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 중국 동북부의 만주에서 일어난 왕조이다. 태조는 누르하치가 만주 땅에서 후금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일어나 2대 태종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이라 정하고, 3대 순치제 때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명조가 멸망한 호기를 얻어 중국에 들어가 왕조를 세웠다.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람이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聖祖, 康熙帝: 재위1662~1722)이다. 당시 청조는 중국에 들어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한(漢) 민족이라는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처럼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강희제에게 맡겨진 과제는 이러한 취약한 왕조의 기반을 굳혀 국가 체제를 든든히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재위61년 동안 착실히 이러한 어려운 과제를 하나 하나씩 풀어나가며 외정과 내정에 혁혁한 공적을 세워 후세의 사람들에게 창업과 수성을 겸비한 명군으로 칭송을 받게되었다.
강희제는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이며 연호가 강희였으므로 흔히 강희제라 불리고 있다. 당 태종과 함께 중국 역대 군주중 명군으로 이름이 높으며 그의 아들 옹정제(世宗, 雍正帝: 1722~1735), 손자 건륭제(高宗, 乾隆帝: 1735~1795) 시대로 이어지는 3대 130여 년 간, 곧 17세기 후 반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는 청조의 최 전성기로 유명하다.
삼번의 난 진압으로 군주 독재권 장악
강희제는 겨우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아무리 영특하다고 하여도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는 4인의 원로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그후 6년이 지난 14살 때부터 그의 친정이 이루어졌다. 그에게 맨 처음 닥친 시련은 ‘삼번의 난’이었다. 실은 청조가 중국 평정에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군사력도 있지만 그보다도 한인(漢人) 장군들의 협조에 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상가희, 경증명 등은 일찍이 만주시대 때 철포를 가지고 청조에 투항하였고, 오삼계는 스스로 만주족을 중국 내로 끌어들이고 이후에도 중국 정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청조는 중국 평정에 큰 공을 세운 한인 장군들을 남쪽 지방 왕으로 봉하였다. 오삼계를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지방의 방위를 담당한 평서왕으로, 상가희를 광둥(廣東) 지방 방위를 담당한 평남왕으로, 경증명을 푸젠(福建) 지방의 방위를 담당한 정남왕으로 각각 봉하여 남쪽으로 도망한 남명정권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세 왕을 삼번(三藩)이라 부르는데, ‘번’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청조의 울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희제가 삼번의 폐지를 결의하자 오삼계를 중심으로 한 삼번이 불만을 품고 청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삼번의 난(1673~1681)’이다.
삼번의 난은 장장 8년에 걸쳐 그 전화가 10개 성에 미친 대란이었지만, 이 난이 평정됨으로써 청조는 중국 본토 정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란 평정을 직접 지도한 약관의 강희제는 절대적인 군주 독재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삼번의 난이 평정되어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자, 이번에는 타이완의 정씨 세력에 토벌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타이완에는 청 왕조를 타도하고 한족 왕조를 부흥하려는 정성공(鄭成功) 세력이 최후 거점으로 삼아 항쟁하고 있었는데, 청조는 1683년에 타이완의 서쪽 펑후도(澎湖島)를 공략하였다. 이미 정성공은 20년 전에 죽고 그 손자 정극상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청의 공격을 받자 마침내 그는 청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후 타이완에 타이완부를 설치하고 푸젠성에 예속시켰는데, 이로써 강희제는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외정으로 중화제국 건설
타이완을 평정한 후 직면한 난 문제는 북방문제였다. 16세기 말부터 중국 북쪽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이 17세기 중엽에는 헤이룽강(黑龍江. 아무르강)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네르친스크와 알바진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헤이룽강 동쪽과 남쪽을 넘다보고 있었다. 헤이룽강 남쪽 곧 중국의 동북지방은 만주족의 고향 땅이었기에 러시아의 진출은 청조에 위협적인 일이었다. 사태가 중대함을 느낀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 알바진 공격을 명하였다. 그는 러시아인에 맞서 싸우는 한편으로 외교 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맺어진 것이 네르친스크 조약(1689)인데,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양국의 국경이 정해졌다. 이리하여 강희제는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저지하고 헤이룽강 이북 및 우수리강 이동의 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외몽골 지방에도 세력을 펴 나갔다. 천산북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펴고 있던 증가르부의 세력이 외몽골에 이르자, 1688년에 강희제는 친히 정벌에 나서 그 세력을 물리치고 외몽골을 평정하였다. 이후 강을 맺어 몽골 북변의 국경선을 확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1720년에는 티베트에 원정군을 보내어 그곳을 지배하였는데, 이와 같은 외정을 통해 전례 없이 넓은 중화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중국을 지배한 강희제는 전국을 18성으로 나누어 부․ 주․ 현을 두었다. 1성 내지 2성에 총독, 그리고 각 성에 순무(巡撫)를 두어 최고의 지방관으로 삼았다. 동북지방은 청조 발상지임으로 특별한 행정조직을 어 3성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곳을 동삼성(東三省)이라 불렀던 것이다.
강희제는 중국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관직에 한인과 만주인을 병용하여 채용하였다. 예를 들면 내각 대학사는 만주족․ 한족 동수로 하고, 육부의 상서․ 좌시랑․ 우시랑을 모두 만․ 한족 각 한명으로 하는 등 철저히 만․ 한 동수제를 채택하였다. 만주족과 한족이 서로 협력하여 공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만주족과 한족이 상호 견제하고 서로 감시함으로써 부정을 꾀할 수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따라서 나쁜 일을 못하게 됨과 동시에 좋은 일도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원래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정치가에 대하여 좋은 일을 하도록 권장하기보다는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학문을 좋아한 군주
당시 강희제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 하였으나 민심 수습 면에서 여러 난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기개 있는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강희제는 삼번의 난이 거의 평정단계에 이르자 특별 관리등용시험인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설치하여 반청(反淸) 지식인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학식 있는 선비들에게 “박학홍유과‘에 응시하도록 권장하여 이에 합격한 자를 관직에 등용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웬만한 명나라 유신이나 인망 있는 지식인들은 이 시험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대신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을 추천․ 선발하도록 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자를 지식인들에게 보내어 출사할 것을 강요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을 가마에 태워 베이징으로 데려와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시험을 거부하고, 어쩔 수 없이 시험장에 나왔다 하더라도 답안을 제대로 쓰지 않거나 답안 대신 시로써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면서 한인 지식인들은 강희제의 부름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강희제는 이들 지식인을 회유하여 관직에 등용하였다.
청조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한족 지식인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문치(文治)는 물론 문화사업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강희제는 무인의 기질이 많은 인물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피나는 노력으로 학문에 열중한 호학(好學)의 군주였다. 그가 8세에 즉위하였으니 제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제왕학을 공부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로부터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 ‘서학’, 이른바 유럽 학문에 대한 강의를 즐겨 듣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대포를 만들고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서양 사람 가빌롱(J. F. Gerbillon)이 궁정에 들러 강의를 하였는데, 그는 궁정 문을 나오면서 “황제는 정말 인재다! 서양 사람들에게 반년 동안 가르쳐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황제는 한달 만에 깨우치니, 나는 이제 바닥이 드러날까 두려워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희제는 학문에 몰두하는 정신이 강하고 박식하였으며 또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한 그는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흠천감의 우두머리를 서양 선교사로 임명하였는데, 아담 tif(Adam Shall von Bell. 湯若望)과 페르비스트(Verbiest, Ferdinand. 南懷仁)등은 베이징 천문대의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예수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 부베(Boubet, 白晋)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중국 전국의 토지를 실제로 측량하여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강희제와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동시대의 인물인데, 중국에서 관리생활을 한 부베는 『강희제전』이라는 책을 지어 루이 14세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젊었을 때 하루 내내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과로로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한다. 삼번의 난 진압 때에도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은적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한 권의 책을 읽으면 한 권의 이익이 있고, 하루 독서하면 하루의 이익이 있다. 짐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겨하였는데 지금 늙어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 본 적이 없다. 천하를 다스리기 50여 년, 대과(大過)없이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책과 친함으로 얻은 보상이다.” 라며 독서 효용에 대하여 피력하였다. 그는 정사를 돌보며 틈만 있으면 독서실인 남서방(南書房)에서 책을 읽고 경연(經筵) 장소에 나가 대학자의 강론을 듣기를 좋아하였다.
이처럼 학문을 좋아한 강희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학자들을 수도 베이징에 모아 대대적인 국가 편찬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편찬 사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대대적인 『강희자전(康熙字典)』의 편찬이다. 이 자전은 1710년 (강희 49년)에 편찬이 시작되어 6년후인 1716년 (강희55년)에 완성된 것으로, 47,035자, 고문자 1995자, 총 49,030자가 수록된 대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또한 이 책에 사용된 서체는 정식 서체로서 학자들에게 중시되어 왔다. 이 밖에도 『대청회전(大淸會典)』180권, 『패문운부(佩文韻府)』106권, 『역대제화시류(歷代題畵詩類)』120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그리고 주자학 관계 저서인 『주자전서(朱子全書)』, 『성리대전(性理大典)』등은 그의 명으로 지어진 유명한 편찬서들이다.
민정 안정과 근검 절약
강희제는 군주로서 지녀야 할 덕목과 치도(治道)를 엄하게 교육받은 군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걸음걸이, 식사예절과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신하를 대하는 법, 백성을 다스리는 법,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법 등 제왕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조모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강희제가 먼저 눈을 돌린 것은 감세 정책을 통한 민생 안정이었다. 그는 ‘면세야말로 고금 제일의 선정’이라고 말하면서 매년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1684년(강희23년)에는 치수 공사의 성과를 살피기 위하여 남방을 여섯 차례나 순행하였는데 그 때마다 궁중의 내탕금(內帑金)으로 비용을 충당하고 지방민들에게는 일체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탐관오리의 횡포를 철저히 경계하였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뇌물 수수 행위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그의 시대에 유명한 업적은 인두세의 폐지이다. 강희제 시대, 평화가 계속되고 산업이 발달하자 국내에 은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국력이 신장되고 국가의 재정도 풍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711년(강희50년)에 인정 (人丁), 곧 성인남자의 수를 조사하여 이후 출생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성세에 출생한 ‘성제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이라 하여 정세 (인두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성세자생인정제의 실시에 의해 과세의 대상이 되는 인정 수는 고정되고 정은도 고정되었다. 그리하여 생각하여 낸 것이 정세(丁稅)란 독립항목을 없애고 정세를 지세(地稅)에 포함시켜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지정은(地丁銀) 제도이다. 이와 같은 지정은제 실시 이후 인두세가 사실상 폐지되었기 때문에 호적상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관료들에 대하여 엄한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근면과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인 군주이다. 1720년(강희 59년), 신하들이 제위 60년 축하 연회를 베풀 것을 건의하자 “인심과 풍속이 아직 잘 갖추어지지 않고 정사가 아직 다 다스려지지 않았는데,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구해야 할 군신이 잔치를 베푸는 일은 마땅하지 않으니 경하하는 일을 그치기를 바라오”라고 하면서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말년의 고뇌
청조가 중국을 지배하였다 하여도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민족을 지배해야 했기 때문에 중국의 주인공으로서의 어울리는 자질을 보여 한민족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강희제가 학문에 몰두하면서 긴장감을 가지고 정사를 돌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61년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서 창업과 수성을 잘 겸비한 보기 드문 명군으로 명성을 떨치었다.
일세의 명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강희제도 말년에 취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그는 14세에 첫 아들을 낳은 이후 자그마치 35명의 황자와 20명의 황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황후가 둘째 아들을 낳은 후 곧 죽었기 때문에 그를 측은히 여겨 총애하고 두 살 때 일찍이 황태자로 책립하였다.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 후계자 교육에 임하게 하였으나 황태자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황태자를 둘러싸고 관료들 사이에 알력이 생겨 결국 폐위하였다. 후에 성실성이 엿보여 다시 황태자로 책립했으나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여 폐위시켰다. 이와 같은 두 차례에 걸친 황태자 폐립극 연출은 강희제로는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죽기 직전까지 태자를 책립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자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태자가 결정되어 있으면 즉위 이후를 고려하여 그의 신임을 미리 획득해 두려는 관료들의 움직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즉위한 옹정제는 넷째 아들로서 강희제의 유조(遺詔)에 따라 황제가 되었다. 강희제가 임종시에 시신의 손에 붓으로 「四」를 써 넷째 아들이 제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은 「十四」라고 썼는데 「十」이 지워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옹정제는 모략에 의해 제위를 계승한 황제라는 평판도 돌았다. 이래서 옹정제는 후계자 문제 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지 않고 의중에 있는 인물의 이름을 적어 작은 상자에 넣어 밀봉하여 건청궁 정면에 걸려있는 ‘正大光明’이라 쓴 액자 뒤에 숨겨두었다가 황제가 죽으면 개봉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황제의 일신에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도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말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민이 많긴 하였지만, 강희제는 재위 61년 동안 외정과 내정에 큰 공을 세워 중국 지배의 기초를 든든히 하였다. 그이 시대는 실로 통일․ 창업․ 흥륭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후세 사람들에게 창업과 수성을 겸비한 명군으로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위대한 황제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희제의 빛나는 업적은 이후 옹정․ 건륭제로 계승․ 발전되어 중국 문화의 최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17~8세기는 한 마디로 ‘중국 문화의 완숙기’ 였다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