에 동조하여 동림당의 권위는 높아져 갔다. 이리하여 동림당과 비동림당(엄당) 사이에는 격렬한 당쟁이 일어났다.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당쟁이 노골화되고 상대에 대한 증오가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 양당간의 대립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관료들은 권력으로 상대를 제거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거기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위충현이었던 것이다. 학문적 소양이나 인정을 가지고 있었으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위충현은 과감히 대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24년, 이를 염려한 동림파 관료 좌부도어사 양련은 황제에게 위충현의 24개조의 대죄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위충현은 황제 앞에서 울며 호소하고, 동창의 장관을 사임하는 등 짐짓 겸양의 모습을 보이며 난처한 상황을 잘 빠져 나왔다고 한다.
위충현은 그 뒤 동림당을 철저히 탄압하였고 살벌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1625(天啓5년), 자신을 탄핵한 양련(楊蓮), 첨도어사 좌광두(左光斗), 급사중 위대중(魏大中), 어사 원화중(袁化中), 태복소경 주조서(周朝瑞), 섬서 부사 고대장(顧大章)등을 차례차례 체포하여 참살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이 육군자(六君子)라 칭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연류된 많은 동림파 사람들이 정계에서 숙청되었고, 이어서 전국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다. 위충현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좌천, 면직되고, 때로는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끝내 사형에 처해지는 이른바 ‘공포정치(恐怖政治)’의 삼엄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공포정치로 그의 권력은 강해졌지만 반면에 국정이 문란해지고 백성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거리에 나오면 앞에서는 길을 쓸고, 뒤에서는 수많은 호위병들이 그를 따르고, 길가의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구천세(九千歲)! 구천세(九千歲)!”를 외쳤다고 한다. 황제에게 부르는 ‘만세(萬歲)’에서 천세를 뺀 ‘구천세’를 불러 그를 칭송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충현을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 그의 동상을 세운 생사(生祠)가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생사 건립은 1626년 6월 항저우(杭州)를 시작으로 난징, 쑤저우, 랴오뚱 지방에까지 이르러 거의 전국에 파급되었다. 건축비는 많은 경우 수십만 량, 적을 경우에는 수만 량이 들었는데, 그 비용은 물론 민중이 부담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투옥되었다.
위충현의 몰락과 의의
황제를 대신하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위세를 떨쳤던 위충현은 희종이 재위7년 만에 죽고 새로운 황제 의종(毅宗, 연호는 崇禎,1627~1644)이 즉위하자 하루 아침에 몰락하게 되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의 의종은 위충현의 오만한 행태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즉위하자마자 위충현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고, 과감히 위충현을 파직하고 펑양(鳳陽)으로 귀양을 가도록 명하엿다. 결국 겁에 질린 위충현은 1627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황제는 그의 좌상을 천하에 알리고 그의 전재산을 몰수하였다. 위충현의 묘는 베이징 서산(碧雲寺) 안에 있다. 거기에는 두 개의 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48자로 새겨져 있다.
欽差總督東廠官旗辦事.掌惜新司. 內府供用車. 尙膳監印務. 司禮監秉筆. 總督南海子. 提督保和殿等完吾魏公忠賢之墓.
완오(完吾)이전의 40자는 모두 위충현의 관직명이고 완오는 위충현의 자(字)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문하생들이 유체를 모아 이곳에 장사한 것이다. 오늘날 벽운사는 장려한 금강보좌탑이 있는 관광명소로 되어있으나 위충현과 관계 깊은 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중국의 전제정치에는 언제나 측근정치가 뒤따랐는데, 그 주역은 회척과 환관이었다. 명말에도 암군(暗君)이 출현하고 환관이 발호하였으니 즉 위충현의 발호가 그것이다. 이것은 홍무제의 환관에 대한 엄한 단속을 지키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만력제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등 사회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숫자는 한정되고 능력보다 인맥과 정실을 통해 출세하려는 모순된 사회체제가 위충현과 같은 인물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위충현은 당쟁의 격화 속에서 용이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공포정치의 장본인인 위충현이 죽은 후, 동림당은 비록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시들어져 가는 명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충현의 공포정치로 많은 관료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되어 인재가 부족하였고 정계는 부패하고 당쟁은 계속되었으며, 사회 불안과 재정의 궁핍으로 민심은 왕조를 떠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은 안으로 농민반란과 밖으로 청의 침입을 자초하였다. 결국 명조는 이로 인해 이후 역사의 무대를 청조에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