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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쇼핑
2003.10.20  통권 84호  필자 : 청런잉  |  조회 : 3320   프린트   이메일 
[내가 만난 하나님]
실직의 늪에서 헤어나와 소망 가운데로 나아오다

며칠 전 갑자기 인신 밀수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던 친구의 전화가 생각났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데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실직과 이혼

나는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석사과정을 졸업한 이래 여러 차례 실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문사 두 곳과 회사 두 곳에서 잠깐 근무한 것 외에, 4년 10개월 동안 장기실업자가 되었다. 내 처지를 생각할 때면 늘 ‘운이 나쁘다’ 혹은 ‘팔자가 안 좋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몇 년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다. 6백 여 통의 구직편지를 썼고, 정부보조 또는 자비로 4 차례나 취업훈련과정을 이수했다. 여기에는 소프트웨어 시스템 기사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전혀 없었다.  나의 정신상태와 경제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노르웨이 사람인 아내는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라며 나를 내쫓았다. 크리스마스날에는 아이에게 선물 사줄 돈조차 없었다. 컵 라면으로 장기간 연명하다가 결국 위염이 생겼고, 차디찬 방바닥에서 자는 바람에 어깨에 염증이 생겼다. 추운 겨울 한밤중에는 아내에게 쫓겨나 간이기차역 플랫폼에서 넘어져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학생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그녀의 욕설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갈 때면, 일부러 문을 열어 놓고 복도의 이웃들이 들을 만큼 울부짖어 동정을 얻곤 했다. 결국 우리 가정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나는 돈이 없었기에 여기서 몇 주, 저기서 몇 개월 이런 식으로 사방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간신히 다른 도시에서 집을 구했는데, 그곳에 세든 사람들이 대부분 크로아티아 난민이거나 아니면 전과자나 정신병원에 입원한 병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근에는 넓은 농경지와 정신병원 뿐이라, 평상시에는 산책 나온 정신병자 외에 ‘정상인’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웠다. 

어느 날 인근 건물에 살고 있던 중국동포 한 분이 나를 방문하여 뜻밖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보는구나. 나보다 훨씬 멀쩡하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참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 며칠 후 한 노르웨이 사람이 “그 사람은 2년 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얼마 전에 퇴원했소” 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나는 하루 종일 15평 남짓한 집안에 틀어박혀 다시는 다른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남아있던 돈을 다 털어 식료품을 사들고, 아내와 두 아이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모처럼 집을 찾았다. 내가 사온 물건을 냉장고에 가득 채우고 있는데 아들이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아내가 달려와 내 얼굴을 할퀴고 욕설을 퍼부어 댔다. 수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두움 속에서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얼굴의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굴욕감은 점점 더해갔다. 예전에 화려했던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한때 중국에서 고소득층에 속했다. 베이징에 있는 외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내방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고위층인사를 위해 통역을 맡기도 했고, 각종 연회와 기자초청모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관리와 상업계 유명인사를 위해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 연회석상에서는 중국 고위관리 3명과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나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린 채 지난 세월을 반성하고 있었다. 미지불 청구서가 두껍게 쌓여 있고,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크리스마스 날 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 아내 말했던 것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대로 이 세상을 등져도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지난날의 영화   

과거 나는 나 자신의 능력만을 믿던 교만한 사람이었다. 소학교 시절, 학교는 천여 명의 학생 중 3명을 선발하여 베이징외국어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게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중의 하나였다. 학교 백일장 대회에 참가하면 항상 우수상을 독차지했고, 교장 선생님이 친히 교장실로 불러 표창하셨다.  그러나 소학교 4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때는 크게 비판을 받고, 고향에 내려가 방공호를 파는 등 노동을 했다. 그 후에는 베이징시 북부 근교의 목재공장에서 7년 동안 기계목공 일을 하였다. 1972년부터 나는 베이징영어방송 강좌를 청취하며 영어를 배웠다. 영어교사였던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도 있었다. 1977년 대학입학시험이 부활되었지만, 수학점수가 과락이 되어 불합격됐다. 1978년 외국어 전공시험에 재차 응시했다. 수학은 단지 참고점수로 반영되었고 내 영어점수는 베이징시에서 10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쓰추안(四川)대학 외국어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매우 총명하고 창조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노력한다면 성공은 반쯤 거머쥔 것이라 생각했다. 1982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회사에 입사하였다. 나의 첫 업무는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의 채무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회사는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뜻밖에도 내가 그 일을 순조롭게 처리했고 사장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 후 사장은 모든 출장과 협상 테이블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1985년 여름, 오스트레일리아 쿤슬란 주정부 무역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동시통역을 담당했다. 3주 동안 대표단을 데리고 4개 도시를 방문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계속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1993년 2월 나는 오슬로 대학을 졸업했다. 3월 귀국 직후 핀란드 노키아사에 입사하였다. 광케이블 부서에서 시장개발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회사는 중국인 직원에게 매우 이상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중국을 방문한 CEO가 회의실에서 핀란드 직원들과 외국 직원들을 모두 접견하였다. 그러나 중국인 직원들은 그대로 업무를 보게 하였다. 나는 회사의 중국인 직원에 대한 차별정책에 불만을 품고, 노르웨이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 생각으로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고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1995년 나는 노르웨이의 한 선박제조회사에서 굴착선 판매 업무를 하게 되었다. 1996년 봄 나는 중국인 고객을 모시고 남미로 가 배를 참관한 후, 다시 미국 휴스턴으로 날아가 협상을 벌였다. 3주 후 여러 차례의 협상과 몇 번의 고비 끝에 계약이 체결됐다. 계약에 서명하는 날 밤, 나는 자신을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장은 오슬로로부터 전화를 걸어와 축하해 주었다. 내 자신이 대단한 세일즈맨같이 여겨졌다. 비록 여러 해 전에 주님을 영접했지만 교회는 거의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만 믿으면 모든 기회를 창조해 낼 수 있고,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계약은 체결됐지만 정세가 돌변했다. 중국이 대만의 총통선거를 이유로 대만해역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자, 미국은행은 중국회사의 신용증서에 배서를 거부하였다. 게다가 중국정부는 전신환 사용을 제한했다. 결국 서명한 계약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했던 보너스는 몽땅 사라져버렸다. 처음으로 나는 내 자신의 무능함과 미약함에 좌절감을 느꼈다. 

딸 구조 이야기  

노르웨이에서 몇 차례 더 좌절을 겪은 후, 살아갈 용기마저 잃어버렸지만, 나는 차마 두 아이를 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문득 며칠 전 친구가 전화로 인신밀수로 쉽게 돈을 벌수가 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데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라는 생각에 내심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다음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머리 속에서는 극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 일은 위험이 매우 커서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내게 편지를 보내실 때마다 늘 계급투쟁 의식을 한시도 늦추지 말 것과 홍콩사람, 대만사람과는 절대 왕래하지 말 것 등을 신신 당부하셨다. 내가 이런 부도덕한 일을 하고 어떻게 어머니를 대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은 내 귀여운 자녀들을 통하여, 또 핀란드에 있는 친구의 격려 전화를 통하여 나를 위로해 주셨다. 눈으로 뒤덮인 길 위로 힘들게 유모차를 밀며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때면 나는 늘 아름답고 감동적인 찬송가 하나를 흥얼거렸다. 내가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곧이어 딸아이가 따라 불렀다. 비록 직업이 없어 사회보조금을 타서 생활하고 있지만, 딸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얼마 전 아내가 이 노래는 교회의 사모님이 우리들의 결혼문제를 화해시키기 위해 가르쳐준 노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이 노래를 거의 매일 불렀다. 이 노래는 춥고 어두운 밤중의 촛불처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아들은 집에 없었고, 딸아이와 아내만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NBC를 보았다. 아내는 옆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살이 조금 넘은 딸아이는 침실에서 문을 닫고 놀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큰소리로 “루이사” 하고 외치며 침실로 달려 들어갔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따라 들어갔다. 딸아이가 방바닥에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딸아이를 품에 안았고, 딸아이는 온 얼굴이 새빨개 진 채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아내는 “입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보세요” 라고 말했다. 손가락으로 딸아이의 입안을 더듬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구급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오히려 아주 침착하게 “다시 한번 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내 손가락을 딸아이의 입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어떤 물체가 만져졌다. 꺼내보니 1크로네 짜리 동전이었다. 동전 위쪽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딸아이는 “앙”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제야 숨을 한 번 돌렸다. 이 일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딸은 동전을 삼킨 후 그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설령 그 아이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응접실에 있었던 우리에게는 들릴 리가 없었다. TV 소리가 아주 컸고, 침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울증이 있던 아내가 그렇게 침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루시아를 구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 아내 역시 “나를 부르는 어떤 소리를 들었어요. 아주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어요. 빨리 가서 루시아를 살펴보라고 하더군요. 그 후 바로 루시아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그 소리는 아내가 어렸을 때 꿈속에서 들은 적이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 그 어떤 다른 답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쉽게 직업을 찾다

2000년 여름, 나는 북유럽 중국인 기독교회가 매년 한 차례 스웨덴에서 개최하는 하계수련회에 참가했다. 이것은 내가 9년 만에 처음 참가한 교회활동이었다. 영국에서 오신 천(陳)목사님과 미국의 요우(游)목사님, 리(李)장로님으로부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듣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수련회에 참여한 300여 명의 성도들로부터 격의 없는 따뜻한 배려를 받았다. 수련회 마지막 날, 옆 사람의 손을 잡고 큰소리로 찬송을 부를 때, 내 마음 속에는 거센 파도가 일어났다. 걸어 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하나님 안에서 한없는 안식이 느껴지자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저는 당신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내 생명을 다해 당신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후 나는 매일 저녁 성경을 읽고 기도하였다. 또 나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3주만에 나의 간구에 응답해 주셨다.

언젠가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 보조교사 구직편지를 보냈는데, 그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그 학교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1시간 후 면접을 보러오라는 상대방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학교는 인근의 작은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다시 택시를 바꿔 타야만 했다. 학교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약속시간보다 4-5분이 지난 후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오, 학교로부터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채용통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학교측은 출근 첫날부터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업무시간을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으로 변경해 주었으며. 또 나를 위해 정식교사 자리를 신청하였다.미국에 있는 중국인이라면 이것이 별일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중국인이 교수를 하고, 대학 학장을 하는 것은 전혀 뉴스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중국인이 주지사나 정부고위직에도 임명될 수 있다. 그러나 노르웨이 같은 국가에서는 택시 운전사와 청소부는 유색인종의 전통 직업이다. 유색인종이 초등학교 교장을 하는 학교는 하나도 없다. 어떤 석사 출신 이란인이 일할 곳을 찾지 못하여 여러 해 동안 택시 운전기사를 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3개월 후, 기적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11년 전, 나는 베이징에서 온 누님과 함께 회사를 하나 설립하고 수출입 무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부딪혀 우리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단 한 곳의 거래처도 생기지 않았고, 물론 한 건의 계약도 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지 3개월쯤 지났을 때 회사는 설립 11년 만에 첫 번째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신앙에 대해 더욱 강렬하게 추구하게 되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종교란 한 사회의 철학적 기초와 도덕규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의 발전과 낙후는 그 종교문화 속에서 답안을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국가 즉, OECD(경제협력발전기구)를 구성하고 있는 30여 개 국가들은 왜 거의가 기독교 국가일까? 민주주의와 평등의 관념은 왜 기타종교에서 일찍이 기원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정말 우연이란 말인가? 왜 대다수의 중국유학생들은 미국 혹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선택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기독교를 승인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강대국과 약소국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기껏해야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치국(治國)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과학기술과 지식이 중국을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빈궁하고 낙후되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다.

한국은 과거 20년 동안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배후엔 기독교의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 보잘 것 없던 외래 종교가 인구의 총 25%를 차지하는 종교로 변모했다. 심지어 한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10명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정치경제가 가장 안정된 국가는 가나이다. 그 나라는 아프리카 국가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이것 또한 우연의 일치인가? 건축물에 토대가 필요하듯 국가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올바른 종교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비뚤어진 종교나 사교가 출현할 것이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나는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갖은 방법을 시도해 봤다. 카네기로부터 안토니 로빈슨에 이르기까지 내 자신에게 유익할 것 같은 서적은 모두 가져다 읽었다. 기업관리에 관한 서적 또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울러 친구와 회사를 설립하여, 광고에서 수출입무역 자문까지 10여 가지의 경영방법을 도입하여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지 겨우 3주만에 나의 운명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가? 나로 하여금 주를 영접하도록 결심하게 한 미국의 저우주페이(周主培)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도 전류를 보지 못하나 사람들이 전기의 존재를 믿듯이, 우리들이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행한 기적은 볼 수 있다. 이러할진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이전에는 나와 아들과의 관계가 정말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자 관계가 크게 좋아졌다. 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음을 분명하게 이해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 아들은 반에서 가장 가난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 때문에 더 이상 고뇌하지 않는다. 그는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고, 동급생 중에 가장 축구를 잘 하여 내년에는 국제경기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딸아이는 막 5세가 되었을 때, 노르웨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딸아이(이 아이는 유치원에서 가장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가장 많이 타는 아이로 통했다)가 몇 백 명이나 되는 교회에서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상황에서 헌금위원으로 봉사하고 또 목사님과 함께 예배당 강단 앞에 서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속으로부터 구주 예수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넘쳐났다. 

아내는 업무계약이 만료되어 지금은 실직상태이다. 나는 그녀에게 “과거에 내가 실직상태로 있었을 때 당신은 내게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나, 나는 당신이 비록 실직해 있지만 당신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내가 교양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화 중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경험은 눈물과 고난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좀 더 일찍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살기도를 두 차례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친구여! 
만약 지금 당신이 절망과 실의에 빠져 
곤고함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교회로 달려가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되심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며, 
영원히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청런잉 / 중국성도
출처 / www.oc.org
번역 / 이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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