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역사상 여성들이 국정에 간섭한 사례는 적지 않다. 한 고조의 황후인 여후,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일시적이나마 ‘주(周)’라는 나라를 세운 측천무후, 측천무후가 죽은 이후 중종이 복위했을 때 중종을 독살한 위후 등 국가의 국정을 장악하고 농단한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미모와 권력을 겸비하고 황제와 나라를 움직이며 중국근대사를 주름잡은 서태후를 우리는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궁성에 들어온 이후 48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 근대의 거센 물결 속에서 영화와 치욕을 함께 안고 7억의 민족 위에 군림했던 중국사상 최후의 여걸이요, 여제(女帝)인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친 섭정으로 청조의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궁궐로의 진출-무명소녀가 제비(帝妃)가 되다
만주족 출신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성이 예허나라(葉赫那拉)씨로, 1835년(道光 15년)에 안훼이(安徽)성에서 하급관리 혜징(惠徵)의 딸로 때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난아(蘭兒)이다. 그녀에게는 두 오라비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여동생은 이름이 용아(蓉兒)로, 청의 황제 광서제(光緖帝)는 바로 용아의 아들이다. 서태후는 본래 함풍제의 황후로, 정식으로는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이나 우리에게는 서태후(西太后)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태후가 3살 때, 관리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어려운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강소(江蘇)성의 지현(知縣, 현의 우두머리)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여 나가기는 했으나 자식들을 교육시킬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서태후는 곁에서 보고 듣기만 해도 글자를 터득할 만큼 영리하고 똑똑하였다.
1851년, 갓 즉위한 문종 함풍제(咸豊帝, 1851~1861)가 전국에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다. 후궁을 모집한다는 영이었다. 가난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서태후는 여동생 용아(蓉兒)와 함께 여기에 응모하러 배를 타고 북경으로 갔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방년 17세, 꽃다운 소녀였다. 미모가 출중한 그녀는 거뜬히 발탁되어 자금성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참으로 미인이었다. 물론 현존하는 그녀 사진은 70세 전후의 것이라 소녀 시절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얼굴이나 몸매에 기품과 위용이 있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녀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그녀는 재주도 많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시서에 능통하며, 중국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재색(才色)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총명은 일찍이 함풍제의 눈을 사로잡아 황제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그녀는 재색을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구슬이 은쟁반을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는데, 강남 민요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솜씨에 황제가 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혹자는 황제의 측근에게 선물을 보내어 황제에게 접근하였다고도 말하나, 사람들의 넋을 빼앗아 신선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할 정도로 그녀의 노래 솜씨가 좋았다고 하니, 재간과 아름다운 미모와 음악적 재능은 호색의 황제를 충분히 사로잡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함풍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서태후는 1856년에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10대 황제인 동치제이다. 사내아이를 출산하고 난 뒤 그녀는 비가 되고 그 다음에 귀비에 올라 신분이 상승되었다. 당시 황후는 딸 하나만을 낳고 아들이 없었다. 물론 아들을 낳기는 하였으나, 이름도 짓기 전에 죽어버렸다. 그러므로 황제의 아들을 낳은 서태후는 어깨를 으슥하며 월권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주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노 재상인 숙순(肅淳)은 서태후의 이러한 월권과 방종함을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폐하도록 권했고, 황제도 거기에 동조하였으나, 그녀가 황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황제도 그녀를 쉽사리 폐비시키지 못하였다. 서태후는 궁정 내의 신분 변화에 따라 의귀비(懿貴妃),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효흠황후(孝欽皇后, 시호) 등으로 불렸는데, 후세에 서태후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쿠테타와 수렴청정
당시 중국은 안으로 태평천국의 난(1859~1864)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아편전쟁(1840~1842)에 이어 애로우호 전쟁(1856~1860)이 일어나 내우외환이 그날이 없었다. 애로우호 전쟁으로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해 들어오자, 황제는 동생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북경에 남아 군기대신으로 외교 교섭에 나서게 하고, 자신은 후비와 자식을 데리고 난리를 피하여 열하(熱河, 지금의 河北省 承德)에 있는 이궁(피서산장)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열하에서 피난하고 있던 함풍제는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지쳐 그 곳에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사실 함풍제는 피난하기 전부터 여자와의 관계가 너무 지나쳐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는 열하의 이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병상에 눕게 되고, 병세가 악화되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함풍제에 이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6살 난 그의 아들, 목종(穆宗) 동치제(同治帝, 1861~1874))였다. 새로 즉위한 동치제는 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함풍제의 황후 자안태후(慈安太后)는 자금성 내 동편의 저수궁(鍾粹宮)에, 자신의 생모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는 자금성 서편의 저수궁(儲秀宮)에 거처를 두었는데, 처소의 위치에 따라 사람들은 전자를 동태후(東太后), 후자를 서태후(西太后)라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태후는 자희황태후가 공식적인 칭호인 것이다. 동치제가 어려서 즉위하였기에 동태후와 서태후 두 사람이 동치제의 정치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그렇지만 지시를 내리는 쪽은 주로 서태후였다.
그런데 당시 실권은 선제의 신임을 받으며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 단화의 동생 숙순(肅順) 등이 쥐고 있었다. 서태후는 숙순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그녀는 거사를 위해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을 끌여들였다. 혁흔은 함풍제 때 신임을 받지 못한 데다가 새 황제가 즉위했어도 숙순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밀려나 있었기에 그와 공모하여 숙순 일당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서태후는 혁흔과 함께 숙순을 비롯한 3인에 대하여 황제에게 참소했다. 재원․단화․숙순 등이 황태후를 윽박지르고 못살게 굴며 실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사를 그릇치고 있다고 고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숙순 등 세 사람은 6살 된 황제에 의해 대역죄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숙순은 머리․몸․팔․다리를 토막쳐 죽이는 극형인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재원은 자결하도록 하였고, 단화는 사지를 묶어 놓고 창호지에 물을 축여 얼굴을 덮은 후 엎어 질식시켜 죽였다. 쿠데타에 의해 서태후는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는데,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함풍정변(咸豊政變)’이라 한다. 그런데 정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보인 서태후의 잔인성은 그 후의 궤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서태후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난 후, 황제의 즉위식이 다시 거행되었다. 연호도 ‘기상(祺祥)’에서 ‘동치(同治)’로 새로 정하였다. 동치는 동심치리(同心治理)라는 뜻으로 동태후, 서태후 두 사람이 합세하여 정치를 한다는 뜻이라 한다. 이리하여 서태후는 수렴정치를 실시하게 되었고,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과 함께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다. 서태후와 혁흔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한 후에 부각된 이홍장, 증국번 등의 한인들을 요직에 임명하여 정치를 안정시켜나갔다. 또한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원만히 잘 해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서태후는 권력을 점차 개인적인 목적에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형제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과거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요직에 앉히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애인이었던 영록, 환관인 안득해(安得解), 이연영(李蓮英) 등에게도 요직을 주는 등 그녀는 실권을 마구 자행했다.
동치제가 16세가 되던 1871년, 황제는 황후를 간택하여 황제 자신이 친정하고자 했다. 혼례가 있기 전에, 동태후는 시랑(侍郞) 숭기(崇綺)의 딸을 황후로 추천했다. 이에 반하여 서태후는 시랑 봉수(鳳秀)의 딸을 추천했다. 사람들은 당연이 서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동치제가 택할 줄로 알았고, 서태후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는 동태후가 추천한 숭기의 딸을 택하였다. 서태후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게 되었고 자존심도 상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태후와 서태후 사이에는 은근히 대립이 격화되어 갔다. 1872년(동치 12년) 9월, 혼례를 치른 후 동치제는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년 여 지난 후, 황제는 중병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색을 너무 탐하였기 때문에 심한 매독에 걸려 죽었다고도 하고,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전한다. 2달 후에는 황후인 혜비도 급사하고 말았다.
무술정변과 광서제의 유폐
동치제가 자손이 없이 죽자, 누가 황제가 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이 때에 공친왕 혁흔과 서태후가 각각 후보를 내었다. 혁흔이 추천한 인물은 원칙에 입각하여 함풍제의 큰 형 혁위(奕緯)의 손자, 18세 된 부륜(溥倫)이었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에 반대하고 원칙을 무시한 채, 순친왕(醇親王 : 함풍제의 동생) 혁현의 둘째 아들이며, 자기 여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4살 난 어린이 재첨(載湉)을 지명하였다. 재첨의 친어머니가 서태후의 여동생이었고, 또 황제 나이가 4세이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서태후가 추천한 어린 재첨이 덕종(德宗, 1875~1908) 광서제(光緖帝)로 즉위했다. 서태후의 권력은 이미 강대해져 있었다. 그동안 서태후는 관계에 대두한 양무파와 보수파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여 청조 중앙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성장을 억누름과 동시에 양무파의 실력자인 이홍장을 신임하여 근대적인 무기를 확장하고 산업을 일으켜 열강에 많은 이권을 주면서 중화제국의 체면을 유지하여 나가려 했다.
어린 광서제를 즉위시킨 서태후는 생각대로 쉽게 정권을 거머쥐고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해군의 군비를 떼내어 이화원(頤和園)을 확장했다. 또한 예전 젊었을 때 정을 통해 오던 영록을 불러들여 옛정을 나누었다. 영록이 틈이 없어 입궁을 못하면 대신 환관 이연영과 결탁하여 내실로 남자를 불러들였으며, 밤이면 언제나 다른 남자가 그녀의 밤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광서제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에 들어간 서태후에게는 함께 쿠테타를 일으킨 혁흔이나 과거 함께 수렴청정을 하던 동태후도 모두 방해자가 되었는데, 1880년, 동태후는 서태후가 준 떡을 받아먹고 급사하였다. 그 후 5년이 지난 뒤인 1885년에 군기대신이었던 혁흔이 실각되었다. 이유는 베트남을 둘러싸고 벌어진 청불전쟁에서 패배한 데에 대한 추궁이었다. 이제 청조의 정권은 명실상부 서태후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서태후는 어린 황제에게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광서제는 성장하여 결혼하고, 1889년 정월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서태후는 북경 서쪽 교외의 이화원에 은거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다. 겉으로만 은거일 뿐 서태후가 계속 실권을 쥐고 있었다. 궁정 안에 이연영을 비롯한 자기 사람들을 통해 황제의 동정을 낱낱이 살피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서태후는 전쟁 반대의 입장에 있었으나, 광서제는 서태후의 뜻을 어기고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전쟁에서 청은 일본에 패배하고 말았는데, 해군 증강에 쓸 막대한 자금을 서태후가 이화원 개축에 유용한 것도 패인 중 하나라고 사람들은 지적한다.
한편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새로운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이런 위기를 틈타 관료들 가운데에는 ‘변법유신파(變法維新派)’라는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어 갔다. 강유위, 양개초, 담사동 등이 변법유신운동의 중심인물로, 그들은 제도국 설치, 과거제 폐지, 신식 학교 설치, 상공업 육성, 자유로운 의복제도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중국에 입헌군주국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1898년 광서제는 유신파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6월 11일에 새로운 국책인 ‘명정국시(明定國是)’를 발표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해가 무술년이었기 때문에 이 개혁을 ‘무술변법’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개혁에 대해 서태후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이홍장을 비롯하여 대관료들과 손을 잡고 수구파를 형성하고, 호시탐탐 유신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당시 개혁을 둘러싸고 국내외적인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으나, 개혁과 수구의 대립은 결국 광서제와 서태후의 권력다툼,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서태후는 궁정에 남겨둔 자기 사람들을 통해 정세를 간파한 뒤, 그녀의 심복인 영록을 임시직예총독에 임명하고 북경의 군사권을 장악하여 개혁파 세력을 제거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변법유신파 지도자인 담사동은 신식 군대 사령관인 원세개를 찾아가 영록을 죽이고 서태후가 있는 이화원을 포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진 원세개는 변법파를 배신하고 도리어 이 사실을 영록에게 밀고하고, 영록은 이화원에 있는 서태후에게 고하였다. 원세개의 배신은 유신파에게 치명적인 일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서태후는 분이 치밀어 올라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9월 21일 서태후는 이화원에서 자금성으로 급히 들어가 취침중인 광서제에게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지금부터 내가 섭정을 하겠다!’고 수렴정치를 선언하고 황제를 궁전 안의 잉타이(瀛臺)에 유폐시켰다. 천자를 유폐시킨다는 것은 그녀가 실질적으로 황제나 다름없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서태후가 황제의 명의로 정사를 돌보았다. 강유위․양개초 등은 정변 난국에 영국 일본 등 외국 공사관원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렇지만 담사동을 비롯하여 ‘무술 육군자’( 담사동․강광인․양심수․양예․임육․유광제)라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9월 28일 사형되고, 기타 변법파에 가담한 많은 관료들이 추방되거나 체포되었다. 이 해가 무술년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무술정변’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개혁 정치는 100여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를 ‘백일유신’이라고도 한다. 무술정변 이후 서태후는 세 번째 수렴정치에 들어갔다. 과거에는 황제가 어리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번에는 황제를 유폐시키고 수렴정치에 들어간 것이다.
의화단 사건과 서태후
이 때에 일반 대중들 사이에는 열강의 중국 침탈에 대하여 강렬히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대도회, 팔괘교, 의화권 등 여러 비밀결사가 출현하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산동성에서 일어난 ‘의화단(義和團)의 사건(1899~1901)’이다. 의화단은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로, 권법(拳法)과 봉술(棒術)을 익히며 수련을 쌓으며 총탄도 피할 수 있다는 미신적인 신통력을 믿고,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조를 돕고 서양을 멸망시킴)’을 내걸고 반제국주의 배외운동을 추진한 비밀결사이다. 1899년 산동성에서 교회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며 난을 일으킨 의화단은 1900년 6월 북경으로 들어가 교회, 병원, 철도, 통신 등 서양건물 및 시설을 파괴하고, 외국인을 살해하며,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며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
의화단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북경의 거리는 바야흐로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수라장이 되었다. 독일 공사와 일본의 공사관 직원이 북경 거리에서 살해되고, 외국공사관이 포위를 당하였다. 의화단의 사건은 처음에는 반기독교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세력이 확대하면서 배외․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정부차원에서 할 수 없는 배외․반제국주의 운동을 일반 민중들이 담당하여 벌인 셈이다. 공사관이 습격을 당하고 외국인이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나자, 열강 8개국(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미국 이탈리아)은 공동 출병하여 무력으로 맞서며 청조에 압력을 가했다. 은근히 의화단을 비호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외세를 배격하고자 하였던 보수파 거두 서태후는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1901). 연합군은 의화단과 치열한 전투 끝에 천진을 점령하고 이어 북경으로 진격했다. 북경을 점령한 연합군은 자금성을 비롯하여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 등 중요한 곳을 침탈하고 귀중한 보물과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이 해 8월,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와 후비들을 데리고 자금성을 탈출했다. 서태후는 자금성을 빠져 나가면서 토굴 속에 감금되어 있던 진비(珍妃)를 영수궁(寧壽宮)의 우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진비는 광서제가 총애하던 후궁으로, 광서제가 유폐될 때 광서제를 위해 서태후에게 말대꾸한 것이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 감금되었던 것이다. 서태후는 진비를 데리고 광서제와 함께 도피하려는데, 진비가 “황제께서는 몽진하실 일이 아니라 북경에 남아서 강화를 체결함이 옳을 듯 합니다”라고 광서제에게 간한 것이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잔인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서태후는 머리를 한족 사람처럼 바꾸고 수수한 옷차림에 눈물을 흘리면서 자금성을 빠져 나가 타이웬(太原)을 거쳐 시안(西安)으로 도망했다.
북경은 주인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되어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의화단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북경 근교에서 저항했으나 곧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이후 남은 것은 사후 처리 문제뿐이었는데, 화의교섭 책임을 맡은 이홍장은 1901년 9월, 시안에 있는 서태후의 뜻을 타전으로 지시를 받아, 연합국이 제시한 ‘신축조약’(12개 조항)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4억 5천만 냥의 막대한 배상금 지불, 북경에 외국군대 주둔권 인정 등을 골자로 한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이로써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국가의 쇠망을 촉진시키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국토의 반식민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서태후의 죽음
신축조약이 체결된 후 연합국이 베이징에서 철수하자, 시안에 약 1년 여 머물러 있던 서태후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 뒤 서태후는 성향이 일전하여 은연중 서양물이 들어가게 되었고, 정치에서도 입헌제 준비를 서둘렀다. 과거 변법파의 개혁안을 본떠 입헌정치로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청조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발포하여 입헌체제로의 이행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것은 손문 등이 일본 도쿄에서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1905)하는 등 혁명의 기운이 국내외에서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미 때 늦은 개혁이었다. 1908년 봄, 광서제가 병석에 눕게 되었고, 병세 또한 점차 악화되어 갔다. 황제의 병세가 회복될 기미는 없고 도리어 죽음이 임박하게 되자, 서태후는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 광서제의 동생)의 큰아들 푸이(溥儀)를 다음 황제로 지명했다. 그가 광서제를 이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1908~1911)로, 즉위할 때 그의 나이 겨우 3살에 불과했다. 서태후가 장차 제4차 수렴정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08년 10월 21일 광서제가 운명하고, 바로 하루 지나 그 이튿날 오후 5시 서태후 역시 세상의 영화와 치욕을 함께 안고 74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서제는 서태후가 병상에 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심코 웃음을 지었는데, 서태후가 이에 격노하여 ‘황제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광서제가 죽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서태후가 독살을 지시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청말 정치권력을 휘두르며 많은 음모와 비행을 저지른 서태후가 임종시 아무런 일화도 남기지 않고 죽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녀는 임종시 머리맡에 모여 앉은 대신들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여자에게 권력을 잡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게 되었다는 데에 대한 반성에서일까, 아니면 자기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쥔 여성이 출현해서는 안 된다는 데 서일까,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려 한다. 청조는 서태후의 손에서 날로 부패되어 가다가 그녀가 죽은 지 3년 만에 혁명에 의해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사가들은 그녀를 가리켜 청을 망하게 한 호정(狐精)이라고까지 혹평을 하고 있지만, 서태후는 48년이란 세월에 걸쳐 7억의 민족 위에 군림했던 사상 최후의 여제(女帝)인 셈이다. 그녀는 입궁할 때 용머리에 앉은 봉황을 꿈꾸었다고 하듯이, 그녀는 마침내 용을 제치고 큰 봉황이 되었다고나 할까.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