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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20  통권 87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6147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대만의 기독교

 지난 호에 우리는 근대 중국 기독교가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어문선교회 편집부의 통보에 의하면 앞으로 저와 독자들과의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엔 대만의 기독교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고, 다음호에는 근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원인을 정치, 외교, 사회, 종교와 전통사상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토론하고자 한다.

대
만은 원칙적으로 중국에 속한 섬나라지만, 그 지역적인 특수성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에 많은 외적들의 침략과 통치를 받아야 했다. 기독교의 전래 과정에서도 이러한 정치적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각 시대마다 그 통치세력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각 통치시대를 대표하여 간단히 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1. 대만의 소개
대만은 중국 남해안에서 180km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의 중요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섬나라로 남북의 길이가 394km, 동서의 폭이 144km인 고구마 형태의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이 35,981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약1/3에 해당하지만, 3/4이 산악지대이고, 또 산들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3,000m을 넘는 산들이 62개나 되며, 그중에 가장 높은 옥산은 거의 4,000m에 가까워 많은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산이 많기 때문에 전 국토의 겨우 1/4이 주거지로 적당하여, 2천3백만의 인구 중에 95%가 서해안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인구 밀도가 높은 것이 또 대만의 특징이다. 매 평방킬로미터당 476인으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의 기록을 소지하고 있다.

대만은 이민사회여서 인구의 형성이 매우 복잡하다. 가장 처음 이민 온 원주민이 전체 인구의 2%, 객가인(客家人)이 10%, 17세기 명말청초에 이민 온 민남인(闽南人)이 75%, 그리고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과 함께 중국에서 피난 온 중국인 소위 말하는 외성인(外省人)이 13%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완전히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대만은 마치 중국문화의 축소판 역할을 하지만, 또한 각 종족 간에 갈등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민남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은 이번 총통 선거를 통하여 더욱 심각해져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지고 있다.

또 그들의 언어가 완전히 달라서 국민들 간의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어를 표준어로 정하고 국어 교육을 실시하였지만, 언어 문제는 아직도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이며, 더욱이 최근 대만의식이 강하게 대두 되면서, 모어 교육(母語敎育)을 중시하여 각 종족의 언어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2. 근대 이전의 대만 기독교
1624년 명나라 말기의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네덜란드 군대가 대만의 남부를 점령하여, 대만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자국 군인들의 신앙을 돌보아 주고, 식민지 백성들을 회유하기위하여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대만에 제일 처음으로 파견된 선교사는 네덜란드선교사 죠지. 칸디디우스(Rev. Georgeius Candidius, 甘治士牧師)로, 1627년5월4일 대만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재의 대만의 남쪽 대남(臺南)을 중심으로 대만의 풍습과 언어들을 익히면서 식민지 정부의 보호아래 선교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하였다.

네
덜란드는 해외식민지 통치의 편의를 위해 동인도공사(東印度公社)를 설립하여 식민지의 정치와 종교 등의 일체를 위임 통치하였다. 그래서 대만에서의 선교사역도 동인도공사의 관리 하에 진행되었다. 네덜란드가 대만을 점령하는 동안 모두 36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었는데, 그들은 선교사의 역할 뿐 아니라, 세금 징수, 영업허가증 발급, 군인과 그 가족, 그리고 식민지 관리들을 보살피는 등 각종 업무들을 역임하였다. 그들은 선교사라기보다는 동인도공사의 직원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정치와 종교의 불분명한 역할로 인해 많은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661년4월30일 대만의 민족영웅인 정성공(鄭成功)이 명나라의 잔유세력을 이끌고, 대만에 피난 와서, 네덜란드 군을 몰아내고, 대만을 명나라 회복 기지로 활약하였다. 이로써 38년간의 네덜란드 식민정치는 막을 내리고, 선교 사역도 식민지 세력과 함께 그 자취를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선교사들의 현지인들 보다는 통치자들을 위주로 한 식민지화 선교 모습은 이후에 선교사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었다.

3. 근대 청 말의 기독교 선교
정성공과 그의 후손들은 대만을 중심으로 23년 동안 청에 대항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1683년, 대만은 청에 완전히 귀속하게 되었다. 비록 정국은 안정이 되었지만 복음은 이백여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대만을 찾게 되었다.

1858년 6월 26일 중국은 제이차 아편전쟁에 패하여 영불연합국의 압력 속에서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모두 11조항의 조약 가운데 제4조항에 대만 등 5개 항구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조문이 있었다. 2년 후 북경조약에 의해 중국은 거의 모든 문호를 완전히 개방해야 했다.

이
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영국장로회는 대만선교에 관심을 갖고 1860년9월, 하문(廈門)에서 선교하고 있는 더그라스(Carstairs Douglas, 杜嘉德)와 맥켄즈(H. L. Mackenzie,馬肯査)를 대만에 파견하여 선교 탐사를 하였다. 그들은 대만에서 민남어가 통하며 또 백성들이 복음을 배척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대만 선교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1865년5월28일, 영국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맥스웰(Dr. James L Maxwell, 馬雅各)장로가 3명의 조교 진자로(陳子路), 황가지(黃嘉智), 오문수(吳文水)와 함께 대만에 도착하여 6월16일 대만 선교의 문을 정식으로 열게 되었다. 대만에서는 이 날을 대만 선교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는 대남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전개하였는데, 생각 밖으로 현지인들의 심한 반발을 받아 선교기지를 고웅(高雄)으로 옮겨야 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선교의 열매가 조금씩 결실되어 갔다. 대만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기 복음을 받아드리는 자들은 대부분 빈곤한 사회층들이었다.

영국장로회는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그 진용을 강화하고 대만 선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맥스웰선교사는 1868년 대남에 병원을 설립하여 대남 선교기지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대남은 대만 남부의  선교기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의료 선교 뿐 아니라, 문서 선교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신도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영어 알파벳을 이용하여 민남어를 음역한 민남어 성경을 출판하고 1881년 영국에서 인쇄기를 도입하여 1885년부터 대남에서 월간 "교회보(敎會報)"를 발행하였다. 1885년에는 에딘버그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에데(George Ede)씨가 대남에 장영중학교 (長榮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역시 대남에 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여학교에서는 전족을 가장 중시하여 금지하였다.
비록 많은 곳에서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기는 하지만, 맥스웰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장로회 선교진들은 대남을 중심으로 하여 대만 남부의 선교 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대만 북부에는 남부보다 조금 늦게 캐나다 장로회 소속의 마카이(Rev. George Leslie Mackay,馬偕)목사가 부임하면서 복음의 빛이 비취게 되었다. 그는 1871년 12월 29일 고웅에 도착하여 언어와 풍습을 익히면서, 선교 준비를 하다가, 북부지역이 아직도 복음의 미개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북부지역 개척을 스스로 자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3월 7일 대북의 담수(淡水)에 도착하였다. 대만 장로회에서는 이 날을 북부교회 선교일로 기념하고 있다. 마카이목사는 들판에서 목동들과 함께 생활하며 대만어를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선교 열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는 19세기 위대한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 설교, 교육, 의술 등 많은 분야에 풍부한 은사를 겸비한데다가, 굳건한 의지와 믿음을 갖고 용감히 선교에 임하여, 대만 북부의 선교 기지를 착실히 확보하여 갔다. 그 중에서도 그가 배웠던 의학상식은 그의 대만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전에 "치과의료선교"에 종사한 경험이 있어, 이가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빼주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선교사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의식을 제거하며, 그들과 쉽게 관계를 맺는데 좋은 매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만에서 모두 29년 동안 선교하면서, 적어도 4만개 이상의 이를 빼주었다고 한다.

2년 후 캐나다장로회는 프라서(Rev. J. B. Fraser, 華雅各)목사를 파송하여 마카이목사를 도와 대만 북부지역 선교를 강화하였다. 그는 의사여서 마카이목사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 북부지역의 선교는 신속하게 진전되었다.
맥
카이 목사의 실로 눈부신 선교 업적을 남겨 놓았다. 29년 동안 충성된 선교를 해서 북부 각 지역에 모두 60개의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을 뿐 아니라, 옥스포드 중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현지인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북부 지역 교회의 기초를 착실히 건립하였다. 1901년 6월2일 그는 58세의 나이로 그의 아름다운 선교 생애를 마쳤지만 아직도 대만인의 마음속에 그의 대만을 사랑하는 위대한 정신이 남아 있다. 대만 장로회에서는 그의 선교 정신을 기념하기위하여, 대북 중심가에 한국의 세브란스병원과 같은 규모의 "마카이기념병원"을 세우고 많은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4.일제하에서의 대만 기독교
1894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여, 1895년4월17일, 중일마관조약(中日馬觀條約)을 체결하여, 대만과 팽호지역의 모든 섬들이 일본의 통치하에 새로운 일본 식민지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대만 사람들은 완강히 반항했지만 역사적 흐름을 거역 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대만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종교 등에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여 1895부터 1905년까지 대만 교회는 신속히 발전하여 거의 2배 정도로 부흥 성장하였다. 일본 교회에서도 선교사를 파견하여 대만 선교에 참여하였지만 대만 교회와 일본 식민지 정부와의 긴장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특히 1931년부터 일본은 황민화 정책을 강화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교회에 많은 압력과 핍박을 가하였다. 1944년, 대만 신학교가 일본의 압력으로 휴교를 해야 했고, 모든 외국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쫓겨 가야 했다. 그래서 대만 교회는 1944년 11월23일부터 본의 아니게 외국 선교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대만은 이민 사회여서 각 종족마다 이민 온 시기가 다르다. 대만에 처음 이민 종족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말라시아계통의 남방민족의 하나라고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 구조가 남방계통의 언어에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대만에 이주하면서 평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명말청초에 정성공이 명의 잔류병을 이끌고 대만에 이주하면서, 고산으로 쫓겨 가야 했다. 이래서 그들을 고산족, 혹은 산지족이라고 하며, 최근에는 원주민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주민 부족들의 종류도 상당히 복잡하다. 그들의 인구는 전 대만인구의 2%밖에 안 되지만, 그 부족은 크게는 9족, 세분하면 15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각 부족간의 문화, 생활풍습과 언어는 물론 피부색, 얼굴모습 등이 전혀 달라 마치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다.

일
본은 자기들의 문화, 언어와 종교 등으로 원주민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는 50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주민에 대한 계획과 섭리를 인위적으로 거역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원주민 선교에 특별히 공이 큰 두 사람의 외국인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일본인 井上伊之助와 다른 한 사람은 캐나다 성공회의 자비 선교사 야트(N. T. Yates, 葉資)목사였다. 井上伊之助의 부친은 대만의 일본식민지정부 관리였지만, 1906년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井上伊之助는 기독교인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원주민 선교에 전념하였다. 야트 목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먼저 일본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언어를 익혀서 1934년 그가 대만에 왔을 때는 일본어를 유창히 할 수 있었다. 그는 대동(臺東)지역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전도 방식은 특이해서 교회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많은 원주민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비록 일본은 원주민선교를 금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고산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그러나 원주민들이 평지에 와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중에 지원(芝苑)여사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1924년 6월 1일 담수에서 세례를 받아 원주민으로서 첫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녀는 담수의 여학교에서 8개월동안 교육을 받고, 대만 장로회 북부 여전도회의 파견을 받아 동부의 화연(花蓮)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갖은 박해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원주민교회를 개척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원주민 교회의 어머니"라 칭하였다.

5. 해방 후의 대만 기독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여, 대만은 50년 만에 일본에서 해방되었고 국민당 정부가 대만을 인수하여 또 다른 정치운명에 진입하게 되었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에 놓였다. 특히 대만인과 국민당 정부와의 갈등은 1947년 228과 같은 동족상쟁의 비극적인 충돌을 낳았고 또 1949년에는 국공의 치열한 투쟁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하여 본토를 상실하고 대만으로 피난을 와야 했다. 그 당시 이주한 인구가 무려 백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이러한 혼란한 정국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대만 본토인들과 백만의 외성인의 마음속에 정국의 불안정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의문이 충만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고통과 마음속의 갈등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대륙에서 온 외성인중에 중국에서 벌써 복음을 받아드리고 훈련을 받은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시대적 사명감에 불타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다. 또 외국 선교 기관은 해방 후에 대만의 정국의 불안으로 관망하는 태도였지만, 50년대 이후 정국이 점차 안정되면서 대만 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대만의 기독교는 전무후무한 발전을 갖게 되었다. 해방 전후 겨우 37,000명 정도의 기독교 인구가 1960년에 380,000명으로 짧은15년 만에 무려 10배 이상으로 성장하였다. 교파수도 증가하여, 해방 전에는 겨우 영국과 캐나다 장로회밖에 없었지만, 해방 후 특히 50년대 이후에 많은 선교 단체들이 속속 대만 선교에 참여하여 1955년에 36개의 교파로 증가하였다. 또 본토 목회자들을 배양하기 위하여 신학교도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하여 10개의 신학교가 이 시기에 세워졌다. 또 평지의 성직자들이 자유로이 원주민지역에 선교할 수 있어 많은 평지 목회자들이 고산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원주민들이 복음을 받아 드렸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원주민들 중 85%가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러나 대단히 애석하게도 대만 교회는 급성장하는 교세를 적절한 정책으로 계속 성장시키지 못하여 60년대 이후에는 그 성장속도가 매우 완만할 뿐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는 오히려 퇴보하기까지 하였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60년대 이후 대만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경제발전에 주력하게 되어 전체 환경이 심령의 안정보다는 경제발전에 더욱 추구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급변하는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또 급성장하는 성도들을 정확히 교육시키지 못했으며 성장하는 교회의 필요로 목회자들을 속성으로 양육하다보니 당연히 질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 현지교회와 선교본부와의 갈등도 교회 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 요소가 되었다.

6. 결론
대만은 비록 남한의 1/3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섬나라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나라이다.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은 그 누구도 탐이 나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만을 "아름다운 섬(Formosa)"라고 칭한다.

대만은 이토록 아름답기 때문에 많은 대가도 치러야 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만도 청, 일본과 국민당정부의 서로 다른 정권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정국의 변동은 백성들의 심령의 불안을 초래하지만 오히려 복음 전파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다만 어렵게 타오르는 부흥의 불꽃이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왕왕 쉽게 사라져가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또 정치적인 요인으로 현재 대만 교회는 민남어로 예배드리는 대만인 계통의 교회와 국어로 예배드리는 외성인 계통의 교회로 크게 나뉘어져 있는데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도 대만 교회가 해결해야 할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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