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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20  통권 86호  필자 : 왕쓰웨  |  조회 : 4384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중국 복음화의 기수 조나단 차오 목사를 추모하며
중국기독교의 큰 숲, 조나단 차오


조
나단 차오(Jonathan Chao, 趙天恩)는 현대중국기독교의 큰 숲이었다. 차오는 그가 받은 세 가지 비전, 즉 중국민족의 복음화, 중국 교회의 하나님 나라화, 중국문화의 그리스도화를 그가 창설한 중국복음선교회(China Ministries International)와 더불어 65평생 동안 그 숲을 일구었다. 숲 안에 여러 종류별의 나무무리, 시냇물,  그리고 잔디 등이 있듯이 조나단 차오가 이룩한 큰 숲 안에는 중국 신학교육이라는 웅장한 나무무리, 중국기독교 역사와 현대중국기독교연구의 깊은 시냇물, 그리고 중국선교의 넓은 잔디 등이 있었다.

조나단 차오는 현대중국신학 교육의 창건자였다. 차오는 그의 나이 15세인 1953년 복음전도의 소명을 받았으며, 1963년 웨스터민스터신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재학시 이전의 복음전도의 소명은 구체적으로 중국인을 향한 복음전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1964년 그는 1년 동안 대만(臺灣)의 그리스도대학(基督書院)에서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성경관계 과목을 가르치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직면하였다.

그는 일부 교회 속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력과 복음주의 그룹 안에 반(反)신학적 조류를 심각하게 느꼈고 또 기독교인 대학졸업자들 가운데 헌신하는 자보다 이공계 학문의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자들이 많다는 것에 안타까와 하였으며, 그리고 당시의 교역자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학력이기에 지식인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데 통탄하였다. 1965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그에게 있어 중국인에게 복음전도의 소명이란 구체적으로 대학졸업자들을 위한 중국신학교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67년부터 차오는 그의 중국신학교육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미국에서 중국신학대학원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중국신학교육에 대한 그의 비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였다.  "첫째, 중국기독교인이 신학교육을 책임진다. 둘째, 성경과 신학연구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이수를 강조한다. 셋째, 기독교 신앙을 중국문화와 결합시킨다. 넷째, 학교 창립시 헌신 그룹을 결성한다.

이는 수도회의 개념으로 연유된다." 1977년 차오의 이런 신학교육이념에 따라 홍콩에서 중국신학대학원(中國神學硏究院, Chin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이  드디어 설립되었고, 그는 초대 교무처장 직을 맡게 되었다. 이전 1970년 대만에서 우용(吳勇) 장로 등이 중화복음신학원(中華福音神學院)의 설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펜실바니아대학(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동양학(Oriental Study) 박사과정에 있는 차오에게 교무처장직을 맡을 것을 부탁하였다. 차오는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대만에 입국하여 중국기독교 역사에 있어 최초의 대학졸업자 를 위한 신학원인 중화복음신학원인 교무처장의 중임을 책임지게 되었다. 차오는 교무처장으로 향후 중화복음신학원 교무행정의 골격과 정책을 확립시켰다. 


1980년 5월 차오는 중국신학대학원을  통한 중국선교 사역에 대한 참여 문제와 신학원 내에 설립한 중국교회연구소(中國敎會硏究中心,Chinese Church Research Center)의 설립취지와 목적에 대한 견해 차이로 그가 설립하고 주도한 중국신학대학원을 떠나 중국연구 사역과 선교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후 1987년 차오는 홍콩에서 복음전도를 지향하는 신학원인 중국선교신학원(中國宣道神學院)을 창설하였다. 그는 이 새로운 신학원이 홍콩과 중국대륙의 선교를 위한 신학원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선교의 도전을 감당하고 또 중국의 문화와 정치, 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를 위해 차오는 삼단계의 신학교육을 실시하고자 기획하였다.

첫 단계는 영성훈련의 단계로 제자훈련, 성경읽기, 기도, 묵상, 성경암송 등을 통한 인간훈련의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언어와 사상의 훈련 단계인데 실제적인 전도훈련, 중국어, 영어, 헬라어, 그리고 사상사와 문화사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단계는 신학훈련의 단계로 성경, 신학, 역사 등의 공부를 한다. 처음 그는 훈련기간을 6년으로 구상하였다가 점차 5년, 마지막으로는 4년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상의 삼 단계 가운데 차오는 특히 첫 단계인 영성훈련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1950년대에 중국이 공산화될 때 대부분의 기독교 목회자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대다수의 예수회 신부들은 그리하지 않았는데 이는 신부들이 감옥에서도 지속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한 데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 있었다. 이는 획기적인 목회학 석사과정(M. Div.)으로 중국신학교육 역사에 있어 초유의 신학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신학원의 원장직을 2000년 6월까지 맡았다. 


1988년 차오는 대만의 리방주(李幇助) 목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오신학원(道生神學院)의 복교(復校)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홍콩의 중국선교신학원과 같이 복음전도, 개척 그리고 중국선교의 인재를 훈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또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4년의 신학프로그램과 함께 2년 과정의 선교학 석사과정을 시도하였다. 이후 이 신학원은 차오의 위임 아래 천래이 목사를 원장으로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한편 1989년 차오는 대만의 그리스도대학의  이사회로부터 학장직을 맡을 것을 요청받게 되었으며, 그는 이 대학에 기독교중국연구소(1990년)과 신학대학원(1991년)을 설립한다는 전제와 계약조건으로 1989년 5월 학장직을 수락하였다. 차오는 연구소와 신학대학원을 통해 평신도, 교역자, 그리고 선교사까지 훈련하여, 그의 비전인 중국의 복음화, 교회의 하나님 나라화, 문화의 그리스도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대학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의 비전과 계획은 적지 않은 자들의 반대와 이사회의 계획연기로 인해 결국 1992년 6월에 학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차오가 세운 신학원은 2001년 중국의 중국신학원(China Theological Seminary)이었다.  이는 그가 중국대륙에 설립한 최초의 신학원으로 3년 과정의 대학졸업자들을 위한 신학원이었다. 차오의 신학교육 비전과 목적은 이 신학원에서도 같이 계승되었으며, 단지 이 신학원의 졸업생들이 중국 내의 학부수준의 신학원의 교수요원으로 또 대학원 수준의 신학원을 설립하기 위한 파송인재를 키우기 위한 취지가 첨가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신학원들은 모두 대만, 홍콩, 그리고 중국대륙을 대표하는 신학원들이며, 차오는 이 모든 신학원들의 창건자이며 개척자였었다. 
조나단 차오는 중국기독교 역사연구와 현대중국 기독교연구의 개척자였다. 1978년 차오는중국신학대학원에 중국교회연구소를 하였는데, 그의 목적은 전세계의 교회를 위한 중국선교 연구였으며, 중국연구와 더불어 중국복음사역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중국신학대학원의 기타 교수들 그의 이러한 연구소 설립목적에 이견을 나타내 보였으며, 급기야 그는 신학원에서의 모든 직을 포기하고 1980년 중국교회연구소를 이끌고 나와 중국연구와 중국선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차오의 중국기독교사 연구는 1970년대 펜실바니아대학의 동양학 박사과정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더크 보데(Derk Bodde) 교수 밑에서 중국학과 중국역사를 공부하였고 처음에는 현대 중국교회의 지도자이며, 교회 토착화운동의 아버지인 청찡이(誠靜怡)에 대해 박사연구를 하다가 결국은 한 인물보다는 더 큰 문제인 19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개신교의 반응을 통한 중국토착교회의 운동을 탐구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현대중국기독교 역사연구의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으며, 차오의 중국기독교 연구의 방법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차오의 중국의 기독교 역사연구는 소위 역사 속의 기독교 연구방법으로 중국역사 연구와 선교적 관심의 접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중국역사의 발전 속에서 선교사업의 발전과 중국인 교회의 출현을 추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역사의 주류와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관계와 상호적 영향을 밝히고자 하였다.

결국 그는 중국의 기독교를 소위 세속역사(Secular History)에서 이탈시켜 신성한 역사(Sacred History)로 독립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차오의 중국기독교사 연구는 이전과 기존의 기독교 사학자들이 중국 기독교 역사연구를 선교(宣敎)의 역사 또는  교회의 역사로 제한한 것에 대한 새롭고도 창의적인 시도라고 평가될 수 있다.

차오 연구의 가장 독보적인 부분은 현대중국 기독교, 특히 공산화 이후의 중국 기독교 연구에 있다. 1983년 차오의 중국교회연구소는 그의  책임 아래 그와 함께 연구원들의 연구 성과들을 チ煞坪?기독교 정책뼈繭遮?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공산화 이후의 중국 기독교 연구의 선구적 저작으로 고전이 되었다. 차오는 중국의 정치, 즉 공산당의 정치가 어떻게 중국 교회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 이런 역사적 큰 흐름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고 발전하였는지를 파악하고 연구하였다.

차오의 연구는 너무 정교(政敎)관계의 측면에서 기독교의 발전에 주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전체주의의 공산중국에서 기독교 연구의 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차오는 마침내 연구소의 연구원인 좡완팡(莊婉芳)과 함께 그의 현대중국 기독교 역사연구의 결정인 デ測陸薩묽竪떡낱像環瀯를 출판하였는데 그는 정교관계의 입장에서 1949년에서 1997년의 중국기독교의 발전을 탐구하였다.

 

조나단 차오는 현대중국선교의 선봉자였다. 차오의 65평생 모든 삶과 사역의 지향점은 중국인에게 복음전도 하는 일, 즉 중국선교였다.  뿐만 아니라 조나단 차오하면 생각되는 이미지가 중국선교이며, 중국선교와 조나단 차오는 항상 등식처럼 되어왔다.  사실 중국신학대학원을 설립할 때 차오는 네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복음주의 신학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둘째, 신학적 변증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적 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중국문화의 배경을 이해하여 더 많은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개한다." 그래서 중국신학대학원을 설립한 일 년 이후 1978년에 중국대륙이 개혁개방을 선포하자 차오는 이 신학원을 중국대륙 복음전도의 길로 이끌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의 이런 비전이 실현될 수 없게 되자 그가 15년 동안 키우며 일구어 온 신학교를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있어 중국선교는 절대절명의 소명과 목표였다. 중국선교의 선봉자로서 차오의 중국선교사역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중국 가정교회의 지도자와 신학훈련 사역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10세 때 떠난 그가 중국을 다시 들어간 때는 1979년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그의 첫 중국 사역은 성경과 신앙서적 배달과 함께 중국 기독교인들과 접촉하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공산주의 통치 아래의 중국 교회를 도울 수 있고, 또 가장 효과 있는 중국선교 방법은 중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과 신학훈련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가정교회였다.

현대 중국 정치와 기독교 연구를 통해 차오는 당과 정부의 강한 통제를 받아온 삼자교회(三自敎會)는 강한 정치성과 함께 사역의 가능성이 희박하였지만, 그 동안 핍박을 받아온 가정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이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역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983년 차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위 방송신학을 시작하였다. 이 신학과정에서 그는 성경과 구원, 성경해석학, 기초신학 등 과목을 개설하여 성경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청취자들과 연결이 되었으며. 그의 중국 교회 접촉면도 확장되어 나갔다. 1985년 그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허난(河南) 가정교회를 도와 소위 광야신학원(野地神學院) 사역을 하게 되었다. 

광야신학원은 기존의 가정교회 순회전도자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집중 신학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차오는 이들을 가르칠 교수들을 해외에서 지원하였으며, 신학서적들도 대량으로 공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그의 중국선교 비전인 민족의 복음화, 교회의  하나님 나라화, 문화의 그리스도화를 끊임없이 전하였으며, 중국 교회가 해외에 의존하기보다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중국 교회가 세계선교로 나아가야 하며, 세계선교의 비전과 책임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차오는 단순한 사역자이기보다 비전을 중국 교회에게 심어 주는 지도자였다. 차오의 이런 사역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쉼없이 진행되었다.


둘째, 중국 교회의 보도 및 선교의 동원화 사역이다. 차오는 중국선교를 감당하면서 중국정부와 삼자교회에서 보도하는 중국종교와 교회 상황과 실제적인 현실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홍콩의 그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중국어와 영어 간행물을 통해 전세계에게 보도하였다. 이로 인해 차오는 반(反) 중국적 종교인사로 낙인찍혀 중국정부와 삼자교회로부터 강한 제재와 반대를 받아왔다. 심지어 삼자교회와 교류를 갖는 해외의 종교단체로부터 배척과 비난을 받았다. 차오는 또 핍박받는 가정교회와 교역자들 편에 서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알리는 한편 이들을 위해 항변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차오를 가르쳐 중국 가정교회의 대변인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차오는 중국 교회의 필요성과 중국선교의 중요성 누구보다 더 많이 전세계에게 홍보하고 또 중국선교의 동원화를 위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처음 그는 홍콩과 미국 그리고 대만을 중심으로 이런 홍보와 동원화 사역을 감당하다가 점차 일본, 한국, 싱가폴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넘어서 유럽의 영국, 독일, 스웨덴 , 아프리카의 남아공, 대양주의 호주와 뉴질랜드, 미주의 카나다 등으로 그의 사역이 확대되었다. 결국 홍콩을 중심으로 그의 비전과 사역에 공감한 미국, 대만, 영국, 호주, 카나다, 한국, 필리핀 등 국가에서 그가 창설한 중국복음선교회의 지회가  설치되어 같은 비전을 지니고 중국선교를 감당하게 되었다. 그의 동원화 사역을 통해 중국선교의 붐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남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선교에 동참하고자 원하는 교회와 헌신자들 끊임없이 지원하였다.


셋째, 중국의 지식인 선교사역이다. 비록 차오의 중국 사역의 주대상이 가정교회였지만 그는 항상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대도시의 대학교수, 공산당 당원 등에게 복음을 전했고, 기독교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을 찾아 중국의 현황과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과 신학적 토의를 전개하였다. 차오는 이들 지식인들에게 이들이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공급해 주면서 로마서 5-8장 강해를 즐겨하였고, 또 중국 근현대사 토론을 통해 자유, 민주, 인권, 법치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이끌어내어 이런 숭고한 기본가치와 정치이념이 성경의 인간론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지식인 사역을 통해 대학에서 중국역사, 마르크스 철학, 서양철학, 자연과학 등을 가르치는 교수들, 또 공산당 간부를 배출하는 공산당대학의 교수까지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특히 1989년 6.4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에서 탈출한 적지 않은 민주화 인사와 서방국가에 유학온 학생들을 향한 사역은 차오 인생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사역이 되었다. 중국의 민주화 인사인 옌자치(嚴家祺), 왕시저(王希哲), 웬즈밍(遠志明), 숑옌, 짱뽀리 등은 끝임없는 교류를 유지하였고, 그 중 왕시저는 차오를 통해 세례를 받았고, 짱뽀리는 미국의 중국복음선교회 선교사로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역하였다. 1996년부터 그는 여러 중국선교 단체와 함께 중국학자캠프(中國學人培訓營)을 시작하였는데 이 캠프를 통해 중국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중국선교에 헌신하여 본인의 학위공부와 계획을 중단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조나단 차오는 현대중국 기독교의 큰 숲이었다. 그는 그가 받은 궁극적 비전인 중국선교에 충실하면서 중국신학교육이라는 웅장한 나무무리를 인고의 세월 속에서 키워나갔으며, 중국기독교역사와 현대중국기독교연구의 깊은 시냇물을 신앙적 통찰력을 겸비하면서 끊임 없이 파헤쳤고, 또 중국선교의 넓은 잔디를 비난과 배척을 감수하면서 일구었다. 그는 실로 중국기독교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그의 계승자들과 이후의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그 숲을 일구어 나갈 과제를 넘겨주고 떠났다.


 왕쓰웨 /목사, 미국 풀러신학원 교회사 박사과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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