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시좡족자치구 좡족에 대한 종족 연구는 중국 정부에 의해 출간된 종족 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지역연구 혹은 종족연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정부에 의해 출간된 충실한 자료를 번역해 내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씌어졌다. 중국 소수민족 55개 종족이 중국정부에 의해 출간된 충실한 종족 자료에 의해 통일된 양식으로 일정하게 번역되어 있다면 그 자료는 Operation China 에서의 종족 선교 정보와 함께 중국의 미전도 종족 연구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민족의 근원 좡족의 역사적 근원은 유구한데, 진한시대에 구월(瓯越)과 낙월(骆越)이 그들의 선조였으며, 동한 및 수당 시대에는 리(俚)와 요(僚)가 그들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다. 송대 이후에는 또한 “僮” “俍” “土”같은 이름이 역사책에 등장 한다. 해방 이후에는 일괄적으로 “僮”이라고 불리다가 1965년 주은래가 총리에게 건의를 해서 “僮”이라는 명칭을 “壯”으로 바꾸었다. 현 지역 내의 좡족은 청대 강희 년에 동란(東蘭), 남단(南丹), 의산(宜山)에서 들어왔으며 지금까지 약 십 이삼 대를 거치게 되었다. 1995년 융수지역에 좡족 인구는 63871명이이고 주요 분포는 삼방, 왕동, 대랑 등의 향, 전, 백운, 영수 등의 마을에도 소수가 살고 있다.
2. 풍속
생산 풍속: 좡족은 대부분 폐강(貝江)상류와 전채강(田寨江) 하류와 융강에 가까이 산다. 이 일대의 강 계곡 지역과 저산 지대는 기후가 온화하고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삼방, 왕동향지역의 교역시장은 활발하고 상품경제의 발전도 다른 소수민족 보다 빠르다. 경제 문화상에서 한족과의 교류가 비교적 많고 끊임없이 한족의 농업생산의 선진 기술을 받아 들여 생산 수준이 이미 지역 안의 한족과 비슷한 정도며 철제 생산 도구가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식은 쌀 위주이고 그 외 옥수수나 기타 건한 작물로 보충하고 있으며 양식은 기본적으로 자급하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에 판매한다.
이 밖에 토산품을 제배하는데 삼방, 왕동 일대에는 香菇(버섯 일종), 목이버섯, 벌꿀, 간순(干筍: 죽순의 일종), 찻잎, 종려나무 껍질 등을 생산하고 특히 香猪,香糯,香菇,香草 등이 유명하고 대량의 유채, 유동의 생산량은 전국에서 상위권에 달한다. 가정 수공예로는 멍석 짜기, 비 모자와 나무바가지 만들기 등이 있고 청대부터 민국 시대까지 융수지역의 계급 분화가 날로 심해져 농민들은 주인의 땅에 파종하고 무거운 임대료를 지불했으며, 많은 노역을 부담하였다. 민국시기에 좡족 사람들은 지주의 무거운 논 임대료 외에 병역, 세금, 세량(세금으로 내는 양식)을 부담했으며 천재지변을 당하거나 도적 때에게 갈취도 당하여서 좡족의 많은 마을들이 빈곤한 상태로 빠져 들게 되었다.
해방 후 도적 때를 몰아내고 착취제도를 뒤집어 사회질서의 안정을 구했고 인민들의 생활이 편안했으며 지역의 생산 활동도 활기를 띄게 되어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향상 되었다. 80년대로 접어든 이래로 가정 생산 책임제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고 이모작을 보급시키고 모내기를 보급시켜 양식 생산량의 대폭 증가와 임업생산과 각종 토산품생산에도 큰 발전을 입어 사람들의 생활이 눈에 뛰게 향상 되었다. 생활풍속
거주: 좡족의 마을은 밝고 넓으며, 식수 조건이 비교적 좋고 보통 성씨 별로 촌락을 이룬다. 큰 마을은 100여 호에 달하고 작은 마을은 2,30호 이다. 좡족의 가옥은 지역의 한족과 유사하며 다만 목재로 지은 가옥이 좀 많을 따름이다. 삼방, 왕동 일대에는 벽돌, 나무 구조의 층집이며, 위층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건물 위에는 목재판으로 덮어 놓았고 방과 방 사이도 목재로 막아 놓았다. 주방은 실내에 만들어져 있거나 따로 편방에 만들어 놓는데 최근 10년 동안 이러한 건축 방식에 변화가 생겨서 사람과 가축이 따로 떨어져 있고 부유한 농민은 철근 시멘트 구조의 단층주택을 지어 살며 위생 부분에도 큰 개선이 있게 되었다.
복장: 좡족의 복장의 각 지역이 대개 비슷하다. 부녀자들은 오른 옷깃 웃옷을 입고 통이 큰 바지를 입으며 젊은 부녀자들은 허리에 은고리를 두른 치마를 즐겨 입는다. 은팔찌와 은 혹은 옥 귀걸이를 걸며 꽃을 수놓은 신발을 신는다. 대랑 일대에 노년의 부녀자들은 검은 두건을 쓰고 젊은 부녀자들은 여름엔 흰 두건 쓰고 봄가을에는 체크무늬의 두건을 쓴다. 남자는 당장(唐裝 )을 즐겨 입고 바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남색과 흑색을 입는다. 어린 아이들은 머리에 “장수부귀”라는 글자가 수놓아진 모자를 쓴다. 옷감은 옛날엔 대부분 집에서 짠 무명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기계로 짠 옷감을 사용한다. 80년대 이후 좡족 청년들의 복장은 한족과 별 다른 차이가 없어졌다.
음식: 좡족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옥수수, 조, 건답벼, 고구마, 토란 등을 보충해서 먹으며 일식삼찬을 먹는다. 삼방, 왕동 일대 좡족은 찹쌀밥을 즐겨 먹으며 절기를 보낼 때 송편이나 유단(油蛋 )을 만들어 먹고 이로 손님을 대접한다. 대랑 일대에는 유차는 집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먹는 간식으로 쓰이고 육류는 돼지, 소, 닭, 오리 및 어류를 먹고 또한 각종 고기를 소금에 절여 먹는 것을 좋아한다.
3. 결혼, 가정, 성씨
결혼: 좡족의 결혼은 대부분 중개인을 통해 부모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며 설령 남녀가 서로 연회 상에서 알게 되어 뜻이 맞더라도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중개인을 통해서 여자 측에 사주팔자를 구한다. 사주팔자가 남자 측에 도착하면 먼저 조상신의 위패아래에 3일간 두었다가 길흉을 점친다. 3일내에 만약 가축이 죽거나 그릇이 깨어지거나 집안사람이 병으로 죽거나하면 불길한 것으로 여겨 사주와 함께 돈을 조금 넣어 여자 측으로 돌려보낸다.
만약 다른 불길한 징조가 없으면 점쟁이를 불러 사주팔자에 의한 결혼 여부를 점치는데 만약 남녀의 점괘가 상극이 아니면 여자 측에 통보해서 결혼 기일을 잡는다. 남자 측은 결혼 날짜 한 달 전에 날을 택해 여자 측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남자측은 사촌 혹은 형제와 중매인을 동반하여 여자 집에 간다. 해방 전에 보통 중산층 이상의 집에서는 대략 300원 이상의 돈을 보내고 여자측은 이 납폐로 혼수의 밑천을 삼았다.
좡족 결혼은 보통 혼수를 중시하지 않고 돈이 있는 집안에서는 혼수를 좀 준비해 시집을 보냈다. 신부는 가마를 타지 않고 신혼부부는 보통 절하지 않으며 동거하지 않는다. 결혼 하는 날 남자측은 남자 인솔 무리와 여자 인솔무리를 신부 집으로 보내는데 여자들은 반드시 미혼의 부모가 다 살아 계시는 집이여야하고 다른 남자 10~20명 정도와 고수(鼓手)를 동반하여 보낸다. 여자 집에 도착한 후 각종 예물을 조상신 위패 앞에 드린다. 붉은 촛불을 든 한 무리가 밝게 비추고 향 연기가 주위를 감싸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이때 여자 측에서는 신부 맞으러 온 무리들을 초청하여 방안으로 들여 대접한다. 시간이 되어 떠날 때 즈음에 신부 측 친척 중에 올케와 시누이가 규방에서 신부를 부축해서 나오면 이때 신부는 울게 되는데 부모님과 친척들을 떠나게 되는 걸 아쉬워하는 의미를 가진다. 친지들이 우산을 펴서 대문까지 마중을 나가는데 대문을 나가게 되면 울음은 그친다. 나가면 들러리들이 함께 길을 가게 되는데 들러리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한 명의 아가씨는 남자측이 보낸 여자들만큼 고르는 조건이 엄격하다. 그 밖에 친척 중에 한두 명의 남자들을 여자 측에서 보내어 남자 측 부모님들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한다. 후행행렬이 출발하기 전에 여자 한 명이 붉은 색으로 색깔 입힌 찹쌀 광주리를 들고 앞에서 걸으며 남자 측 집에 도착해 문안을 드린다.
좡족의 딸을 시집보낼 때에 연회를 여는데 남자측이 보낸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 외에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 대접을 한다. 연회에 온 친척들에게 모두 선물을 보내는데 옷, 신발, 손수건등을 선물한다.
좡족들의 축하 선물은 신랑의 외삼촌 선물이 제일 큰데 쌀 광주리(매 광주리는 쌀 40근 이상)가 가장 많고 쌀 광주리 위에 축의금을 꽂아 놓고 사위벌 되는 사람들은 양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낸다.
좡족의 결혼 연회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보통 30~40테이블을 마련 한다. 신부 및 함께 온 들러리는 신랑 집에서 이틀을 자는데 그 기간 중에 마을의 남자 총각들이 무리를 지어 들러리들과 화답가를 부르면서 연애를 한다.
좡족은 결혼 한 후에 보통 1~2년 안에 남편 집에서 같이 살지 않는데 아이를 낳게 되면 그때부터 남편과 같이 산다. 좡족은 결혼 할 때 동성을 피하지 않으며 삼방 일대에서는 5대이상만 넘으면 결혼을 할 수 있다.
좡족에는 데릴사위제가 있는데 여자 측에서 친구를 불러 연회를 연다. 혼사이후에 데릴사위와 여자측은 마을의 족장을 초대해 재산 상속권 등을 상의하고 계약을 체결한 후 족장이 도장을 찍고 계약서를 데릴사위에게 주고 계약서에 따라 제반 사항을 처리한다. 데릴사위는 여자 측 부모님을 부양할 의무를 가지게 되고 자녀를 낳으면 여자 측의 성씨를 따라 이름을 짓는다.
과부는 재가 할 수 있으며 부모형제 및 친척들은 이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는다. 단 출가를 할 때 날이 밝아지기 전에 후문이나 측문으로 나가야 하며 마중 나가는 무리도 전부 자녀를 낳은 부녀자들이어야 한다.
가정: 좡족의 가정은 부계중심의 가장제도이며 중산층 이하는 일부일처제를 엄히 지키는데 다만 본처가 자녀를 낳지 못할 경우에 대를 잇기 위해 첩을 들이는 경우가 있으며, 부자들은 대부분 일부다처제를 하고 있다.
아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나은 후 2, 3년이 지나야 부모, 형제와 떨어져 분가하며 부모는 어린 형제들과 같이 살고 막내가 결혼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부모의 양로 문제를 상의한다. 사유제산 시대에는 논, 방, 살림 등의 재산은 남자가 물려받고 여자는 상속권이 없었으며 시집갈 때 쓴 약간의 논과 옷가지, 약간의 돈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양로 논을 경작할 권리 가 있었으며 해방 후 제도가 개혁되어 부모는 공동으로 부양하고 돌아가시면 같이 상의해서 상을 치르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은 여러 일을 분담해서 같이 하는데 부모의 연세가 50이 넘으면 더 이상 주요 노동에 관련된 일은 하지 않고 주로 가족 제반 사항을 상의하고 도와주며 손녀를 돌본다. 남자는 주로 농사에 관계된 일을 하는데 추수 때에는 남녀가 같이 일을 한다.
성씨: 좡족은 韋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黃, 羅, 歐, 覃 林, 謝, 楊, 李 등이 있다.
4. 장례 좡족은 목과토장을 하고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실내에 두고 남자면 머리를 밀고 여자면 머리를 빗으로 빗기는데 친 자식들이 물가에 가서 물을 길러 오면서 향을 피우고 돈을 물 속에 던지는데 이것으로 “물을 사는 돈”을 사는 풍속이 있다. 후에 죽은 사람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 기우는데 한 벌을 입히고 두 벌은 입히지 않으며 검은 옷을 입히되 흰 옷은 입히지 않고 굵은 대마 천으로 몸을 감는 끈으로 삼는다. 죽은 사람이 36살이 넘으면 관에 검은 칠을 할 수 있고 36살 이하면 백색 관을 사용한다.
초상 기간에 육류를 먹는 것은 금기 되고 다만 콩류, 호박류 등의 채소로 손님을 대접하고 상을 치르는 사람과 친지 친구는 모두 머리에 “带孝”인 흰 천을 머리에 두른다. 자녀들은 상복을 입고 풀로 엮은 신발을 신고서 경야(經夜)한다. 친지들이 조문을 오면 상주가 풀 가마니 위에서 꿇어서 인사하고 친지들이 일으켜 세워주고 나서 인사를 받는다. 만약 다른 집안에서 조문을 오면 자녀들도 반드시 밖에 나가 꿇어서 조문객을 맞이해야 하는데 이는 부모님께 효도를 끝까지 다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모심이 세밀하지 못한 점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위가 만약 장인어른의 초상을 당하면 벼 이삭과 풀을 엮어서 말을 만들고 삼베로 안장을 씌우고 상갓집 깃대 아래에다 두는데 죽은 자로 하여금 말을 타고 하늘로 가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출관하는 날 제사음식을 갖다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어떤 사람은 사람을 청해 경문을 읽기도 한다. 출관할 때 상주는 위패를 들고 행렬 맨 앞에서 가고 힘든 곳을 만나면 꿇어서 친구들이 힘을 내어 관을 들어 줄 것을 부탁한다. 관이 무덤에 도착하면 술사가 조문을 읽고 수탉의 벼슬을 입으로 물어뜯어 피를 내어 종이에 묻힌 후 닭을 무덤 안으로 던져 넣었다가 건져낸 후에 관을 무덤 안으로 넣는다. 이때 맏이가 죽은 자를 향해 동서남북을 짚어 주고 몇 삽의 흙을 덮어주고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 올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날 상주는 친지 친구, 이웃을 불러 대접을 한다.
탈상(脫喪)은 3년 상을 한 후에 하며 기한이 다 차면 삼생(三牲)을 준비해 놓고 위패를 태움으로서 탈상을 한다. 요즘은 일년 혹은 반년 상을 하며 보통 음력 1월 27일 혹은 7월 초순에 위패를 태우고 첫 일주일을 “頭七”이라 하고 첫 “춘시절”에 자녀들이 무덤을 정리하는데 “攔社”라고 한다. 지금의 여러 복잡한 제사 형식은 많이 간소화 되었다.
5. 종교 신앙
기독교: 20년대 銀濟世가 삼방지역에 와서 전도를 했고 이후 이산 경원진 및 융현 장안진에서 삼방으로 계속 사람을 보내 선교하였고 성도가 많아 졌으나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1936년에는 성도수가 10여명이 그쳤지만 1938년 장안진교회가 罗品芳(여, 광동인)을 삼방지역에 보내 성도수가 100여명에 달했는데 여 성도가 비교적 많았다. 1946년 교회가 삼방에 복음당을 건립했으며 1949년 겨울 罗品芳이 삼방을 떠나고 책임 맡을 사람이 없어 교회는 전도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80년대 전도활동이 다시 시작되어 1983년 교회 예배당을 다시 지었고 지금은 80여명 정도의 성도가 있다.
불교: 불교는 좡족지역에서는 그리 성행하지 않았다. 20년대 삼방 신촌에 韦春姑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신촌의 뒤에 비구니 절을 건립해 당시에 고통당하고, 비난당하고 억압당하고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여자들을 수용해 그 절에 모여 채소를 먹으며 생활 했는데 해방 이후에 점차 비구니들이 감소하여 70년대 이르러 비구니 절은 완전 해체 되었다. 승려는 아주 소수이며 가끔 시주를 받으며 생활하는 “香公”이 있을 따름이다.
미신, 금기 좡족은 조상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자연을 숭배하는데 예를 들면 산신, 수신, 토지신, 화로 신, 태양 신 등을 들 수 있다. 좡족 청년들이 산에 가서 사냥을 할 때 반드시 향, 초, 지전(紙錢), 술, 고기를 준비해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 보호를 구한다. 산 짐승을 사냥했을 때는 반드시 산신에게 답례를 해야 하며 이후에야 사냥물을 서로 나눈다. 간혹 불길한 물건을 만나면 척사를 하여 액 막이를 한다. 종종 식초를 표주박에 담아 강가에서 자갈 하나를 주워와 불에 빨갛게 달군 후에 식초 안에 넣어서 증기가 나오면 이를 실내에 두거나 사람 근처에 가져다 대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쁜 기운이 몸을 따라다니고 일이 성사 되지 않으며 재물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믿는다.
좡족은 또한 금기가 많은데 일을 하러 길을 나설 때 임산부 만나는 것을 피하며, 집에 산모가 있을 때 문에다가 벼나 풀을 끼워서 외부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기한이 아직 다 되지 않은 산모는 밖에 나가거나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길을 멀리 나서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불길한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익힌 음식에 생것을 같이 먹으면 안 되는데 만약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밖을 나가지 못한다. 나가서 배를 타고 배에서 밥을 먹을 때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을 때 숟가락이 그릇의 밑에 닿으면 안 되는데 이는 배가 좌초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려 육지로 내려 갈 때 “上岸(육지에 오르다)”이라하지 않고 “上山(산에 오르다)”혹은 “上坡(비탈길을 오르다)”라고 말을 한다.
6. 절기 춘절 좡족의 절기는 춘절(설날)이 가장 큰 명절인데 12월 하순부터 시작해 여러 곳을 청소해 깨끗이 하고 집집마다 돼지를 잡고 , 술을 빚고, 츠바(糍粑)를 빻고, 춘연(春連)을 붙여서 설을 보낼 준비를 한다. 전날 저녁 귀중품을 진설해 놓고 밝게 불을 밝혀 향을 피우고 폭죽을 터트리며 절기를 보낸다. 새해에 첫 아침은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소원을 빌며 행운의 말을 한다. 여자들은 앞 다투어 냇가에 가서 새 물을 “사서” 오고 어떤 이는 아침에 불을 피워 울타리 나무 대를 태우는데 이는 형제자매의 화목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초이튿날부터 시작해서 부녀자들은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 부모 친지들을 뵙는다.
정월 초이튿날부터 15일 사이의 기간에 좡족 마을에서는 사자춤, 용등 춤을 추고 여러 마을을 돌면서 새해의 기쁨을 누린다. 이밖에 채조(채調)와 계희(桂戱)를 공연하기도 한다. 이 기간 중에 좡족 마을의 논과 길가, 산자락에서 남녀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화답가를 부르며 연애를 하는데 서로의 뜻이 맞으면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기념을 한다. 춘절 기간에 대랑 일대에 남녀 청년들은 제기를 차는데 청년 남녀 3~5명 혹 7~8명이 함께 노는데 먼저 찬 제기를 누가 손으로 잡으면 아무에게 던져서 맞출 수 있는데(허벅다리 부분) 그 다음은 이긴 사람부터 제기를 차게 된다(제기를 맞은 사람은 보통 자기의 관심있는 이성이다).
삼월 삼가절 음력 3월 초 3일에 좡족의 대가절(對歌節)이다. 좡족의 남녀 청년들이 위패를 안고 화답가를 부르면서 밤을 센다. 대랑 일대에 남녀 청년들은 이날 쌍하절에 모여 화답가를 부르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활기차다. 기타 절기 이월사(二月社)와 청명제, 단오, 추석 등이 있는데 한족과 동일하다.
7. 사회상 좡족 사람들은 착한 일을 도모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데 공익사업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다리를 놓고, 도로를 보수하는 데에도 기꺼이 자금과 노동력을 보태어 일을 한다. 좡족은 또한 예절로서 사람을 대하고 손님 맞기를 좋아한다. 대랑 일대에는 친구나 혹은 아는 사람에 상관없이 유차로 대접하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이면 다른 음식을 준비해 싸서 준다. 평상시에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누구를 막론하고 안부를 물으며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한 연배면“老表”라 부르고 자기보다 많으면 “表哥”, “表姐”, “表嫂”라고 부르고 부모님과 동년배면 “表叔”, “表伯”, “表嬸”, “表妈”로 부른다. 이러한 예절과 전통은 오늘날까지 잘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독거노인이 있을 때 이웃 친지들이 함께 도와주고 보살펴 주는 전통도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사회폐단으로 도박 행위가 오늘날까지 근절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김현일/ CUM중국선교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