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나단 차오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초, 내가 극동방송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방송사 사장이 ‘홍콩의 중국선교 전문가 한 분이 한국에 왔는데 내일 아침 방송사 직원 채플에서 설교하기로 했으니 가서 모시고 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서대문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게스트 룸에 머물고 있는 그를 모시고 오는데 마침 박 대통령 시해 때문에 선포된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아 방송사 입구에는 공수단원들이 총에 착검을 하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계엄 하에 있고 한국에서는 방송사는 국가 중요시설로 되어 있어서 이러니 양해하여 달라’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 날 직원 채플에서 ‘삼자정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것은 1978년, 중국의 성도들이 아세아방송(현재 제주극동방송)으로 보내는 편지가 폭증하면서부터였는데 중국교회의 성격이나 중국의 기독교정책에 대해서는 이 모양으로 거의 백지상태였었다. 조나단 차오 목사는 그 날 저녁부터 며칠 동안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강당에서 중국선교에 대한 세미나를 했는데 세미나 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공인교회와 가정교회, 통일전선에 대한 이야기를 그 세미나에서 처음 들었다.
그 무렵 필자는 ‘중국선교 합시다!’하는 강연을 하러 다니느라고 바빴는데 조나단 차오 목사와 첫 만남 이후에는 강연의 내용이 ‘중국선교, 조심합시다!’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방송사 간부로부터 ‘중국선교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데 부채질을 해야 하는 당신이 왜 찬물을 끼얹느냐?’ 하는 비난을 받았다.
그 무렵에 중국관계의 일로 홍콩에 자주 갔는데 홍콩에 가면 빠지지 않고 그를 만났다. 한 번은 그가 강의를 하고 있는데 찾아갔더니 강의를 중단하고 학생들을 다 돌려보내고 만나준 일도 있었다.
조나단 차오 목사는 CCRC(중국교회 연구중심)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중국과 교회」에 실린 논문들을 모아 1983년 초에 「중공의 기독교정책〔中共對基督敎政策〕」을 발행하였다. 이 책은 그로부터 14년 뒤에 있을 홍콩의 중국반환을 염두에 두고 그 후에도 흔들림 없이 중국선교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책의 간자본(簡字本) 목차를 살펴보고서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할 것을 결심했다. 몇 명의 화교 크리스천들이 초역을 하고 필자가 교열을 하여 원고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무식한 놈이 막대기 들고 호랑이 잡으려 한 꼴이었다. 신의종(信義宗: 루터교), 범제강(梵帝綱: 바티칸) 이런 말이 뜻을 아는 사람이 없어 이 말은 한국어 원고에도 중국말 그대로 들어갔다. 이럴 때 큰 도움이 될 극동방송 중국어 책임자인 주지호(周志豪) 목사는 마침 휴가 중이었다. 그 때는 납 활자 뽑아 조판을 해서 활판으로 인쇄를 할 때였는데 인쇄기가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에 주 목사가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다. 주 목사로부터 그 뜻을 알고서 인쇄기를 정지시키고 활자를 바꿔 끼운 다음에 인쇄를 계속했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당시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고조되고 있을 때라 출판영업을 담당한 분이 이 책이 많이 나갈 줄 알고 무려 만 권을 찍었다. 그러나 판매는 복지미동(伏地微動)이었다. 기독교 계통 전문서적은 대개 같은 형편이지만 이 책의 경우는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찾는 이가 더 적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막은 이렇지만 「중공의 기독교정책」을 역간한 일은 중국선교에 대한 필자의 지식을 크게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나는 이 책이 중국선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전의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조나단 차오 목사가 이끌던 CCRC 가 중국선교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 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의 공산화 이전에는 CIM(중국내지선교회), 공산화 이후에는 CCRC가 중국선교의 큰 날개로 쓰임 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CCRC가 홍콩의 신계(新界)로 사무실을 옮긴 다음에 찾아간 일이 있는데 그 때 거기서 일하고 있던 왕쓰웨 목사가 영접해 주면서 ‘이 건물 한 구석에 차오 목사님 사택이 있는데 아주 좁은 공간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연구소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새롭게 존경을 하게 되요’라고 하였다. 그가 검박한 분이라는 것은 평소의 모습에서도 잘 알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상하이에서 교회 일을 많이 하던 재중동포 집사 한 분이 대만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다른 재중동포들을 통해 다급하게 들어왔는데 그 다음 주간에 발행된 CCRC의 뉴스레터를 보니 이 소식을 톱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필자와 가까운 미국시민권을 가진 목사 한 분이 동북지역에 자주 출입하면서 재중동포들을 자주 만나고 있었는데 하루는 조나단 차오 목사로부터 ‘당신 블랙 리스트에 올랐으니 조심하라’는 편지와 함께 그 목사를 비난하는 글이 실린 중국의 내부문건 사본이 특사배달로 날아왔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CCRC의 신속하고 폭넓은 정보 수집력에 놀랐다.
조나단 차오 목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3년 전인 2001년 4월 21일이었다. 그 얼마 전에 중국복음선교회에서 중국선교연합세미나를 하는데 논찬자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세미나 날자가 토요일이었는데 토요일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움직이기 어려운 날이라 일단 사양을 하고 어떤 분들이 강사로 나오느냐고 했더니 조나단 차오 목사를 비롯해서 몇 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변해서 응낙을 하고 나갔다. 오래간만에 반가운 만남을 가졌는데 예전보다 훨씬 젊어진 것 같았다.
공식적인 스피치들이 끝나고 마무리할 무렵에 조나단 차오 목사는 ‘나는 이십여 년 전에 중국에서 유서를 쓰고 중국선교에 착수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안전하게 지켜주셨다’고 하고서 ‘2007년은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간지 200년이 되는 해인데 그 감사예배를 천안문 광장에서 하도록 기도하자!’고 하였다. 2007년이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간 지 2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은 1807년 9월에 로버트 모리손이 마카오에 상륙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참석자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다같이 손을 위로 올리며 ‘중국선교 200년 대회를 천안문 광장에서!’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들은 그에 관한 소식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조나단 차오 목사는 교회는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늘 강조하였다(作爲先知身分衆敎會). 중국선교에 관한 한 조나단 차오 목사는 시대의 선지자 가운데 선지자였다. 그리고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중국선교의 큰 스승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중국선교에 필요한 지식을 배웠고 자세를 배웠고 정열을 배웠다. 그의 소천 소식을 듣고 놀라면서 옷깃을 여몄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그의 지도를 받고 감화를 입은 이들이 그가 강조한 대로 어지러운 환경에 슬기롭게 대처하며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중국선교에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유관지/ 발행인. 목양교회 담임목사, 호서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