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월이 되면 중국선교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일들이 여럿 있습니다. 1912년 9월 1일에 열린 한국 장로교회의 첫 번째 총회에서 산동성 선교를 결의한 일, 1950년 9월 22일, 「인민일보」에 “새로운 중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중국기독교가 노력할 일(中國基督敎在新中國建設中努力的途徑)”이 게재되어 삼자운동이 시작된 일, 1979년 9월에 상해 목은당(沐恩堂)교회가 문들 닫았던 교회들 가운데 제일 먼저 문을 연 일 등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에 온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인 모리슨에 대한 생각이 가장 강하게 떠오릅니다. 모리슨이 중국 땅에 첫발을 디딘 날이 9월 4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리슨은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미국을 거쳐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영국에서 바로 중국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영국과 중국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동인도회사가 다른 목적으로 배를 타는 것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이 항해는 모리슨의 험난한 중국선교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몹시 험난했습니다. 화재를 만났고 폭풍우도 만났으며 식수 부족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난파한 네덜란드 배의 선원들을 구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뉴욕 항에서 중국까지 넉 달이 걸리는 긴 항해였습니다. 모리슨이 탄 트라이던트(The Trident)호의 선원들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모리슨에게 당신이 과연 우상숭배에 젖은 중국의 풍습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모리슨의 대답은 중국선교에 뜻을 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것을 믿습니다!”
모리슨이 목사안수를 받고 긴 항해 끝에 중국에 도착한 것은 1807년의 일입니다. 3년 뒤의 구월이 되면 우리는 모리슨의 입화(入華) 20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리슨의 중국 도착 200년은 곧 중국기독교역사 200년을 의미합니다. 중국교회가 모리슨 서거 100년을 기념하여 1934년에 8월 1일에 세운 기념비도 “기독교의 중국선교는 모리슨에 의해 시작되었다(基督敎辨正宗之來華佈敎也 自馬禮遜先生)”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년 초, 모리슨의 전기가 국내 한 사학자에 의해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선 100쪽이 넘는 방대한 참고문헌 목록이 눈을 끕니다. 그 가운데는 일본어로 된 문헌들이 많은데 일본에서 중국선교에 대한 연구가 이와 같이 풍성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퍽 의외로 느껴지기도 했고 새로운 도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카오에는 모리슨기념교회가 있고 그 뒤에 모리슨과 그의 가족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카오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이 곳 방문을 빼놓지 않습니다. 묘지가 있는 곳의 거리 이름이 연승가(連勝街)와 신승가(新勝街)이어서 모리슨은 중국 선교에서 승리자였고, 우리는 새로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중국을 주께로」가을호는 문서선교를 특집으로 했습니다. 다시 모리슨의 이야기인데 모리슨은 문서선교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기 한 대를 가지고 와서 많은 문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모리슨의 전기는 이 일을 소개하면서 “당시 직접 선교가 불가능한 상황 하에서 문서 선교야말로 그 어떠한 선교방법보다도 효과적인 선교방법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중국에 직접선교가 불가능한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중국선교에서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유관지ㅣ 발행인. 목양교회 담임목사, 호서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