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18년 3월호부터 시작된 김종건 교수님의 ‘중국기독교회사’ 연재를 이번 8월호로 마무리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시련 속에서 길을 찾아온 중국교회와 성도들이 오늘, 더 큰 시련 속에서도 그 역사를 힘입어 길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8년 여의 시간 동안 매달 이 코너를 기다려준 독자 여러분들과 바쁘신 중에도 집필에 힘써주신 김종건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중국 공산화와 개신교회의 초기 상황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이 성립되면서 중국 개신교회 선교 환경에도 격변이 일어났다. 중국 내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떠나 대다수 본국으로 향하였고, 부분적으로 대만, 홍콩을 비롯한 인접 지역으로 사역을 옮겼다. 개신교 선교회 중 주력이었던 내지회의 통계를 보면 1950년 637명이었던 선교사 가운데 604명이 그해에 바로 중국을 떠났고, 선교 본부도 홍콩으로 옮겼다. 중화기독교협진회는 1949년 12월 25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위원회에서 본색화, 한시적인 해외 선교단체의 원조 수용, 자양(自養)을 위한 구체적 계획 모색 등 신중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리 천명하였다.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 1950년 4월 이후 우야오쭝(吳耀宗) 등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정부 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중국기독교재신중국건설중노력적도경(中國基督敎在新中國建設中努力的途徑)〉이라는 제목의 이른바 ‘중국기독교회선언’, 즉 ‘혁신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기독교회의 임무를 부강한 신중국 건설이라 전제하고, 이를 위해 제국주의 숙청, 자치·자양·자전의 조기 완성과 기독교 혁신을 기본적 방침으로 제시하였다. 이 선언은 1950년 9월 23일 자 《인민일보》 1면에 40명 기독교 대표의 이름으로, 1,527명의 서명자 명단과 함께 게재되었다. 이날은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을 시작한 기념일로 받들기 시작했다.
이후 삼자애국운동은 지금까지의 중국교회 자립을 강조하던 운동의 성격은 현저히 줄어들고 중국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는 반제국주의 애국운동 조직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주요 활동은 혁신선언 서명운동, 반제국주의 애국운동, 공소(控訴)운동, 학습운동, 출판물 심사, 삼자애국운동의 조직화 등으로 간추려진다.
혁신선언의 서명운동은 1950년 10월 18일〜25일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기독교협진회 제14차 연차대회에서의 결의에 근거하여 1953년까지 전국적으로 전체 신도의 절반에 달하는 400,222명의 서명을 받았다.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으로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는 것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한 명목에 동조하여 전투기 헌납 모금을 하는 등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애국주의운동에 앞장섰다.
공소운동은 제국주의 분자들을 비판 고발하는 운동으로, 1951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53년 9월까지 전국 133개 지역에서 227회나 열렸다.
학습운동은 신중국의 정치 이념에 대한 학습운동으로, 기독교 출판사 청년협회서국(靑年協會書局)에서 《신시대학습총서(新時代學習叢書)》를 출판하고 각지에 시사학습회를 조직하여 강의와 토론 형식으로 혁명 이념을 확산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출판물 심사는 제국주의에 물든 서적들을 심사하여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기독교출판사의 서적 1,750종을 심사하여 절반 이상을 불합격 판정하였다.
삼자애국운동의 조직화는 1951년 4월 ‘중화기독교항미원조삼자혁신운동위원회주비위원회’가 25인 위원으로 조직된 이후, 산하에 1953년 말까지 지방 조직 257개소를 갖추어 완성되었다. 1954년 7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기독교전국회의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에 노력, 제국주의 침략 반대, 애국주의 학습, 자양 완성, 자전연구, 애국 순결 준수 등 중국교회의 향후 임무 7개 항을 천명하였다.
이후 ‘삼자혁신’은 ‘삼자애국’으로 변경되었고, 위원회 이름도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확정하였다. 이 위원회는 139명의 위원으로 구성하고, 주석은 우야오쭝이 맡았으며, 이에 가입한 교회를 삼자교회로 칭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 개신교회가 신중국의 종교정책에 부응하여 새로운 체계를 갖추게 되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도교 등도 유사한 체제를 갖추어 중국 정부의 통제권으로 편입되었다.
삼자애국운동 반대운동 삼자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교회는 독자적 자립교회를 지향하였는데, 1953년 5월 개봉(開封, 카이펑)에서 열린 전국보수파복음회의는 삼자애국운동 자유주의적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에 맞서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석한 다수가 체포 투옥되는 탄압을 받았다.
왕밍다오(王明道)는 삼자애국운동이 ‘예수를 파는’ 것이라고 거부하는 주장을 견지하다가 1955년 8월 체포되었다. 그는 삼자교회 가입 조건으로 1년 뒤 출옥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아 다시 체포되어 1963년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1980년 출옥하였으나 시력 등 건강이 악화하여 과거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1991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야소가정(耶蘇家庭)도 창시자 징뎬잉(敬奠瀛, 1890〜1957)도 체포된 뒤 탄압을 받아 공동생활이 폐지되는 등 조직이 개편되는 운명을 맞았다.
소군(小群)도 창시자 니퉈성(倪柝聲, Watchman Nee, 1903〜1972)와 지도자들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뒤 성찬식 축소 등 조직 개편을 당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중국교회 중국에서는 1958년 대약진운동으로 성직자도 노동에 투입되면서 정부의 통제하에 이어오던 그나마 교회 활동마저 크게 위축됐다. 교회 통합이 강제되어 베이징의 65개 교회는 4개소로 줄어들었고, 상하이 200여 교회도 23개소의 교회만 남고 나머지는 폐쇄당하였다. 합동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이어져서 교파의 벽을 넘어 지역 통합 예배가 드려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개별 교회의 예배가 지켜지기 어려워졌고, 교회 의식과 성경 해석도 삼자애국운동위원회의 지도하에 수정되었다. 이 세상의 헛됨과 최후의 심판 등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교리도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고, 아침 예배나 십일조가 폐지되는 등 교회 의식도 위축되었다. 교회의 위축은 마오쩌둥(毛澤東) 개인숭배를 지향한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 그 절정을 이뤘다.
1980년대 이후 중국교회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幇)이 축출되면서 이른바 덩샤오핑(鄧少平) 시대 개혁개방의 변혁 속에 중국교회도 재건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0년 4월 삼자애국운동이 재개되었고, 1980년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난징에서 열린 중국기독교 제3차 전국대회에서는 ‘중국기독교협의회(CCC)’를 조직하고, ‘중국기독교협회장정’을 마련하였다. 1981년 난징(南京)신학교가 문을 다시 열었고, 이후 전국 13개 신학교가 신학 교육을 재개하게 되었다.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소속 교회는 1982년 2,000여 개소, 1984년 5,000여 개소로 늘어나고, 신자 수도 1984년 정부 집계에서 50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98년까지 전국 17개소 각급 신학교를 통해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1년에는 중국기독교협진회가 세계기독교연합(WCC)에 가입하였고, 2000년 9월에는 중국교회삼자애국운동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97년 중국 정부의 통계에서는 중국 기독교 신자 수 1,000만여 명, 성직자 수 18만여 명, 예배당 26,000개소로 발표하였다. 국제선교회의 통계는 2000년 중국기독교 인구가 총인구의 7.25%를 차지하는 9,153만여 명이며, 매년 7.7%의 증가율을 보인다고 제시하고 있다.
한편,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정부 통제의 삼자교회와는 차별적인 다양한 형태의 가정교회가 등장하여 신앙 공동체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중국교회가 온전히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복음주의적 회복을 희망하는 각급 선교단체의 노력도 어렵사리 이어지고 있다. (끝) ♣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