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자주적 운영 확대 중국 개신교회의 자립과 연합을 지향한 노력은 1927년 장로교계 선교단이 주도하여 결성한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 The Church of Christ in China)’에 이어 1930년 중화침례회(中華浸禮會), 1933년 중화순리회(中華順理會, Free Methodist) 등이 잇달아 성립되었다. 이후 중국 개신교회 자립과 연합을 지향하는 기본적으로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의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중국교회의 자주적 운영, 즉 자치(自治)를 지향하는 노력은 외국인 선교사의 감소와 중국인 목회자의 교회 지도력 강화로 나아갔다. 화남공리회(華南公理會)는 1928년 이후 대부분의 외국인 선교사가 임지에서 철수하고, 중국인 목회자들에게 중국선교의 전반적인 책임을 맡겼다. 화북공리회(華北公理會)는 1929년경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인과 동등한 지위로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회칙을 개정하였다. 순도회는 1940년에 교구 최고 관리자로 중국인이 선임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1925년 외국인 선교사 8,350명이던 것이 1936년에는 6,059명으로 감소했다. 중국인 중심의 선교 성과가 반영되어 신도 수는 1925년 402,539명이었던 것이 1936년 512,873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내 비기독교운동 등 외국 선교회에 대한 비판적 기조의 증가와 외국인 선교사들의 본국 복귀 증가, 중국 정부 주도의 교육권회수운동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외국 선교회가 대체로 중국인 중심의 중국교회로 나가도록 정책적인 전환을 가져온 결과이며, 중국 개신교회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교회의 자주적 경영 확대 교회의 자주적 경영 즉, 자양(自養)의 성과도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못하였다. 1938년 보고에서는 중화기독교회 소속 교회 중 외국 선교단체의 보조를 받는 교회가 794개였던 한편, 자립교회는 540개에 불과하였음과 1948년 보고에서 자립교회가 전체의 1/3에 그치고 있음이 이를 잘 보여준다.
중화기독교회 총회의 예산 운영은 소속 교회의 헌금에 의지하려고 하였으나, 헌금이 감소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고, 1937년 청도(靑島)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부족한 헌금을 만회하기 위한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제대로 중일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결국 해외 헌금과 외국 선교단체의 헌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1944년 총회 예산의 경우 2/3를 외국의 지원금으로 채우게 되는 한계를 보였다.
교회의 자주적 선교 확대 교회의 자주적 선교, 즉 자전(自傳)은 상대적으로 많은 전진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사례인 1930년 성정이(誠靜怡)의 주도로 전개된 5년 전도부흥운동은 중국교회의 전도와 사회 참여를 중시하게 하는 주요 이정표가 되었다. 연경대학 종교학원 서보겸은 교수직을 내려놓고 강서성 시골로 내려가 토착화 교회 건립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5년 운동의 결과 교회는 각급 단체를 조직하여 중국교회의 사회적 사명이 큼을 의미 있게 부각하게 되었다. 만국개량회는 술·담배·기생 금지 선도운동을 전개하였고, 부녀절제회와 도덕회는 부녀자들의 성교육과 위생 문제 개선을 위해 앞장섰으며, 거독회(拒毒會)는 기독 청년과 중국 의학계가 연계하여 아편 폐해의 홍보와 구제를 위해 나섰고, 제량소(濟良所)는 무의탁 노인·고아·기생 등을 수용·교육·치유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양진사(養眞社)는 ‘사진오애(四眞五愛)’운동을 전개하였는데, ‘4진’, 즉 영진(靈眞, 하나님만 믿음), 심진(心眞,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 체진(體眞, 신체 유해물 섭취 배격), 행진(行眞, 순결 보전), ‘5애’, 즉 자애(自愛), 애인(愛人), 애가(愛家), 애국(愛國), 애평화(愛平和)의 실천을 외치며 신앙의 심화와 사회 계몽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자주적 선교의 하나로 다양한 저술들이 출판된 데 이어, 1931년 4월 중화기독교회, 중화성공회, 미국 이미회, 감리회, 화동침례회, 화북공리회 등이 조직한 ‘육공회연합성가위원회(六公會聯合聖歌委員會)’에서 1936년에 512곡을 수록한 중국어 찬미가를 번역·편집 출판했는데, 이 중 서양곡 번역이 아닌 중국 원작곡도 60여 곡 포함되었다.
중국 기독교 자주화운동이 강력하게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세계교회운동과 항일 애국운동은 함께 중요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교계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931년에는 상해기독도구국회(上海抗日基督徒救國會) 등 항일 단체가 결성되어 항일운동의 역량을 모았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체포되거나 선교 현장과 격리되면서 1937년 65만 명에 이르렀던 중국 개신교회 신자 수는 증가 기조가 주춤하면서 약 77만 명에 그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중일전쟁이 종식되자 중국교회 재건을 위한 역량의 결집이 시도되었고, 대표적 사례로 1946년 12월 3일 상해에서 모인 중화기독교협진회 제13차 연례대회에서는 ‘3년 부흥운동’을 결의하고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과 세계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1947년 말 외국인 선교사는 다시 3,5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1949년 중국 개신교회는 신자 수 835,000여 명, 교회 수 6,500여 개소로 성장하는 기록을 보이게 되었다. ♣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