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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0  통권 84호  필자 : 강진구  |  조회 : 3626   프린트   이메일 
[중국 영화]
중국인의 역사관이 드러나다
장이모우(張藝謨)감독의 영화 ‘영웅(英雄)’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영화의 탄생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영웅>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최고의 평가와 아울러 최악의 비평을 함께 받을 수 있는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장이모우 감독을 세계적인 영상예술가의 반열에 들게 만들었던 이전의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梁>(1988)과 <국두菊豆>(1990), 그리고 <홍등紅燈>(1991)과 같이 화려한 색깔과 수려한 영상미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장이모우 감독의 독특한 작가주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아울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거기다 단일 서사를 추구해왔던 것이 장감독의 영화 스타일인지라 대작은 어려울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주인공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사랑이 복수와 연계되는 다층적 구조를 형성시킴으로서 대작다운 면모의 서사를 보여주었다는 칭찬을 아울러 받을만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극인 만큼 스케일만 컷을 뿐이지 와이어액션 연기(몸을 철사줄로 묶어서 공중에 들어올린 후 날라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가 너무 과잉되어 있고 그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폼나는 칼싸움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독한 비평도 만만치 않게 흘러나왔다. 이는 주인공 무사들을 너무 영웅화하려는 나머지 만화 같은 이미지만 산출 시켰다는 비판과 유사하다. 물위를 날아다니며 진검승부를 벌이는 검객들의 결투 장면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나라 군인들이 조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상징하는 서예학교를 향해 쏜 수 천발의 화살을 칼로 막아내는 장면이나 시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이 궁에 침입했을 때 단 두 명에 불과한 자객들의 칼에 볼링공 쓰러지듯 나자빠지는 수백명의 진나라 군인들의 모습이란 가히 만화적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어떤 이들은 중국무술 영화의 특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국은 오락을 위해 예술의 진정성을 유보하는 것이라는 평가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할 듯 싶다. 그러나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은 그의 예술관이 얼마나 잘 발휘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만 평가를 내릴 일이 아니다. 즉 미학적 관점에서 영화를 진단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중국의 전통의식과 문화가 고스란히 해석되는 텍스트로서 이해될 때 영화 <영웅>은 새롭게 논의할 수 있는 가치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21세기에 읽는 중국의 문화관이며 역사관이라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며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진나라 왕 영정(진시황제)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객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떤 사람도 백 보 이하로는 가까이 오는 것을 막고 있다. 1만명이 넘는 왕실의 호위 군사들은 항상 주변에서 왕을 보호하고 있는 만큼 그 어느 자객들도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 왕의 암살기도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던 장천(견자단 분)과 비설(장만옥 분), 그리고 파검(양조위)을 죽이고 왕께 충성을 맹세하는 무명(이연걸 분)이란 무사가 등장한다. 그는 비록 하급관리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무술로 왕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왕은 자신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을 물리친 무명의 무용담을 들으며 호감을 갖게 되고 끝내 자신 발 앞인 십보 까지 그를 다가오게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모든 무용담은 왕을 죽이기 위해 그가 꾸미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 실제의 결투를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왕과 신하들을 속이고 신임을 얻으려는 술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최대 백미이자 역사가들의 비판적인 눈에 최대 오점으로 비춰지는 마지막 대목은 무명이 진시황제를 죽일 수 있었지만 나라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그를 살려두고 자신은 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진시황제의 명령에 의해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관객의 예측을 뛰어 넘는 주인공 자객들의 행동은 뜻밖에도 일반 오락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생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지닌 사극인 까닭에 사실성 여부도 중요하겠지만 그 보다는 중국인의 문화의식이 드러나고 있고 또한 중국 최초의 통일이라는 역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 만큼 감독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문(文)과 무(武)의 근원을 하나로 보는 단일주의적 문화관부터 살펴볼 일이다.  조나라의 서예학교를 공격하는 진나라의 군대와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와중에도 대담하게 계속 필법을 수련하는 노스승과 수련생들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문(文)과 무(武)와의 갈등과 대립으로 읽혀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진시황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서 학문의 다양성과 전통성을 파괴하고 자기중심적인 사상의 통합을 꾀했던 만큼 무력으로 한 나라의 학문을 제압하려는 모습을 영화가 보여준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영화는 서예 필법을 통해 예술과 학문의 세계를 보존하려는 선생과 학생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이를 밖에서 지켜주는 검객들의 놀라운 칼 놀림을 전개시킴으로써 武와 文의 세계를 결코 대립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우리는 화살이 교실의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가운데서 행한 학자의 언행에서 중국의 전통적 문예사상(文藝思想)을 엿볼 수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 진나라가 우리의 도시를 파괴하고 우리 나라를 멸망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우리의 글씨를 죽일 수는 없다! 여러분의 정신은 여러분 손에 들려 있는 붓처럼 꼿꼿해야 한다.”

비록 진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고 말았지만 조나라 선비들의 이 같은 모습은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는 중국 문예 전통의 대한 자부심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점은 武와 文의 뿌리를 한가지로 보는 대목이다. 조나라 서예학교에서 파검이란 자객은 서예필법을 통해 검법을 수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최후의 자객인 무명은 진시황제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황제를 죽이려했던 파검의 훈련 비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검(劍)이란 글자를 쓰는 방법을 열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파검’에게 스무번 째 방법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서예와 검술 모두 팔목과 가슴속의 기(氣)에 달려 있습니다. 스무번 째 필법은‘파검’의 검술이 지닌 비밀을 담고 있었습니다.” 

서예와 검술의 성공 여부를 기(氣)에 두는 것은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된다는 단일주의적인 사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전쟁보다는 불의(不義)한 평화가 낫다(?)

영화 <영웅>의 가장 큰 논란의 중심에는 진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피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들어가서는 끝내 돌아서고 마는 무명의 말과 행동에 있다 할 것이다.

“파검은 오직 폐하만이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도 천하통일을 위하여 제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통은 모든 백성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죠. 조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대한 증오를 버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증오가 사라질 겁니다.”

이 대사는 왕이 행한 살육을 용서하는 뜻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다수의 평안을 위해 소수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상이다. 고만 고만한 작은아이들끼리 끝나지 않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모두 주먹 큰 놈 밑으로 들어가서 맘 편하게 사는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내포된 것이다. 왕을 제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왕을 격려하고 돌아서는 자객의 행동은 결국 역사는 큰 뜻을 이루려는 영웅을 기억할 뿐이며 그 때문에 희생된 개인에 대한 기억을 역사는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진시황제의 역사가 말해주듯 전제군주의 독단과 횡포라는 부정적 사례가 되고 말았다. 천하통일이라는 대과업을 위해서라면 그간 흘린 수많은 사람의 흘린 피는 그냥 지나칠 수 있다는 얘기다. 진시황제 이후 동양의 수많은 군주들은 천하통일과 같은 나라의 대업을 주창하고 나설 때마다 개개인의 희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전제군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영웅>의 이같은 역사의식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첫째, 성경의 영웅은 영화 속의 영웅과는 다르다. 성경의 위대한 영웅적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역할과는 거리가 먼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는 말씀은 성경적 영웅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각별하다는 점에서 영화 <영웅>에 나타난 인간관은 성경과는 사뭇 다르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2-14)

영화 <영웅>을 보면서 중국에 기독교 교리를 전한 천주실의(天主實義)의 저자 마테오 리치가 떠올랐다. 중국 황실에 기독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가 중국 선교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해도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중국식 영웅주의로 바라볼 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형틀에 매달려 죽을 수 있는지 중국인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인들은 영화 <영웅>을 보면서 어떤 영웅을 머리 속에 떠올릴지 사뭇 궁금하기만 하다. 


강진구 / 영화평론가,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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