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마는 공주의 남편, 왕의 사위
중국 통속 소설에 흔히 나오는 얘기다. 어느 나라 공주가 나이가 들어 혼령기에 이르자 왕은 사위감을 선발한다. 왕궁 앞 광장에 ‘채루(彩樓)’, 곧 오색 천을 길게 내려뜨린 높다란 망루를 하나 세운다. 공주가 오색 실로 정성들여 떠서 둥글게 만든 공을 가지고 망루 위로 올라가고, 망루 아래 광장에 모여 법석대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모두 공주만을 바라본다. 공주가 던진 공에 명중된 사람이 공주와 결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주가 공을 던지고, 그 때에 군중가운데에 한 젊은이가 의연히 나타난다. 그 젊은이는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이곳을 지나다가 그저 잠깐 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떠돌아다니는 부랑인이거나 걸인일 수도 있으나 상관없다. 어쨌든 공주가 던진 공에 맞은 그 젊은이가 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고 관직도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직을 맡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신데렐라를 각색한 듯한 이야기 같지만,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꽃이나 과일이나 공을 던져 상대를 고르는 풍속은 중국 고대 사회나 변방 민족의 혼인 풍속에 흔히 있는 일이다. 한껏 낭만적으로 표현된 이런 이야기에서 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된 사람이 ‘부마도위’라는 특별한 관직을 받게 된다는 내용은 작자 마음대로 착상한 발상이 아니라 중국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제도이다.
‘부마(駙馬)’라는 것은 ‘천자가 타는 어마(御馬)의 부(副)’ 곧 ‘예비 교체의 말’이라는 뜻이고, ‘도위(都尉)’란 그것을 관장하는 시종관의 명칭이다. 그러므로 ‘부마도위’란 천자의 예비 어마를 담당한 관직으로, 이일은 왕의 사위가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마도위, 줄여서 부마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주의 남편, 왕의 사위를 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왕의 사위가 실제 이러한 직무를 꼭 담당한 것은 아니고 황제의 딸인 공주 신분에 걸맞게 하기 위하여 이런 직을 주었던 것이다.
2. 부마도위의 유래
부마도위라는 관직은 한 무제((B.C.141~B.C.87)때부터 둔 제도로 알려져 있다. 위진 시대는 왕의 사위가 부마도위직에 임하였다고 한다. 부마도위의 유래에 관한 내용이 『진서(陳書)』 권 17의 원추전(袁樞傳)에 잘 나타나 있다. 원추는 남조의 양(梁: 502~557)나라 오군의 태수 원정길(袁吉正)의 아들로, 진(陳) 무제(武帝 : 575~559) 때에 상서로 발탁되었는데, 박학다식하여 역사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다.
당시 진 무제가 즉위한 후, 죽은 딸의 추증 문제와 왕의 사위에 대한 예우 문제가 거론된 일이 있다. 진 무제의 딸 영세공주(永世公主)가 일찍이 진류(陳留)의 태수 전(錢)씨에게 시집 가 아들을 하나 낳고 잘 살았으나, 공주와 아들은 무제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미 죽었는데 무제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이미 죽은 딸을 공주로 추봉하고 전씨에게도 부마도위의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다.
이 때 원추가 역사를 들어 간하기를 “옛날 왕의 딸은 반드시 제후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한대에 이르러서는 열후 집안에서 신랑을 삼았으며 그 때부터는 빈을 문벌이 없는 자로 하였습니다. 부마도위직은 한 무제 때부터 두었습니다. 무릇 공주의 남편인 왕의 사위에게 반드시 부마도위직을 제수하는 것은 위진 이래 철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주의 신분은 높은데 신랑의 신분이 낮을 경우에는 합근례(合巹禮,: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의식)를 생략하고 신랑에게 부마라는 직을 줌으로써 신분을 높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현존하는 공주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배우자에게 부마도위직을 주도록 한 것인데 영세공주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고 또한 부부관계도 끊긴 상태이기 때문에 전씨에 대해 부마를 제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간청하면서 원추는 부마도위의 유래를 설명했다.
사실 공주는 황제의 딸이니 신분이 높아 아무하고 결혼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공주의 신분을 내리면 문제는 간단하나 중국에서는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지위를 그대로 둔 채 역으로 한 젊은이를 골라 그에게 명목상 관직을 주어 공주의 남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황제의 딸인 귀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그 가문은 황제와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이었으므로, 출세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기대하는 일이었다. 황제의 사돈이 되면 관직이 상승하고 권세를 쉽게 손에 쥘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누릴 수 없는 특권까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의 승상 이사는 며느리를 모두 진시황제의 딸들로 맞아들였고 그의 딸도 진시황제에게 시집을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황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주의 신분이 고귀한 만큼 그녀의 배우자도 거기에 상응하는 일정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한대에는 명문세가의 자제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고, 특히 위진 남북조시대에는 문벌제도가 엄격하였기 때문에 가문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당대에도 부마가 된 사람들은 대개 공신의 자제이거나 장수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송 대부터는 부마를 삼는 기준이 가문에서 학식과 재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문벌 귀족이 사라지고 과거제에 의한 사대부 계층이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 것인데 이 때부터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청년이 선택되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 시험장에서 황제가 직접 사위감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송 영종(英宗 : 1063~1067)은 과거 시험장에서 인물이 출중한 왕사약이 눈에 띄어 그를 부마로 삼았던 것이다.
3. 명. 청대의 부마는 서민의 자제에서
명대에는 다른 시대와 달리 부마를 문무대신의 자제에서 고르지 않고 저급 관리나 일반 서민 중에서 골랐다. 명 태조는 부마를 공후의 자제에서 골랐지만 차차 후대의 황제들은 일반 서민 가운데에서 부마를 골랐다. 심지어 부마의 아비가 관직에 있을 경우에는 그 아비를 퇴직시키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황실과의 사돈 관계로 인해 정치에 간섭하거나 권세 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온 방책이었다.
부마는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의 자제 중에서 선발되지만 누군가의 추천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추천된 여러 후보자는 나중에 3인으로 압축되고, 이후 태후와 황후, 황제와 태감, 빈비 등의 심사를 거쳐 최종 한 사람이 선발된다. 사실 추천제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뇌물 수수행위가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있거나 권세가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마지막 후보 자리까지 올라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내정에 환관의 입김이 강하였던 명 중기 이후에는 태감(환관의 우두머리)이 부마 선발 과정에서 깊이 관계하여 뇌물을 받고 횡포 하는 일이 많았다. 뇌물을 받고 추천하는 일이 많다 보니 선발과정에서 많은 물의가 있어, 심지어는 추천된 후보들 가운데 주색만 밝히고 아무것도 모르는 한량도 있는가 하면, 중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까지 끼어 있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신종 만력 10년(1582), 영녕공주(永寧公主)가 부마로서 양방서(梁邦瑞)라는 북경 대 부호의 자제가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수척한 상태로 실은 폐병을 않고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그를 반대하였으나 태감 풍보(馮保)가 추천하고 거기에 재상 장거정의 지지와 자성태후(慈聖太后)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부마로 선정되었다고 하지만 실은 태감 풍보가 은 수 만 냥을 받고 그를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마는 혼례식 도중, 코피를 흘려 예복이 새빨갛게 되는 추태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자 태감 등은 붉은 피를 마치 괘홍(掛紅 : 좋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내려 뜨려 놓은 붉은 비단 천)의 길포(吉布)에 비유하고 아첨하면서 이 붉은 피는 길조가 아니냐며 축하했다고 한다. 결혼한 후 한 달도 채 못 되어 부마는 세상을 떠났고 공주는 부부의 사랑도 실감하지 못하고 수년간 과부로 수절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수 만 냥의 뇌물에 눈이 어두워 병든 부마를 택한 결과가 이러한 참혹한 희생을 낳고 만 것이다.
4. 공주에 딸린 관가파의 존재와 횡포
공주가 시집을 가면 황제는 노파 궁인을 보내어 규방 일을 돌보게 하였는데, 이런 일을 담당한 궁인을 관가파(管家婆)라 한다. 관가파는 공주의 생활을 돌본다고 하지만 실은 공주와 부마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공주와 부마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거기에 부마를 경멸하는 행동을 자행함은 물론, 부마가 공주를 만나려면 반드시 관가파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부부간에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종 만력제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만력제의 일곱째 딸 수양공주(壽陽公主)가 양흥양(冉興讓)과 결혼하여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공주가 가을 긴긴 밤 외로워 부마를 불러내었다. 그런데 관가파인 양영녀(梁盈女)라는 궁인 노파가 정부인 환관 조진조(趙進朝)와 술을 마시며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채 관가파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공주를 만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은 관례상 위법이라 하여 관가파가 노발대발하면서 술에 취한 채 부마를 여지없이 끌어내어 구타한 후 내 쫒았다. 공주가 달래며 중재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공주는 분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이 생모인 정귀비에게 호소하려 하였으나, 이미 관가파가 먼저 들어가 허위 보고를 하였기 때문에 귀비는 도리어 화를 내며 공주를 만나주지 않았다. 또한 부마도 상주문을 준비하여 궁궐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전날 밤 관가파와 술을 마셨던 조진조가 그의 무리를 시켜 부마를 구타하고 내 쫒았다.
돌연 무리들에 의해 두들겨 맞은 부마는 의관이 다 흩어지고 피가 낭자 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부마가 돌아와 상주문을 작성하고 있을 때 황제로부터 엄한 유지가 내려 왔는데, 그것은 국자감에서 3개월 동안 예를 익히라는 엄명이었다. 일종의 근신 3개월의 벌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받고 부마는 근신의 벌을 받았지만 관가파 영녀는 그저 다른 부서로 옮겨졌을 뿐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고, 부마를 구타한 내관들도 역시 불문에 부쳐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가파 제도가 청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황실에서 어머니들이 아들은 귀중히 여기나 딸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았다. 딸이 어머니를 만나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자기를 낳은 생모와 대면할 기회가 수 십 번에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마는 공주와 다른 별채에 거주하였다. 부부라 하더라도 공주가 요청하지 않는 한 함께 잠자리를 하지 못했고, 그것도 공주와 부마가 함께 요즈음 말하는 팁을 관가파에게 주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공주와 부마가 부부의 정을 나누려 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일 관가파 노파를 서운하게 하면 구실을 대어 부부 관계를 방해할 뿐 아니라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도리어 비난하면서 질책하기도 했던 것이다. 공주가 이런 사실을 생모에게 알리고자 해도 알현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고, 전해진다 해도 생모는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나라 공주는 자식을 낳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부마의 첩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공주가 부마보다 먼저 죽으면, 부마는 집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어 두고 떠나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5. 관가파는 왜 존재했을까?
관가파는 황제가 전적으로 파견한 노파궁인으로, 공주 부부의 일상생활을 돌볼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거기에 공주 부부 사랑의 문제까지 간여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밉기만 한 관가파 제도를 두어 일개 궁인에게 공주 부부의 안방 생활까지 간섭할 수 있게 하였을까?
당시 사회의 의식 속에는 황제의 아들은 커서 제위를 계승하지 못한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왕조에 도움을 주게 되지만 공주는 황실 제정에 부담만 주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장 후에도 대우가 소홀 한 것이 역대 왕조의 현실이었다. 공주 중에 종종 출가하여 승려가 된 예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황실의 위신 때문에 공주를 결혼시키기는 하지만, 공주가 무한정 자식을 낳는다면, 그 후손에 대한 대우문제가 골치 아픈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재정적인 뒷받침이며 예우 문제 등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관가파라는 노파 궁인을 두어 심술궂게 공주의 규방생활까지 제약하였으니, 이것은 공주와 부마와의 부부사이에 산아제한을 엄히 하고자하는 뜻이 내재해 있었으리라.
오늘날처럼 피임을 위한 약이나 기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당시를 고려한다면, 공주에게 마구 영아 살해를 시킬 수도 없는 일이기에 애써 회임의 기회를 적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명․청대에 이런 관가파제도가 유지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 때 욕구 불만의 부마는 어쩔 수 없이 왕부 내의 시녀들에게 눈을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러한 측실 소생의 자녀는 황제의 혈육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대우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마제도란 공주와 그 남편 부마를 함께 존귀한 인물로 대우하기위해 도입한 제도이다. 그러나 공주와 부마, 이 부부들은 결국 처음부터 인권이 무시되고 말았으니 보통사람으로 여러 가족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며 자손에 둘러싸여 백발의 노년을 맞는 것과 과연 어느 것이 행복한 것인지.
전순동/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