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중국 무슬림의 아이덴티티
무슬림이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 혹은 그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 중국의 서쪽 변방에 살고 있는 중국의 무슬림들은 그들이 처음 등장했던 1,400년 전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상황아래 살고 있다. 9.11사태 이후 더욱 처지가 어려워진 중국의 무슬림들은 대대로 돼지고기를 먹고 다신교적이며 세속적인 이교도들에게 포위되어 살아왔다. 중국의 무슬림들은 전체 인구의 2%정도에 불과하지만 절대숫자는 약 2천만으로서 상당히 많다. 앞으로 중동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에너지 의존도는 계속 높아갈 것이며 이슬람 국가들은 중국의 큰 수출시장으로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에게 있어서 중국 내부의 무슬림들은 낯익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중국이 코소보와 보스니아 개입을 극도로 꺼렸던 이유는 혹시라도 발칸반도에 대한 개입이 신장의 분리주의 세력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이슬람교를 “回敎” 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回”란 말은 주로 터키계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위구르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1990년의 인구센서스를 근거로 하여 오늘날 중국의 무슬림들을 종족별로 나누어 보면 후이 860만, 위구르 720만, 카자흐 110만, 동샹 37만, 키르기즈 37만, 살라르 8만8천, 타지크 3만4천, 우즈벡 1만5천, 보난 1만2천, 타타르 5천으로 합계 약 1,760만 정도이다. 후이족은 주로 시노티베탄언어를 쓴다.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벡, 타타르는 터키계언어를 쓰고 다른 소수 민족들은 터키어, 몽골어, 인도폐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쓴다. 사실 중국의 인구통계에는 정치적 의도와 해석이 가미되어 있어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고 또 위의 통계자료는 그야말로 종족 혹은 민족 단위의 자료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몇 명인가를 정확하게 알기는 불가능하다. 후이족의 경우를 보면 일부는 중국어를 쓰고 일부는 다른 언어를 쓰지만 중국정부는 함께 후이족으로 분류한다. 타지크족은 타지키스탄에서 쓰이는 타지크어를 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주지의 주류 언어인 위구르어를 쓰지도 않고 민족은 타지크로 분류된다. 다른 무슬림에 비해 후이족은 가장 한족과 인구학적 측면에서 또 문화적 동화라는 측면에서 보아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슬람적 의례를 한족문화와 결합시켰는데 이로 인해 무슬림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후이족의 한족화는 그들의 문제일 뿐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 이 문제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이 55개 소수민족의 아이덴티티를 별도의 것으로 따로따로 인정하는 정책을 계속 취해온 결과로서 후이족들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무슬림이라는 데서 찾지 않고 중국화한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에서 찾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이족은 굳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무슬림에서 찾지 않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다른 무슬림들과의 동질성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고 연대의식도 약해진 것이다.
고고학적 발견들은 중국에 들어온 초기의 무슬림들이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몽고 등지의 상인들과 군인, 관리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7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그들은 중국의 동남해안지역에 정착하였다. 몽고제국이 대륙을 호령하던 13-14세기 무렵 무슬림들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의 북서부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왔으며 점차 중국인들과 혼혈의 과정을 거쳤지만 자녀들을 무슬림으로 키웠다. 수니파와 하나피파가 주류를 이루었던 이들 무슬림들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작은 도시나 촌락 사회를 이루고 살았으며 상업과 무역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고 더 크게는 ‘우마(Umma)’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페르시아지역의 이슬람교파인 수피파가 중국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명과 청왕조 시기에 중국 서부에서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주요 세력은 바로 이 수피 무슬림들이었다. 중국이 약화되었던 1912년 무렵에는 민족주의 혁명이 이 일대에 유포되어 자치권을 주장했으며 한편으로는 각 종족을 대표하는 군벌들이 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과 한족의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의 역사는 오늘날 중국 무슬림들이 민족주의적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이족은 중국문화와 자신들의 전통을 절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중국에 비교적 늦게 편입되었던 위구르족은 중국의 강력한 통합정책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압력에 밀리면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위협받고 있다. 후이족이 가장 중국화된 무슬림이라면 위구르족은 가장 덜 중국화 된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다.
2. 중국의 지배권에 대한 위구르족의 저항
1997년 5월 13일 베이징의 한 공원에서 폭발물이 터져 한 명이 사망했으며, 5월 7일에는 두 차례 버스에서 폭발물이 터져 두 명이 사망했다. 그보다 먼저 신쟝자치구의 수도 우룸치에서 같은 해 2월 25일 폭발물이 터져 9명이 사망했으며 무려 30여 차례의 폭발물 테러가 있었다. 티벳에서도 여섯 차례의 폭발물 테러가 있었다. 5월 29일에는 8명의 분리주의테러범들이 처형되었으며 테러혐의로 수감된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들은 위구르 무슬림과 한족사회의 역사, 경제, 정치적 관계를 통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중국에 18세기에 강제로 점령당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조상들이 자신들의 땅인 타림분지에서 살아왔다고 믿는다. 충분히 일리는 있지만 사실 위구르족이 형성된 과정을 보면 그들의 종족적 단일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8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유목민족인 위구르족은 사실상 오늘날의 위구르족과 거리가 있으며 오늘날의 위구르족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최근에 틀이 갖추어졌다.
불교를 믿던 위구르족의 이슬람 개종은 10세기에 시작해서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이슬람교의 수용은 위구르라는 종족적 범주를 약화시켰다. 이후 타림분지의 상황은 1760년 청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 신쟝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영토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중국문화의 영향력 확대라는 일대 변화를 맞았다. 100년가량 지속된 청왕조의 통치는 열강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어 청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 일어난 야쿠브벡의 반란(1864-1877), 영국과 러시아의 진출 등으로 인해 흔들리게 되었다.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된 이 지역에서는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1933년 카시가르를 수도로 하여 동터키스탄공화국이 등장하는가 하면 1944년 이닝에서 또 다른 위구르인들의 나라가 건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신생국가들은 위구르족을 통합할 능력이 없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위구르족이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실상 1930년대에 소련의 민족정책의 영향 아래 규정된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민족개념의 규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49년 이 지역은 중국의 신쟝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해방이 선언되었고 1955년에는 중국의 자치구로 선포되었다. 중국의 민족개념에 입각한 이 지역의 구획은 실상 여러 지역적 특성과 언어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정착해서 살던 터키계 무슬림인 위구르족과는 다른 롭리크나 돌란같은 종족도 그냥 위구르족으로 분류되었다. 오늘날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립의 역사적 정당성의 근거를 야쿠브벡의 시기, 단명했던 동터키스탄공화국, 고대의 위구르왕국 등에서 찾고 있다. 중국 외부의 여러 나라 도시들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위구르 분리주의 운동세력은 대부분 위구르인들이 오랜
단일민족적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구소련은 터키스탄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은 1996년 중국과 분리주의 운동에 근거지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타림분지 일대의 위구르족들이 민족주의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고 분리주의자들이 정서적 통합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상호반목과 대립이 만연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주요한 원인은 토지분쟁, 종파간 대립, 언어불일치, 계층갈등 등이다. 1996년 5월 카시가르의 이드카모스크에서 일어났던 종파간 대립에 기인한 성직자 암살기도, 2001년 12월의 위구르 관리 6명 암살사건은 다 내부갈등의 결과였다. 사실 위구르족 내부에서도 그렇고 일대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을 믿는다는 사실 외에도 그다지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는 중국이 신쟝에서 테러범과 분리주의자들을 체포하여 수천 명을 처형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매주 1.8명씩이 처형된다고 한다. 대규모의 중국군대가 이 지역에 테러진압을 명분으로 진주하여 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타림분지 남부에서 시작하여 일대에 번져나갔던 반란과 봉기의 시초는 1990년 4월의 악토반란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은 그에 발맞추어 신쟝으로 무장병력을 보냈다. 9.11사태 이후 중국은 미국과 손을 잡고 파키스탄을 압박하여 테러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한 위구르 테러범을 중국으로 송환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테러범 송환은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의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최근 들어 위구르족의 권리와 나아가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국제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독립운동은 1백만 명에 달하는 중국 외부의 위구르인 사이에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그들의 독립운동은 이스턴터키스탄의 건국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방법으로는 테러를 배제하고 비폭력적인 투쟁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중국정부는 그들의 활동이 불법적이며 테러와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이슬람 국가들이 중국의 주요 석유수입원이라는 경제적 요인 때문에 종종 국제문제로 대두한다.
1997년 2월 5일 이닝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 중국당국이 발포를 명령하여 다섯 명의 위구르인이 죽고 수백 명이 체포된 사건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신문 “알 빌라드”는 중국을 격렬히 비난했고 터키의 국방장관 투르한 타이얀은 공개적으로 중국을 비난했다.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은 다들 이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들과의 교역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철도, 항공, 육상교통망도 확충되고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과의 교역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만간에 중국은 이들 국가들의 가장 큰 무역대상국이 될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관광 상품도 이 지역의 개발에서 중국이 중시하는 요인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 나라들은 물론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끌어들여 경제적 요인을 통해 신쟝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신쟝과 티벳 장악력을 확고하게 과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분리 독립운동을 저지하고자 한다.
WTO 가입과 APEC 참여를 놓고 벌어진 인권문제 논쟁에 대해 중국은 강경한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투입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중국은 신쟝과 티벳의 문제를 단순히 그 자체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으며 홍콩 및 대만 문제와 연결된 문제로 보고 있다. 이처럼 신쟝과 티벳은 중국이 자신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비중국적인 요소들을 앞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3. 무슬림들의 중국화와 아이덴티티 추구
중국의 무슬림들 가운데 후이족은 가장 중국화 된 경우이다.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터키계 인도유럽 무슬림이지만 그들은 비교적 중국의 영역으로 깊숙이 진출하였다.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종교적 요소만 빼면 한족과 구별되는 후이족의 아이덴티티상의 차별되는 점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한편 최근 중국의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점차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무슬림들은 20세기 전반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평등, 자치권, 종교의 자유, 소수민족의 지위 인정 등이 그 지지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그들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특히 종교 자체를 죄악시하고 소수민족을 강제로 통합시키려고 했던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무슬림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모스크는 폐쇄되었고 종교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1천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처형되었던 1975년의 윈난성의 무슬림 봉기가 보여주듯이 많은 무슬림들이 처형되고 투옥 당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자유로운 시기가 도래했지만 무슬림들이 입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있다. 1986년 우루무치에서 벌어졌던 위구르인들의 시위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중가리아평원의 환경오염, 타클라마칸사막의 핵실험, 한족의 이주, 위구르에 대한 한족의 모역적 언행에 대해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89년과 1993년에는 위구르족의 풍습을 미개한 것으로 묘사한 책의 출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무슬림들이 개혁개방 이후 중동국가들과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왕래하게 됨에 따라 이슬람 근본주의에서 유래한 생각들이 중국의 무슬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것도 무슬림의 중국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다. 1994년 2월 후이족 무슬림 지도자들이 남부 닝씨아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무기형에 처해진 일은 후이족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된다. 후이 무슬림과 카자흐 무슬림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 무슬림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1991년 유라시안철도가 개통되어 중국의 무슬림들이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와 쉽게 왕래하게 된 이후 오히려 무슬림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경향이 증대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이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들과 중국의 우호관계를 향상시킴으로써 분리 독립의 정서를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지역의 무슬림들의 생활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보다 훨씬 나으며 경제적으로는 분리 독립이 이익이 아닌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물론 이 지역의 경제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동부의 연안지역에 비하면 엄청나게 소외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중국정부는 1996년 중국과 러시아에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을 묶어 “상하이5”라는 우호협약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200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이에 참여함으로써 중국은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차단하는 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 무슬림들의 무슬림적 아이덴티티 추구와 중국화는 이처럼 복잡한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진행 중이다.
4. 이슬람과 중국 민족주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는 이전처럼 무슬림의 활동을 국내에 묶어두기는 어려워졌다. 그로인해 매년 메카순례자들이 급속히 증가해왔으며 이슬람권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과 이슬람 국가들이 교역이 증대됨에 따라 문화나 종교의 교류도 필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중동 무슬림 지도자들의 중국 무슬림 사회 방문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이슬람 문화가 그 동안 폐쇄된 상태에서 강요된 중국화의 길을 걸어왔던 중국의 무슬림 사회 속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념의 시대가 퇴조한 이후 세계적으로 글로벌리즘과 민족주의가 양대 조류로 대두하고 있다. 상호모순 되면서도 통합적인 이 두 조류는 중국의 무슬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이념 대신에 종교, 문화, 인종 등의 요소들이 국가의 범주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로서 부각되고 있다. 한편 다양한 민족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복잡하게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수 백 년이 걸렸을 민족 이동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는 천 년이 넘는 동안에 무슬림들이 중동지역에서 중국의 서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해 왔지만 오늘날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중동의 핵심부에서 동아시아의 도쿄와 서울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제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무슬림들은 더 이상 낯선 이방인들이 아니다. 이런 상황 아래 일어난 9.11사태는 매우 좋지 않은 예감을 주는 사건이다. 서구국가들과 중국이 9.11을 호기로 삼아 무슬림들이란 항상 테러와 연관되어 있으며 국가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요소라고 비난하려고 한다면 이는 세계적으로 상황을 경직시킬 뿐 아니라 중국의 무슬림들에게도 곤란을 초래할 것이며 무슬림의 중국화 또한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김영구 / 방송대 중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