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복음화와 선교의 기수인 조나단 차오 박사가 금년 1월 24일 암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코비나 시에서 소천하였다.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한다. 복음주의 선교운동에서 “중국선교”하면 제일 먼저 조나단 차오 박사(중국명: 趙天恩)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중국사회와 기독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와 이론을 서방 세계에 알린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타임지 북경 주재국장을 지낸 데이빗 아이크만 박사는 차오 박사를 중국교회에 가장 영향을 끼친 세 번 째 “외국인“(third foreigner)으로 언급하였고, 한 서양 선교학자는 그의 생애를 3중의 비전을 위하여 헌신한 지도자로 말하였다. 첫째는 중국의 소망으로 중국의 복음화를 중요한 비전으로 생각하였고, 둘째는 중국 교회의 왕국화(Kingdomization)를 중국의 기초로, 중국의 미래 비전으로 중국 문화의 기독교화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원대하고도 포괄적인 비전이었다. 개혁주의 신학으로 신학적 훈련을 받았기에 철저한 성경적 기독교의 변증가로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고 다음은 중국 기독교회의 성장과 발전 및 중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중국인이면서도 삼자(三自) 교회보다는 지하교회를 먼저 중시하고 중국 복음화를 이론과 행동으로 실천한 학자였다. 그래서 중국 정부로부터 많은 수난도 당하였다. 중국정부가 아마도 환영하지 않은 중국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조심스럽게 중국을 출입하면서 현장을 체크하고 중국인 친구들을 통하여 실제적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현장에 띄어 든 선교이론가였다.
차오의 생애와 사역
차오 박사는 1937년 중국 북동 지방에서 목회자인 찰스 청휘 차오 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차오 박사 역시 당시 중국에서는 지도자로 알려진 분이다. 그의 가족들은 중국의 공산화로 홍콩으로 이주한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동란이 일어난 해인 1950년도까지는 중국과 홍콩에서 성장하였고, 50년에서 58년도까지는 일본에서 자라면서 학교를 다녔다.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제네바 대학에서 성경과 고전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후일 이 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60년 대 중반에는 세계적인 개혁주의 신학교의 상징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수학하였다. 유명한 청교도 신앙인 월리암 펜이 설립한 펜실바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중국학을 전공, 198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는 좀 늦게 받은 셈이다. 그의 학위(Ph. D)논문은 1927년에서 1937년까지 중국에서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중국 개신교의 대응책을 주제로 하였다. 부인 역시 귀한 내조자로서 선교 훈련의 동역자 노릇을 하였고 경건 서적과 교육 분야에 많은 책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차오 박사는 70년대 후반 홍콩으로 돌아와서 복음주의 신학교인 중국신학대학원(Chin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을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그 학교에서 신학교육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학교를 중국 복음화의 전진 기지로 생각하고 중국국제선교회(China International Missions)를 설립하였다. 이 선교회를 설립한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선교원 설립 예배 때에 필자는 홍콩을 방문중이라 다행히 개원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인상적인 것은 차오 박사가 중국어로 말하는데, 역시 다른 중국인 친구가 광동어로 통역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중국어를 중국어로 통역하는 격이 되었다. 80년대 후반에는 대만으로 와서 도생신학교와 그리스도 대학을 설립, 학장으로 신학교육에 종사하면서도 이 학교를 중국 복음화의 훈련소로 삼았다. 이렇게 그는 신학교육과 선교훈련을 항상 겸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 기독교회의 연구가로서 1983년부터 2001년까지는 본토를 방문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중국 사회, 정치, 종교, 기독교에 대한 심층 있는 연구를 하였다. 특히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 육성과 가정교회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두꺼운 지하조직망을 형성하였다. 중국 연구자로서 중국교회연구소를 홍콩에, 1986년에는 대만에 중국인기독교연구소(The Institute of Chinese Christian Studies)를 설립하였다.
필자가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선교학 전공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공부할 때였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자 한국 학생들을 좋아한 그는 필자를 집으로 초청, 좋은 대화와 대접을 받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부인 레베카 쳉은 당시 예쁘고 얌전한 젊은 부인이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에서 60년대와 70년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자들은 차오 박사와 친구지간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91년 중국어문선교회가 번역하여 출간된 박사의 ?중국선교 핸드북?에 추천의 글을 쓴 김명혁 박사, 손봉호 박사, 이종윤 박사와 필자는 웨스트민스터 동문으로 차오 박사의 대표적 한국인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차오 박사는 학자, 신학교육자, 중국 선교 훈련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저서는 이미 언급한 ?중국선교 핸드북? 외에 중국 기독교에 대한 저서와 논문들은 너무 많아서 여기서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국제적인 선교대회에서 중국 관계의 글들은 대부분 차오 박사의 몫이거나 그의 글이 인용되지 않고는 중국을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철저히 중국 선교를 위하여 먼저 중국에 대한 필요한 이론과 정보 및 언어를 구사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교훈련원을 개설하면서 한국교회를 많이 의식하였다.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자기 훈련소에서 적어도 2년 동안의 중국어 훈련이 요구된다고 필자에게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1987년 중국 교회연구소를 설립하였고 후일 이것을 국제 중국 목회원(China Ministries International)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지부는 한국 필리핀, 미국, 호주 캐나다에도 세워졌다.
그가 저술한 대표적 저서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선교 핸드북? 외에 현대 중국교회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80년대 초기는 중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이중적 정책, 즉 개방과 억제의 공산당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순결해라?는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차오의 선교 사상
차오 박사는 어릴 때 공산당을 피하여 홍콩, 일본, 미국으로 간 “탈출자”여서 그런지 철저히 중국의 공인교회를 경계하고 대신 지하교회 혹은 가정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전략을 전개하고 중국 선교를 서방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중국 개방 후 너도나도 식의 경쟁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교회와 관계를 맺는데 대하여 조심스런 충고를 하였다. ?중국선교 핸드북?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열기를 경고 한다.
“중국의 교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한국교회의 관심은 대단히 열정적입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제가 보기에 그리 오래지 않아서 각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중국으로 대표들을 파송할 것이고, 또 중국의 3자애국운동위원회(三自愛國運動委員會)도 한국교회에 파견단을 보내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교섭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진정 3자애국운동위원회가 중국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외국을 방문하려는 주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발표문은 신빙성이 있습니까? 혹 그 과정에 가정(家庭)교회들의 권익이 희생되는 것은 아닙니까?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면 말씀에 착념하는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중국에서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서문에서)
차오 박사는 중국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중국의 가정교회라고 확신한 나머지 공인교회와는 거리를 두었음은 물론이고 중국 정부를 불신하는 편이었다. 그가 중국정부의 기독교회에 대한 태도를 잘 설명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국가권위는 교회를 불신하는가 하면 때때로 교회에 적대적인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국가 스스로는 교회에 대해 관용적이라 생각하지만, 많은 권력자들의 머릿속에는 국가는 궁극적으로 국민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근절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중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 정부의 법규를 어기게 되는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중국교회는 인간권위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성경적 원리를 포기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우선시하고 있다.”
(중국선교 핸드북, 110면)
중국 가정교회 성장의 원인으로 영적 굶주림, 고난과 부흥, 순회설교, 표적과 기적 외국교회의 지원을 든다. 한편 그는 중국인으로 중국 문화의 비판적 애호자이다. 중국 문화와 종교에 내재하는 비기독교 요소를 정확하게 분석하면서 중국문화는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 대하여는 ?중국선교 핸드북?이나 ?중국 교회사?에서 잘 나타난다. 개혁주의 신학자답게 중국 문화의 변혁도 어디까지나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믿기 때문에 전도자 육성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의 자유가 없음으로 공중파를 통한 소위 “공중신학교”를 경영한 셈이다. 독일 복음주의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이 국가의 기독교화를 제창한 것 같이 차오 역시 중국문화의 기독교화를 열렬히 외쳤다. 그가 즐겨 인용하는 성경본문은 요한복음 14장 12절이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받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중국 복음화를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바친, 중국 복음화의 기수 조나단 차오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이다.
전호진/ 목사, 고신대학교 총무 (D.Miss. Ph.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