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의 광풍은 티베트에도 불어닥쳤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티베트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쑹융이(宋永毅)가 편집하고 홍콩중문대학이 2002년 공개한 “중국 문화대혁명 데이터베이스”는 문화대혁명에 관한 1차 사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방대한 자료집이지만, 1만 개가 넘는 자료 중 티베트와 연관된 자료는 단 여덟 개뿐이라고 합니다. 워싱턴 중국연구센터가 간행한 〈새로 펴낸 홍위병 자료집〉에 수록된 3,100개의 전단지 중 티베트에서 나온 것은 네 개뿐이라고 합니다. 자료가 너무 귀하다 보니 문화대혁명 기간에 티베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티베트 문화대혁명에 관한 자료와 정보가 정녕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티베트 내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티베트 군구(軍區)는 문화대혁명 관련 상세 자료를 티베트 내 라싸(拉薩)에 다량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기지에 보관된 자료는 여전히 봉인된 채 접근이 엄중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료는 여타 ‘1급 기밀’처럼 중국 정부가 철저하게 관리해 왔습니다.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을 하나의 흠집(또는 과오)으로 간주하고 문화대혁명에 대해 깊이 파고들도록 내버려두었다가는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중국 내에서 금기로 남아 있습니다.
이 책엔 티베트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 기간에 찍힌 수백 장의 사진 들 중에서 추리고 추린 상당히 많은 사진과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진들은 참혹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티베트엔 티베트 나름대로 면면히 이어져 온 문화가 있습니다. 나이 어린 홍위병들(초기에는 거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으나 점차 대학교에서 각급 기관, 거민위원회, 공장 및 촌락으로 모집 대상이 확대됩니다)이 티베트 사원을 침입해서 마구 파괴하고 불사르는 사진들이 꽤 많습니다.
우귀사신(牛鬼蛇神) ‘뉴구이서선’, 즉 우귀사신(牛鬼蛇神)은 원래 중국 고전 문학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종교의식에서 동물 가면을 쓰고 인간이 아닌 악령이나 신령한 존재의 역할을 담당하는 배역을 뜻합니다. 온갖 잡귀신과 악인을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티베트에서는 우귀사신이 ‘계급의 적’을 지칭하게 됩니다. 어느 티베트 점술사는 문화대혁명 때의 경험을 힘들게 꺼내면서 “나는 당시 우귀사신이었다”라고 했습니다. 티베트에서 우귀사신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배경은 중국 내 다른 지역의 우귀사신(중국 내에서도 대단했지요)들만큼 다양하지 않습니다. 우귀사신은 티베트 내 삼대 영주의 범주에 속하는 옛 정부의 관리, 귀족, 라마(승려)를 가리킵니다. 티베트 우귀사신의 다수는 새로운 중국공산당 체제가 손잡으려 했던 고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1950년부터 문화대혁명 발발 전까지, 이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전략의 포섭 대상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1959년 ‘달라이 분열주의자’ 집단과 결탁하지도, 조국을 버리고 달아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행위는 ‘어둠을 버리고 밝음에 의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랄루 체왕 도제(Lhalu Tsewang Dorje)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티베트 내에서 반란 사건이 있을 때 티베트 지휘관으로 있었으나, 중국공산당 정부에 의해 감옥에서 6년을 보냅니다. 그가 말하길, 문화대혁명 기간에 우귀사신으로 분류된 사람들 대다수가 1966년 이전까지 공산당 체제에 협력해 ‘애국자’ 칭호를 받던 사람들이었던 반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반란 참가자’, ‘반혁명 분자’로 분류되었었다고 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진영에 속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양 진영을 가르던 경계가 희미해졌습니다. 어느새 양 진영 모두 길거리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비판대회에서 공격을 당한 종교계 인사의 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공산주의 독트린에 따르면 종교는 착취계급이 가난한 인민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아편이고, 승려는 사회를 좀먹는 파렴치한 기생충입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티베트에서 종교에 가해진 모략과 멸시는 전례가 없는 것으로, 많은 티베트인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 신앙을 완전히 말살시킬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체링 도제, 체링 외세 그리고 왕리슝 필자는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도 충격적이었지만, 사진들의 출처가 궁금했습니다. 사진들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보존 상태가 좋아서 선명합니다. 그간 다른 도서들을 통해 접했던 사진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왕리슝(王力雄)은 중국(한족)의 학자이자 작가입니다. 체링 외세(Tsering Woeser)는 이 책을 지은이이고, 체링 도제 (Tsering Dorje)는 외세의 아버지이자 사진을 직접 찍은 사람입니다. 체링 도제와 외세는 이름에서 짐작 가듯이 티베트인입니다. 1999년 말, 왕리슝은 외세가 보낸 한 소포를 받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소포의 내용물은 수백 장의 네거티브 필름이었습니다. 그 필름은 1991년 사망한 그녀의 아버지가 문화대혁명 중에 찍은 것이라는 설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왕리슝은 장갑을 끼고 조명 아래서 필름을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의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도저히 그가 받을 수 없는 선물이자, 너무 귀한 자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체링 외세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이 귀한 자료를 활용하는 것에는 기꺼이 돕겠지만, 그 작업은 티베트인인 당신 즉, 외세 자신이어야 한다고 힘을 줍니다. 그 후 외세는 6년의 작업 기간을 거쳐 결국 이 책을 완성합니다. 왕리슝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때 고문을 당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문화대혁명 기간 중 자료에 깊은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때로 고통과 상실감은 잊어버리려고, 묻어버리려고 할 때보다, 그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때 오히려 위로와 회복이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외세의 아버지 체링 도제는 과거 티베트 동부에 속했던 캄 출신이라고 합니다. 1950년 마오쩌둥(毛澤東)이 “티베트 동포들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가 병사들을 모집할 때, 수백 명의 티베트 젊은이들이 입대하게 됩니다. 그때 도제도 그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한 1966년 여름, 도제는 라싸 주둔 인민해방군 장교가 됩니다. 사진들은 이 무렵에 찍은 것입니다. 1991년, 도제는 라싸 분구 부사령관으로 부임하던 중, 갑자기 건강이 악화하여 고인이 됩니다. 외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남긴 사진과 필름을 정리해서 보관하게 됩니다. 그 후 그 사진들이 귀중한 역사의 자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 사진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지 생각하던 중, 왕리슝의 저서 (해외에서 발간되어 티베트로 밀수입된) 《천장: 티베트의 운명》을 읽고 왕리슝에게 필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왕리슝의 조언대로 체링 외세(티베트의 시인, 에세이 작가. 중국에 살면서 티베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가장 잘 알려진 논평가. 중국어로 스물한 권의 책을 썼다. 그중 열여덟 권이 해외에서 번역됨)는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사진에 실려 있거나, 사진 속 인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6년 동안 7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사진들을 본 뒤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너무 당혹스러워서 말문이 아예 닫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외세는 그저 대부분 가만히 기다리고 그 사람들의 입이 열리면 조용히 듣기만 했습니다. “미쳤었어. 그땐 모두 미쳐 있었어. 꼭 약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아.” “애통해라! 우리 민족이 이렇게 엄청난 비극을 겪다니!” 이 책의 원서는 타이베이(臺北)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왕리슝과 외세는 이 엄청난 사진들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까지 이어집니다.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