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워싱턴과 베이징 사이의 정상회담 테이블에 한 목회자의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두 달 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LA공항에 내렸다. 국가와 국가가 협상하는 자리에서 한 사람의 신앙과 자유가 의제로 다뤄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의 무게를 말해준다. 베이징(北京) 시온교회 진밍르(金明日, 김명일) 목사의 석방은 외교적 성과로 보도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 그것은 협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포기한 적 없는 하나의 원칙 문제였다. 예배할 자유는 그 누구도 흥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원칙 말이다.
이 글은 진밍르 목사의 언론들과의 인터뷰를 뼈대로, 국제 인권·종교자유 기구의 공개 자료와 주요 외신 보도를 대조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더해 완성했다. 한 사람의 회고를 넘어, 지난 반세기 넘게 형태만 바꾸어 이어져 온 중국교회의 실상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감방을 나서던 그 순간, 제 손에 들려 있던 건 짐이 아니라 성경 한 권이었다” 2026년 7월 3일 점심, 여느 날처럼 휴식을 준비하던 그에게 갑작스러운 호출이 왔다. 그는 처음엔 또 한 번의 진술을 받으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담당자가 건넨 한마디는 뜻밖이었다. 짐을 챙기라는 것.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수감 생활 동안 그의 손에 남은 것이라곤 성경 한 권뿐이었다. 사실 중국의 그리스도인 수감자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성경조차 지급되지 않는다. 그와 동료들이 한 달 가까이 항의했고, 가족과 변호인들까지 힘을 보탠 끝에야 겨우 성경 한 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는 그 성경을 감방에 남겨진 동료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규정상 가지고 나가야만 했다. 결국 그는 그 낡은 성경 한 권을 품에 안고 자유의 땅으로 걸어 나왔다.
가족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약 9개월의 구금 기간 그는 체중이 크게 줄고 머리카락도 대부분 하얗게 셌다. 그러나 정신만은 또렷했고, 오히려 담담했다고 한다. 딸 그레이스 진 드렉셀은 아버지가 LA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식을 미국 정부로부터 확인받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때까지도 그런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광장의 총성 그리고 회심 이야기는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이징대 지구물리학과 3학년이던 진밍르는 1989년 봄, 캠퍼스 전체가 술렁이던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같은 반 친구 두 명이 훗날 수배자 명단에 오를 만큼, 그의 세대는 뜨거웠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6월 4일의 참극에서 비껴가게 했다. 집안 사정으로 잠시 베이징을 떠나 있던 그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돌아왔을 때 이미 도시가 마비되고 총성이 울리던, 완전히 다른 풍경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사흘 뒤인 6월 9일에야 겨우 베이징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격변은 스물두 살 청년의 인생관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방황하던 그에게 누군가 복음을 전했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처음 신앙을 갖게 된 곳은 삼자교회, 즉 중국 정부 공인교회의 한 조선족 모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2000년에는 베이징의 한 삼자교회에서 목회자로 세워졌다. 십 년 가까이 삼자 체제 안에서 사역하던 그는 20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톈안먼 세대의 많은 이들이 정치적 냉소나 물질주의로 방향을 튼 것과 달리, 그는 신앙으로 방향을 틀었다. 학자들은 1989년 이후 수년간 중국 대도시 지식인 사회에서 크리스천으로 개종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해 왔다. 정치적 이상이 좌절된 자리에 초월적 가치에 대한 갈망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진밍르 목사의 회심 역시 그 흐름 위에 있었다.
“국영기업처럼 소유된 신앙” - 삼자를 떠나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곤 한다. 왜 삼자교회를 떠났느냐고. 그는 그 질문에 좀처럼 길게 답하지 않았다. 이유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1954년, 정권을 잡은 중국공산당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조직으로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삼자’란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 즉 외국의 재정·인사·선교 지원 없이 중국인 스스로 교회를 운영한다는 명분을 담은 이름이었다. 명목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지만, 실질적 목적은 중국교회와 해외 교회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데 있었다. 오늘날 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는 사실상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 산하 조직으로 편입되어 있다.
삼자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신앙 공동체를 지켰던 이들은 예외 없이 대가를 치렀다. 베이징의 원로 설교자 왕밍다오(王明道)는 삼자 가입을 거부하다 투옥되었고, 그의 신앙 노선을 이었던 위안샹천(袁相忱) 목사는 삼자 체제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1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오픈도어스 등 국제인권단체는 그를 “중국 가정교회운동의 우뚝 선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진밍르 목사의 스승 역시 이십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인물로, 이 계보 위에 그의 신앙 여정이 놓여 있다. 이렇게 1950년대에 이미 중국교회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도시에서는 삼자교회가 먼저 문을 열었고, 농촌에서는 삼자조직이 미처 자리 잡지 못한 사이 자생적인 가정교회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도시는 삼자, 농촌은 가정교회라는 이원 구조가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1990년대 이후 도시에도 가정교회가 늘어나며 두 흐름은 서서히 뒤섞이기 시작했다.
2007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결국 삼자로 복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삼자는 당과 정부가 소유권과 행정권을 직접 쥐고 있는, 마치 국영기업과 같은 구조라는 것이었다. 절망 가운데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했던 그에게 남은 소명은 하나였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다.
20명으로 시작한 교회, 베이징 최대의 가정교회로 2007년, 시온교회는 단 20명으로 문을 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1년 뒤 그 작은 모임이 베이징에서 손꼽는 규모의 가정교회로 자라나리라는 것을. 시온교회는 한때 1,500명이 넘는 성도가 함께 모이던 공동체가 됐다. 교회는 처음부터 투명성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2008년, 시온교회는 정교한 정관을 제정하고 재정 운영 원칙을 세웠다. 목회자는 정해진 사례비를 받되, 그 액수를 정하는 회의에는 목회자 본인이 참여하지 않는다.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한 원칙이었다. 진밍르 목사가 2019년 기준으로 받은 한 달 사례비는 1만 9,000위안, 통신비 등을 포함한 전액이었다. 박사학위를 지닌 30년 경력의 목회자치고는 절대 많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수입은 오직 성도들의 자발적 헌금뿐이었다. 실명제도 없었고, 강요도 없었다. 그가 10여 년의 설교 가운데 헌금에 관해 언급한 것은 단 네 차례뿐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매년 예산은 집사와 장로들이 편성하고, 3월 성도대표대회에서 전년도 결산과 그해 예산을 공개했다. 그는 이 구조가 자신이 훗날 검찰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온교회의 성장은 결코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 종교사회 학자들은 1949년 공산정권 수립 당시 약 100만 명 수준이던 중국 내 개신교인 수가, 2010년 무렵 5,000만 명 안팎으로 그리고 2020년대 들어와서는 많게는 1억 명 이상으로까지 추정했다. 이는 2025년 12월 31일 기준 1억 128만 6,000명에 달하는 중국공산당원 수에 필적하는 규모다. 국가가 종교를 억누르는 동안에도 신앙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바로 그 성장 속도가 당국의 경계심을 더 키운 배경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감시 카메라 24대 - 균열의 시작 2018년 3월, 정부는 시온교회 예배당에 감시 카메라 24대를 설치하라고 통보했다. 교회는 단호히 거부했다. 예배는 신성한 행위이며, 그것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앙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해 여름, 진밍르 목사는 종교 당국의 단속과 십자가 철거 등에 항의하는 전국 가정교회 목회자 약 200명의 연서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약 70명의 공무원과 공안이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친 시온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간판이 뜯겨 나가고 집기가 압수됐다. 관할 차오양(朝陽)구 민정국은 시온교회가 정식 등록 없이 사회단체 명의로 활동해 왔다는 이유를 들어 교회를 불법 단체로 규정했다. 이는 중국공산당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집권 이후 강화되어 온 종교 통제 기조의 연장선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12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대표적 가정교회인 이른비언약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왕이(王怡) 담임목사를 비롯해 성도 1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왕 목사는 1년여 뒤 국가전복선동 등의 혐의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시온교회와 이른바언약교회 두 사건은 나란히, 도시형 미등록 교회에 대한 중국 당국의 전방위 압박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기록된다.
이후 시온교회에 대한 압박은 해가 갈수록 거세졌다. 거처를 정할 때마다 압력이 들어왔고, 다른 도시를 방문하면 공항에서부터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교회는 1,500명 규모의 대형 예배를 포기하고, 수십 개의 소모임으로 흩어져야 했다. 한때는 카페와 서점까지 갖췄던 널찍한 예배 공간을 잃은 대신, 그들은 새로운 표어를 만들어냈다. ‘걷는 예배’. 한곳에 머무르면 체포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에, 성도들은 이어폰으로 미리 녹음된 찬양과 설교를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찾아왔다. 시온교회는 가장 먼저 줌(Zoom)으로 예배를 시작한 교회 중 하나였다. 놀랍게도 반응은 이어폰 예배보다 훨씬 뜨거웠다. 한창때는 3,300여 명이 온라인 예배에 접속했고, 갈 곳을 잃은 다른 교회의 목회자 1,000여 명이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시온교회는 자비를 들여 줌 계정을 지원하고 다른 교회 사역자들을 교육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중국교회 사이의 연대를 넓혀갔다.
다만 그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온라인은 방편일 뿐 시온교회는 결코 ‘인터넷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온라인으로 만난 이들을 직접 찾아가 오프라인 모임을 독려했고, 그렇게 몇 년 사이 전국 수십 개 도시에 100여 개의 예배 처소가 세워졌다. 온라인 기도 모임에는 한때 수천 명, 많게는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접속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바로 이 전국적인 확장이 정부의 눈에 걸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25년 10월 10일 밤 - 체포 그날 저녁, 그는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여러 조의 사람이 밀려들었다. 체포영장이 제시되었고, 컴퓨터와 휴대전화, 하드디스크 그리고 서재에 있던 2,000여 권의 책이 모조리 압수당했다. 함께 있던 장모까지 조사실로 끌려갔다. 다음 날 새벽 2시, 그는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검거가 함께 이루어졌다.
베이징, 선전(深圳), 상하이(上海), 청두, 베이하이(北海) 등 여러 도시에서 시온교회 소속 목회자와 사역자, 성도 등 최소 20명 이상, 많게는 30명에 가까운 인원이 체포되거나 종적을 감췄다. 이들 상당수가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베이하이의 구치소 두 곳으로 이감되었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와 신병 조치가 이어지며, 어느 시점에는 여성 9명, 남성 9명 등 18명이 구치소에 남아 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공안부가 직접 사건을 지휘한 전국 단위의 조직적 작전이었다.
국제 인권단체와 외신은 이를 2018년 이후 최대 규모, 나아가 지난 40여 년 사이 중국 도시 가정교회를 겨냥한 가장 광범위한 단속으로 평가했다. 시온교회 측은 체포 이틀 뒤인 10월 12일 성명을 내고, 구금된 이들의 유일한 ‘혐의’는 평화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섬긴 것뿐이라고 밝혔다.
체포가 시작되던 그날, 교회 지도부는 신속히 결단했다. 아직 붙잡히지 않은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즉시 중국을 떠나라고 요청했고, 해외에 있던 이들에게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판단이었다.
구치소의 시간 - 두려움 대신 정돈 역설적이게도, 실제 심문이 시작되자 그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자신이 실제로 행한 일들을 이야기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국은 이미 교회 운영에 관한 상당량의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구치소에서 그가 가장 먼저 마음을 쓴 일은,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들이 그의 지난 설교와 저작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쩌면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사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골몰했다.
또 하나 절실했던 것은 책이었다. 구치소는 교도소와 달리 독서 시간이 허락되지만, 비치된 책의 수준이 형편없었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책을 요청했고, 때로는 담당 교도관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한 번은 장모가 변호인을 통해 아직도 책이 필요하냐고, 곧 나올 텐데 그런다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 계산하고 있었다. 기소와 재판, 그리고 항소까지 고려하면 최소 2년 이상은 구치소에 머물러야 할 수 있다고. 그 현실적인 예측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담담하게 만들었다.
“나는 죄가 없다” - 죄명과의 싸움 당국이 처음 그에게 씌운 혐의는 ‘불법정보망이용죄’였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이 죄명이 통상 두 가지 경우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나는 개인정보 도용이나 국가 주요 통신망 파괴 같은 사이버 범죄, 다른 하나는 인터넷을 이용해 자살 등 범죄를 교사하는 행위였다. 그는 담담히 반박했다. 자신은 인터넷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하기 위함이었다고.
이후 당국은 죄명을 ‘불법경영죄’로 바꾸었다. 2018년 탄압 이후 시온교회는 대형 예배를 소그룹으로 쪼개야 했고, 그만큼 더 많은 사역자와 소그룹 리더를 양성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가정에서 운영하는 성경학교였다. 교재비와 식비, 강사 사례 등을 위해 등록비 300위안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당국은 이를 두고 정식 인가 없이 교육 상품을 판매한 불법 영업으로 몰아갔다.
그는 이 논리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세계 어느 교회든, 심지어 삼자교회조차 자체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 전도 과정, 신앙 정착 과정 그리고 사역자 훈련 과정 등. 이 셋은 어느 교단에나 있는 표준적인 체계다. 정상적인 시장가라면 이십여 시간짜리 강의 하나에 수천 위안은 받아야 하지만, 시온교회는 고작 300위안을 받았고, 그마저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는 장학금 형태로 되돌려주었다. 그는 이 구조가 결코 ‘영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가장 참담했던 순간은 검찰이 성도들의 헌금과 교회의 사역자 부양을 ‘사기 행위’로 규정하려 했을 때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의 굴레를 써왔다는 사실을 담담히 짚었다. 1950년대에는 ‘반혁명죄’, 1980년대에는 ‘이단 사교’ 그리고 2020년대에는 ‘국가전복죄’. 죄명의 이름은 시대마다 바뀌었지만, 겨냥하는 대상은 언제나 같았다는 것이다. 몇 편의 설교로 국가 전체가 흔들릴 만큼, 정말 그렇게 취약한 나라이냐고 그는 되물었다.
심문 과정에서 담당 검사장은 흥미로운 계산을 내놓았다. 7년하고도 한 달 동안 교회가 그에게 지급한 금액을 모두 합쳐도 145만 위안, 결코 큰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출 내역을 살피던 검사는 그가 책값 외에 별다른 지출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느냐고.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 짧은 답 앞에서, 검사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20여 차례에 걸친 심문 동안 그는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진술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이름들만은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정직하게 임한 결과, 훗날 당국이 파악한 정황과 그의 진술은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감방 안의 목회 - “교주님”이라 불리다 구치소에서 그는 뜻밖의 별명을 얻었다. 그곳의 수감자들은 목사라는 호칭보다 무협소설 속 방파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말인 ‘교주’라는 표현을 더 즐겨 썼다. 베이징대 출신에, 박사학위에, 이제는 ‘교주’까지. 그는 웃으며 회상했다. 이 구치소가 이렇게 많은 박사와 목사, ‘교주’를 한꺼번에 수용해 본 적이 없었을 거라고.
수감자들은 그를 존중했다. 그는 성경이 손에 들어온 뒤로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읽기를 권했고, 병을 앓거나 재판을 앞둔 어려운 처지의 이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해 주었다. 감시하던 교도관들조차 그의 방으로 자리를 옮겨 오는 일이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공식적으로는 전도를 금지하는 경고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은 전도가 아니라 그저 자기 삶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었다고 했다.
“국가는 지금 전쟁 상태다” - 신앙과 정치를 말하다 언론들과의 대화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향했다. 중국 사회가 앞으로 마주할 민주화나 체제 전환의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난제라는 지적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종교가 정치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정교일치의 위험성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사회는 헌법이라는 공동의 합의 위에 서 있다.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이 있든 없든, 어떤 사상을 지지하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최상위 규범이 바로 헌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 정치집단, 정당이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리고 그 지배 논리마저 시대에 따라 임의로 바뀌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그는 담담히 말을 맺었다. 지금 중국 사회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전쟁 상태에 놓여 있다.
국제사회는 어떻게 움직였나 진밍르 목사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태평양 건너에서는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딸 그레이스 진 드렉셀은 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접한 직후부터 언론과 의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끌던 온라인 기도 모임에 한때 1만 명 가까운 인원이 모였을 만큼 시온교회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등록 교회 중 하나였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정식 선고조차 받지 못한 채 구금돼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알렸다.
미국 의회는 초당적으로 움직였다. 상원은 테드 크루즈, 크리스 쿤스 의원 등이 주도한 결의안을 통해 진밍르 목사와 시온교회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하원에서도 관련 결의안이 추진됐다. 여러 상원의원은 신앙을 이유로 한 구금은 어떤 정부에게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취지의 견해를 밝혔다.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그를 양심의 이유로 구금된 인물로 등재하고, 그가 2018년 시온교회 폐쇄 이후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출국 금지, 심지어 회유를 위한 부적절한 접촉 의혹에 시달려 왔다고 기록했다.
전환점은 2026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시진핑 국가주석 간의 정상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이 진(金) 목사의 구금 문제를 직접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두 달여 만인 7월 3일, 그는 석방되어 이튿날 LA에 도착했다. 중국 당국은 이를 인도적 조치로 설명했고, 국제 인권단체 차이나에이드(ChinaAid)는 “깊은 감사와 함께” 그의 석방 소식을 알렸다.
한국교회도 초기부터 진밍르 목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힘을 보탰다. 한국로잔위원회(의장 이재훈 목사)는 2025년 10월 14일 담화문을 통해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가 봐 왔듯이, 고난은 하나님의 전략이며 교회를 각성시키고 새롭게 하는 계기가 돼왔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중국교회가 다시 겪는 고난이 전 세계 교회가 각성하고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는 전환점이 되길 소망한다”라며 “이것은 자신의 구금을 예견했던 진밍르 목사가 늘 해 왔던 말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또 “모든 한국교회가 진 목사와 동료 목회자들의 석방, 가족의 보호 그리고 고난 속 중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는 2025년 10월 15일 성명을 통해 “이 일이 중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고통과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음을 기억하며,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연대하겠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석방 소식이 전해진 뒤, 가장 먼저 회자한 것은 숫자였다. 8년. 자녀들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진밍르 목사는 2018년 이후 출국이 금지된 채 8년 가까이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자녀들은 아버지 없이 성장했고, 아버지는 감시와 조사 그리고 마침내 구금 속에서 신앙을 지켰다.
2026년 7월 4일 새벽, LA공항에서 이뤄진 재회는 그래서 단순한 가족 상봉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8년의 이산과 9개월의 구금 끝에 이뤄진 그 짧은 포옹은, 한 개인이 신앙의 대가로 치른 시간의 총합이었다. 한 사람이 겪어낸 37년의 여정. 톈안먼 광장의 총성에서 시작해, 스무 명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고, 감시 카메라를 거부하고, 팬데믹 속에서 걷는 예배와 줌 예배를 고안해 내고, 마침내 스무 명이 넘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구치소에서 성경 한 권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난 반세기 넘게 이름만 바뀌어온 중국교회 탄압의 역사이자,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신앙 공동체의 생존 기록이다.
동시에 그것은 국가 간 협상 테이블 위에서도 결국 지켜진 개인의 신앙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상회담이 그의 몸을 자유롭게 했을지언정, 그의 신앙까지 협상의 산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가 구치소에서 검사 앞에 내놓은 단 하나의 답,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은 그 사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언론 인터뷰 중 카메라 앞에서 그는 담담했다. 분노보다 확신이, 회한보다 감사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온 그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배할 자유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