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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20  통권 85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6356   프린트   이메일 
[중국역사 속으로]
중국 최전성기의 건륭시대
그러나 거기에 사양의 그림자는 드리우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와 비교했던 청의 황제 건륭제는 거의 18세기 내내 중국을 지배했다. 그는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고 대규모의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예술을 보호하고 자금성을 새롭게 단장하는 데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닥치면서 청 왕조 몰락을 재촉하는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사상 제일 오래 군림한 건륭제

강희제(康熙帝, 1661-1722)와 옹정제(擁正帝, 1722-1735) 시대에 청조의 제도는 완성되고, 건륭제(乾隆帝, 高宗, 재위기간 1735-1796) 시대에 드디어 최성기가 찾아왔다. 1711년에 태어나 1799년에 사망한 건륭제는 그 생애가 18세기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건륭제는 조부 강희제, 부친 옹정제 두 대에 걸쳐 이룩한 정치적 기반과 풍부한 재정을 물려받은 행운의 황제다. 부왕이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한 그는 재위 60년 간, 대내적으로 정치제도가 정착하고, 경제력이 최절정에 이르렀으며, 대외적으로는 영토가 크게 확대되어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건륭의 시기는 청제국은 물론 중국 전 왕조를 걸쳐 최전성기라고 불린다.

건륭제의 성세는 그의 긴 치세가 잘 입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중국 역대 천자 가운데 한 무제(武帝)의 치세가 54년간으로 긴 편이다. 다음은 양 무제(武帝)와 명의 만력제(萬曆帝)가 48년 간, 명의 가정제(嘉靖帝) 45년, 당의 현종(玄宗)이 4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청대 강희제에 이르러 일거에 61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조부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서인지 즉위 60년이 되자 아들 가경제(嘉慶帝)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제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군국(軍國)의 중요한 사무나 인사 행정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주재하면서 4년을 더 살았으니 제위를 이은 가경제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그러니 실은 64년 간 정사를 본 셈이며, 중국 역사상 제일 오래 제위에 있었던 황제라 할 수 있다. 그것도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초기 수년  간은 직접 정사에 나설 수도 없었으나, 건륭제는 25세에 즉위하여 제위기간 온전히 직접 천자로서 군림했다. 또 강희제가 68세에 죽었지만, 건륭제는 88세의 장수를 누렸으니 강희제보다 훨씬 오랜 동안 실질적으로 재위한 셈이다.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십전노인(十全老人)

오늘날의 중국 서쪽의 위구르, 남쪽으로 티베트가 각각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들 지역이 중국의 판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실은 그렇게 오래지 않다. 강희∙옹정제 때부터 이곳은 청조 최대의 관심지역으로, 특히 서몽골부가 천산북로 근처에 중가르 왕국을 세운 이후, 청조는 이들을 정복하고자 했다. 청과 중가르 왕국과는 옹정제 때부터 일단 평화가 유지되고 있긴 하였으나, 청은 틈틈이 공격의 기회만을 보고 있었다. 1754년에 중가르에 내분이 일고, 그 곳의 유력한 수령, 아무르사나가 청에 망명하여 오자. 건륭제는 이틈을 타 중가르를 차지하고자 그 이듬해에 몽고군, 만주군 각각 2만 5천여 군사를 이끌고 아무르사나를 선두로 세워 중가르 왕국을 침공했다. 내분으로 국력이 분열되어 있던 중가르는 청군의 침공을 100여일 만에 청에 복속되어, 천산북로가 완전히 중국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천산 남로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회족(위구르)이 중가르부의 압력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운동을 펴자, 청은 1758년에 이 지역도 무력으로 토벌하여 복속했다. 이리하여 건륭제 시대에 천산북로와 남로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 비로소 청의 영토가 되었다. 건륭제는 이 지역을 새로 개척하였다는 의미로 신장(新疆)이라 명명하고 이리(伊犁) 장군을 두어 통치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된 것이다.

건륭제의 영토 확장에 대하여는 그가 만년, 81세에 지었다고 하는『십전기(十全記)』가 잘 말해주고 있다. 『십전기』는 일생 동안 10회에 걸쳐 대 전쟁을 일으키고, 10회 모두 승리하였음을 득의양양하게 쓴 글이다. 금천(사천성 서북부 대도하 상류 지역) 두 차례(1747-1749, 1771-1774), 중가르(천산북로 지역) 두 차례(1754-1775, 1757), 위구르(천산남로 지역, 1758), 미얀마(1765-69), 타이완(1786), 베트남(1788-1789), 네팔 두 차례(1790-92) 등 10회 걸쳐 외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모두 합쳐 건륭제는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하여 과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 원정은 내용상 모두가 빛나는 전쟁만은 아니었다. 명분이 불확실한 전쟁도 있었고, 별 소득 없이 인명만 손실하고 많은 군사비를 소모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미 군대가 많이 부패한 상태로, 전쟁의 참가는 군인들에게 돈벌이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는 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출병기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는 풍조가 만연되었고, 이로 인해 막대한 군사비가 소모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국고가 많이 탕진되고 백성의 부담이 늘어만 갔다. 또한 대군이 통과하거나 주둔하는 지방의 사람들은 군인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물자 보급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건륭제의 외정으로 말미암아 청조는 최대의 판도를 가지게  되었다. 1759년 중국은 무려 1150만㎢(현재 962만㎢)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에 국경선은 대개 오늘날 몽골인민공화국 전체와 러시아령 남부 지역 및 연해주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외에 조선, 베트남, 유구, 미얀마 등을 속국으로 하고 있었으니, 그 위세는 실로 동아시아, 내륙아시아, 동남아시아에까지 당당히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정책

강희제나 옹정제도 그러했지만 건륭제 역시 선왕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호학(好學)의 군주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학문을 좋아했다. 6살 때 이미 서예를 하기 시작한 황자 홍력(弘曆), 미래의 건륭제는 일찍부터 학문에 소질을 보였다. 한림원의 학자들이 그의 공부를 보살폈는데, 그는 12살에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할아버지인 강희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여러 학자를 동원하여 대 편찬사업을 일으켰다. 건륭 시대에 편찬된 책으로는『명사(明史)』를 비롯하여『大淸一統志』,『四庫全書』『大淸會典(대청회전)』등 여러 서적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단연 『사고전서』편찬이다. 이것은 1772년부터 360명의 학자들이 중국 고래의 이름난 작품을 검토하여 교정한 후 집대성한 것으로, 3천5백 종에 8만 권에 이르는 방대한 총서이다. 이 총서는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분야로 나뉘어져 있는데, 너무도 방대한 분량이었기에 출판이 불가능한 관계로 1만 5천 명의 서기관들이 필사를 책임 맡아 1782년에 필사본 7부의 사고전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궁중 및 이궁(離宮)에 비치하였다가 후에 강남지방 3개소에도 비치하여 학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중국에 어떤 서적이 있는지, 무엇을 연구하면 좋을지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이것은 중국문명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 전서』의 편찬은 순수한 학문 장려의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사상통제의 일환으로, 그 당시 현존하던 반만 사상의 서적을 가려내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금서목록이 발표되고, 문자의 옥 등 필화사건도 이전시대에 비하여 현저히 증대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상이나 학문이 발전하는 데 한계를 지니게 되었고, 사고전서 편찬이 대규모의 문화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에 비유하여 문화파괴의 행위로 혹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고증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당시 이러한 사상통제의 영향으로, 그것은 초기 경세제민의 성격에서 일탈하여 비정치적인 면, 곧 문헌학, 전거학(典據學)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건륭제의 궁정생활

건륭제는 대규모의 원정과 더불어 궁정생활도 사치스러웠다. 현재의 북경 고궁박물관에 가 보면 그 외모의 일부를 상상할 수 있듯이, 건륭제의 시기는 강희제나 옹정제 시대보다 궁궐 건물이 더 호화로웠다. 자금성을 여러 차례 손질했으며, 특히 황제와 황후들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정을 새롭게 꾸미거나 보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내정은 고급제품의 가구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건륭제는 학자이면서 예술가로서 서화 골동품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는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취미가 선임 황제들보다 각별했다. 그래서 자금성 남쪽에는 구월관 안에 만든 작업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그는 국내외 명품을 모으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끊임없이 소장품들을 늘려갔다. 그가 모은 수집품의 대부분은 현재 타이완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건륭제는 선대의 황제처럼 근면한 군주였다. 그는 사시사철 항상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정전인 건청궁에 나갔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보고가 들어오면 한밤중이라도 모두 직접 훑어보고 지시하였으며, 그 지시문이 완성될 때까지 몇 시간이 걸려도 옷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총명한 학자였던 그는 분주한 나날에도 정무를 보는 사이에 틈을 내어 매일 몇 수 씩 시를 지었는데, 그가 지은 시가 무려 10여만 수에 이른다고 한다. 건륭제는 17명의 황자와 10명의 황녀를 두었다. 그는 65세에 낳은 맨 막내 딸 화효(和孝) 공주를 특별히 귀여워했다. 그리고 화요공주가 6살 되었을 때, 그가 신임하던 화신의 10살 난 아들과 약혼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7명의 황자들은 대부분 아버지보다 먼저 앞서 사망하였기에, 건륭제 사망시 남아 있던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만큼 건륭제가 오래 장수한 탓이기도 하다.

1796년 건륭제의 제위기간이 마침내 60년에 이르렀다.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재위 61년의 기록을 깨트리지 않으려 제15황자인 옹념(顒琰)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가경제(嘉慶帝, 1795-1820)이다. 그러나 아무리 근면하고 영리한 건륭제일지라도 나이는 속일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 60세가 넘자 판단력이 흐려져 노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화신(和珅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총애한 데서 잘 나타났다. 화신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1769년 3등경거도위(三等輕車都尉)가 되었으며 ·3등시위(三等侍衛)가 된 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776년 군기대신(軍機大臣), 이어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어 큰 세력을 펴고 있었다. 그는 건륭 시기의 번영하는 시류를 타고,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모으고 횡포가 심하였는데, 이러한 그를 신임한 것은 건륭제의 큰 실책으로 지적되고 있다.

건륭제와 향비 

건륭제는 궁정의 많은 후궁 중에 향비를 특히 총애했다고 한다. 그녀는 위구르 지방 종교귀족인 허줘(和卓)가의 딸로,  이슬람교도였으며,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야루간드 지방을 지배하던 추장의 처였다. 그녀가 절세미인이라는 것은 북경의 궁정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가 이 지역을 침공할 때, 장군 조혜(兆惠)를 출정시키면서 위구르 추장의 처를 데려오도록 명했다. 위구르지방을 점령한 조혜는 그녀를 사로잡아 건륭제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22세(일설에는 26세)의 아릿다운 미녀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지니고 있었다. 절세미인을 얻은 건륭제는 무척 기뻐하며,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그녀의 중국 정식 명칭은 용비(容妃)이나,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고 해서 그녀를 흔히 향비(香妃)라 부른다. 

건륭제는 자금성 안에 이슬람식 궁궐을 지어 향비가 즐겁게 거처하도록 했다. 그녀가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을 때에는 신장 위구르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녀가 위구르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면서 황후나 다른 비빈들보다 그녀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는 궁정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하다. 황제가 그토록 애정을 가지고 사랑을 표현해도 그녀의 마음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오직 두고 온 남편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며 절대군주의 총애를 받아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위구르족을 점령한 황제를 칠 기회를 노리면서 늘 단도를 몸에 품고 다녔다고 전한다. 그 진위야 어찌되었든, 나이든 황제가 젊은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정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본 황태후는 몹시 불안했다. 황태후는 이방의 여인을 쫓아내거나 살해하여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건륭제가 반대했다.

궁정생활을 무척 힘들게 한 그녀는 결국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자금성 안에서 2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녀의 죽음에는 자살, 타살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일설에는 황제가 순행 차 궁궐을 비웠을 때, 황태후가 향비를 불러 자살을 명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건륭제가 급히 달려 왔으나 향비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이 때 주위에는 이상한 냄새가 온 공기를 진동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설에는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 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이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면서, 한편 향비는 위구르족을 정복한 세력에 저항한 위대한 여성으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그의 유해가 건륭제 능(裕陵) 안에 있는데, 저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카슈가르에도 향비묘가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무덤 두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며, 여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카슈카르 사람들은 카슈카르 사람들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허줘(和卓) 가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이 묘는 향비묘라기 보다는 허줘 가족묘라고 함이 맞는데,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은 위구르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향비에 관한 전설에 대하여 청조의 공식 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건륭제 곁에 이와 같은 이방인 미녀가 존재했다는 것만은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를 통해서 확실하다. 건륭 시기에 궁정에는 이탈리아 선교사이면서 중국에 서양화법을 전한 유명한 화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朗世寧)가 있었는데,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건륭제는 카스틸리오네에게 향비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는데, 그 중 서양복장을 한 모습, 무장한 모습, 2개의 그림을 그려 궁궐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카스틸리오네 작품으로, 투구를 쓰고 무장을 한 여성을 그린『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는 찬자(撰者) 불명의 ‘사략(事略)’이라는 글이 첨가되어 있다. 거기에 “향비는 위구르의 왕비로 자색이 뛰어난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내가 나, 그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향비라 불렀다. 혹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북경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위구르 지역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신장위구르을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건륭제와 향비가 함께 무장하고 말을 타고 있는 그림, 또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 등이 있는데 모두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그림을 보면 과연 향비가 건륭제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절을 지켰을까하는 의심이 간다. 베일에 가려 죽어간 미녀에 대하여 전설은 정절을 지킨 여인으로 미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건륭제의 만년과 청조 사양의 그림자

건륭제의 치세는 외정과 대 편찬사업만 보면 대단히 화려하게 보이지만, 실은 청조가 상승기로부터 쇠퇴기로 향하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쇠퇴기의 현상들이 아직 그다지 노골화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재정 면에서는 국고가 많이 탕진되었다. 건륭중기까지 여유를 보였던 국고가 말년이 되자 여유가 없어졌다. 그 최대 이유는 거듭된 외정과 잦은 지방 순행이었다. 여러 차례의 외정, 곧 십전 노인이라 칭하는 무공의 과시는 축적된 국고의 소모를 불러 일으켰다. 국고의 소모는 여러 차례의 지방 순행에서도 비롯되었다. 건륭제는 여행을 대단히 좋아한 군주였다. 건륭제는 곧잘 지방 순행에 나섰다. 재위기간에 모두 15차례나 수도를 떠나 각지로 행차했는데, 그 순행의 목적은 민정을 살핀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미녀를 찾아 나선 것이라 한다. 청조 후궁은 대개 만주족이거나 한인 팔기의 딸로, 그녀들은 북방 지방 출신이라서 매력적인 미인이 적었다고 한다. 건륭제의 황후는 만주족 명문 가족 출신이었지만 황제와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폐위되어 여승이 되었다고 하니, 건륭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강남의 미녀들과 자유분방한 시간을 가져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산동성의 성도 지난(濟南)에 이르렀을 때 내심을 알고 있던 환관이 어여쁜 소녀 4․50명을 데리고 와 천자를 배알하게 했을 때, 황제는 즉석에서 가무를 즐기며 그 중 가장 아름답고 마음에 든 미인만 남도록 했다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황후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건륭제는 특히 강남 지방 여행, 이른바 남순(南巡)을 6차례나 거듭했는데, 그 때마다 4-5개월에 걸친 대 여행이었다. 물론 강희제도 마찬가지로 6회에 걸쳐 남쪽 지방을 순행했지만, 강희제의 경우는 기간도 짧았을 뿐 아니라, 여행에 대한 부담을 지방민들에게 지우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건륭제는 오히려 국고를 소모하고, 순행 일행이 지나가거나 머문 지역의 사람들에게 부담을 크게 지웠기 때문에 민간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1770년에 나타난 경제적 위기로 그의 영광의 빛이 퇴색하고 있었다. 인구수가 식량의 증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한편, 건축물을 끊임없이 보수, 개축하는 황제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절제를 모르는 궁궐 안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 결코 만족할 줄 모르고 점점 더 많은 공급을 요구하는 국가 기관들, 군대의 원정 등은 국고를 점점 더 고갈시켜 갔다. 이런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부의 세제개혁과 농촌의 번영에 제동을 거는 정책은 소작농들이 빚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중국 대류의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동시에 행정부는 부정부패로 계속 타락해 갔다. 황제는 1775년부터 당당한 풍채를 지닌 만주족 출신의 젊은 장군 화신(和珅, 1750-1799)을 등용하고 그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는 우를 범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화신은 여러 고관직을 독점하면서 요직마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배치했다. 그의 독직행위와 행정이나 황제에게 행사하는 그의 영향력이 황제의 전제정치의 문제점들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결국 건륭제 사후 그는 탄핵되어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 때 몰수된 화신의 재산은 8억 냥이 넘었다고 한다. 이 액수는 건륭제 중반 무렵 재정 수입의 10년 분에 해당하는 액수라 하니 그가 얼마나 부정과 축재를 일삼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청
조가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명백히 들어내 보인 사건은 1796년에 일어난 백련교의 난이다. 이 난은 호북(湖北), 섬서(陝西), 사천(四川) 3개성의 경계가 접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하남(河南)과 감숙(甘肅) 지방에도 파급되어 전후 10년 간(1796-1805)에 걸쳐 격렬하게 일어난 민중반란인데, 이것은 건륭제 말기의 관료사회의 부패, 재정의 악화, 그리고 사회 모순의 격화로 인한 것으로, 이 때부터 청은 기울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때, 건륭제는 강희제, 옹정제 시대의 유산을 크게 탕진하고 청조 쇠퇴의 기운을 연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 때부터 중국의 역사는 사양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리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후 중국은 국내의 모순, 그리고 서양열강의 침입으로 더욱 진통을 겪는 역사가 이어지게 된다.   


전순동 : 충북대학교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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