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화와 천주교회의 초기 대응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전개되었고, 1949년 10월 1일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이전하고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이 성립되면서 중국 선교 환경에 지대한 혼란과 변화가 일어났다.
바티칸 교황청은 1949년에 성립된 중국 공산정권의 승인을 거부했고, 안토니오 리베리(Antonio Riberi) 주교도 난징(南京)의 공관에서 ‘공사(公使)’ 직임을 이어가면서 중국 교우들이 공산당이나 인민 정부가 주도하는 어떤 조직에도 협조하거나 가입하지 않도록 지도했다.
1948년에 성립된 ‘천주교무협진회(天主敎務協進會)’는 왈쉬(James Edward Walsh)의 지도 아래 소책자를 제작 배포하며, 무신론을 배격해야 할 것을 계도했다. 또 각지에서 활약 중이던 ‘성모군(聖母軍)’ 등 조직을 통해 교회에서의 애국 행동으로 포장된 인민 정부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막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상하이(上海) 천주교회에서 조직된 ‘교리소조’는 공산당 신문을 ‘보지 않고’, 애국 언론을 ‘듣지 않으며’, 교회 내 제국주의 분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이른바 ‘3불(三不)주의’를 선포했다. 이러한 교계의 공산당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1950년 한국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이어졌고, 중국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해야만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외형적으로는 ‘공동강령’에 중국 인민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고, 1954년 9월 20일 공포된 헌법에서 종교를 믿을 자유와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했다. 중국 정부는 종교 감정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치밀한 통합전선공작을 추진하였고, 점차 많은 천주교도가 신정부가 강조하는 애국 교회로 기울게 되었다.
중국 천주교의 반제국주의운동 전개 푸런(輔仁)대학을 지원하던 서양 교회가 대학 구성원들의 정치적 성향 변화에 맞서 보조금 감축 정책을 시행하였다. 교회 대표 레그니(Harold Regney)와 천위안(陳垣) 총장 간에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쳤으나 결국 1950년 8월부터 교회의 보조금이 중단되게 되었고, 10월 12일 중국 교육부에서 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신정부 수립 이후 천주교에서의 반제애국운동이 본격화하고 서양 교회가 중국을 떠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950년 11월 29일, 쓰촨성 광위안현(廣元縣)에서 왕량줘(王良佐) 신부와 천주교 신도 500여 명이 발표한 ‘삼자애국혁신선언(三自愛國革新宣言)’은 중국 천주교회가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모두 단절하고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교회를 건립할 것을 천명했다. 이 선언이 1950년 12월 25일 자 《신화일보(新華日報)》에 게재되면서, 이후 귀쑤이(歸綏), 충칭(重慶), 난창(南昌), 우한(武漢) 등지의 대리주교와 신부들을 비롯한 신도들이 유사한 내용의 선언을 잇달아 발표하며 호응하였다.
1951년 1월 11일에는 톈진(天津)에서 우커자이(吳克齋)의 발의로 ‘톈진시 천주교혁신운동촉진주비회’를 조직하고, 4월 7일 ‘톈진시천주교혁신운동촉진회’를 정식 출범하면서 1만 5천여 명의 지지 서명을 받으면서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난징교구에서도 1951년 3월, 리웨이광(李維光) 대리주교를 비롯한 700여 명이 서명한 연합선언을 1951년 3월 31일 자 《신화일보(新華日報)》에 게재하면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로마 교황청의 대응 중국 천주교회의 반제애국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하자 로마 교황청과 중국 교무 책임자 리베리 주교는 즉각 대응하였다. 1951년 3월 리웨이광 주교의 선언이 발표된 바로 그날, 리베리는 중국 내 모든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애국선언을 비난하였고, 4월에 다시 편지를 써서, 신도들이 반제애국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리베리의 이러한 활동은 교계 내의 저항을 일으켰고, 마침내 리베리에 대한 국외 추방 요구로 이어졌다. 1951년 6월 6일, 상하이 군사관제위원회는 왈시가 주도하는 ‘천주교교무협진위원회’를 단속했고, 7월 13일에는 톈진시 군사관제위원회가 ‘성모군(聖母軍)’을 불법 조직이라고 선포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951년 9월 4일에는 난징 군사관제위원회가 리베리에 대한 영구 추방을 결정했다. 리베리는 추방된 뒤 홍콩에 머물다가 바티칸과 대만이 수교하게 되자 1952년 10월에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가서 계속 ‘중국주재공사’ 직임을 이어 나갔다.
교황 비오 12세는 잇달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중국 천주교회의 삼자애국운동을 반대하였고,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삼자애국운동에 반대한 궁핀메이(龔品梅) 상하이 주교 등에 대하여 격려와 찬사를 보내면서 중국에서 사회주의 노선에 맞설 것을 지시했다.
중국 당국은 이에 맞서 1953년 이후 강력한 단속과 주도자 체포에 나섰고, 1955년 9월 8일에는 궁핀메이도 상하이에서 체포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정부의 이러한 기조에 호응하여 천주교계에서 각종 간행물이 배포되고 애국주의가 홍보되면서 오성홍기를 내건 채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천주교회가 빠르게 늘어났다.
중국천주교애국회와 삼자애국운동 당과 정부의 지지 속에 천주교 애국주의 운동은 빠르게 확산하여, 1956년 초 이미 200여 개 단체의 결성에 이르렀다. 1956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제2기 전국위원회 2차 회의에서는, 전국 규모의 중국 천주교 애국 조직 설립이 발의되었고, 그해 7월 전국에서 모인 37명의 발기인이 되어 ‘중국천주교우애국회 주비위원회 예비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어 1957년 2월 12일부터 16일까지 발기인 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렸고, 바로 ‘중국천주교애국회’ 창립을 결의하였다.
1957년 6월 17일에서 8월 2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천주교우 제1차 대표회의’에는 전국 26개 성시(省市) 100여 개 교구 241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중국 천주교우 대표회의 결의’를 채택하고, 피수스 총주교를 주석으로 하는 “중국천주교우애국회(1962년에 열린 제2기 전국회의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로 개칭”을 정식 결성하였다. 여기서 중국 천주교회가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참여하고 독립자주(獨立自主), 자판(自辦)의 애국운동과 신앙 자유 정책을 전개해 나갈 것을 천명하는 ‘중국천주교우애국회 장정’도 함께 통과 발표되었다.
이어 1958년 3월 18일과 19일, 한커우(漢口)와 우창(武昌) 두 교구에서 둥광칭(董光淸)과 위안원화(袁文華) 신부를 각각 주교 후보자로 선출하여 로마 교황청에 비준 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청이 비준을 거부하자 4월 9일 우한에서의 항의 집회가 있었고, 4월 13일, 리다오난(李道南) 주교는 한커우 천주교회에서 거부당한 둥광칭과 위안원화 두 신부를 위한 축성의식을 거행하였으며, 4월 17일에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1962년까지 중국 천주교회가 자체 선출해 서품한 주교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 천주교는 큰 탄압에 직면하여 추가적인 주교 축성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197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체적으로 주교를 뽑아 서품하는 전통을 회복하게 되었다. 단절되었던 교황청과의 관계도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이후 중국 정부가 임명한 주교를 교황청에서 받아들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