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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6.4  통권 286호  필자 : 쑨빈  |  조회 : 1350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삼자교회의 산증인 고(故) 딩광쉰 주교와의 가상 인터뷰 _“하나님은 중국을 사랑하십니다”

올해는 우야오쭝(吳耀宗, 1893∼1979)과 더불어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의 기수였던 딩광쉰(丁光訓, 1915∼2012) 주교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지 14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중국 정부를 대표해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全國人民政治協商會議) 위정성(兪正聲) 주석이 참석했고, 홍콩과 세계 성공회의 주교들이 예배를 인도했다. 삼자교회와 일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애도했다. 딩 주교는 난징(南京)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 원장,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教三自愛國運動委員會) 주석, 중국기독교협회(中國基督教協會) 회장, 애덕기금회(愛德基金會) 이사장,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신학사상건설(神學思想建設)’ 주창자 등 중국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어떤 이는 그를 ‘성인’이라 불렀고, 어떤 이는 ‘배신자’라 불렀다. 그 어느 쪽도 완전한 진실은 아닐 것이다. 역사의 어떤 인물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정리되기 쉽지 않다. 딩 주교는 그런 사람이다. 삼자교회를 통해 구축하려 했던 세계는 여전히 미완의 교향곡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질문,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이 민족의 살과 피가 될 것인가’라는 화두는 오늘날 중국을 넘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그의 물음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다. 중국교회의 역사가 언젠가 이에 답할 것이다. 딩 주교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 삶과 고뇌, 삼자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한다. 

-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셨는지요?
▲딩광쉰: 나의 집안은 상하이 성공회의 핵심 신자 가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사제였고,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에게 기독교는 서구적인 교양과 안락한 도덕적 울타리였습니다. 하지만 세인트존스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의 안일한 신앙은 무너졌습니다. 학교 정문 밖에는 굶어 죽는 인민들이 널려 있었고, 정문 안에서는 영어를 쓰며 서구 신학을 논하는 괴리감, 그때 나는 물었습니다. ‘예수는 저 거리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그 질문이 나를 바꿨습니다. 그때 만난 것이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었습니다. 특히 우야오쭝 선생님과 만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YMCA에서 일하시던 분이었는데, 기독교가 단순히 영혼을 낚아채 하늘로 데려가는 종교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운동이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부자들 곁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 사이에 계셨는지, 그게 그때 처음으로 진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내가 평생을 걸고 추구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의 첫 단추였습니다. 다음 기회에 우야오쭝 선생님과의 가상 인터뷰를 진행해 주면 좋겠습니다(웃음).

- 서양에서의 활동과 학창 시절, 경험도 주교님의 일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딩광쉰: 제네바에서의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활동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유럽의 에큐메니컬 운동, 교회일치운동의 열기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화해’의 복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려고 했는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은 것이 있었죠.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전한 기독교는 너무나 많은 경우 서양의 문화적 옷을 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인은 중국인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자와 맹자의 언어로, 중국의 역사적 고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후에 ‘신학사상건설’을 주창하게 된 씨앗이 됐죠. 컬럼비아대학교에서는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현실 정치와 신학의 관계, 인간의 죄성과 사회 구조의 문제, 순진한 이상주의로는 이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냉혹한 진실 말입니다. 그 가르침이 훗날 나에게 큰 ‘방패’가 돼주었고, 동시에 큰 ‘짐’이 되었습니다.

-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중국을 등졌는데, 사회주의국가로 변한 중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딩광쉰: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목자는 양 떼를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제네바에서 저는 중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들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도구’로 낙인찍히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문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신학을 공부했는가? 안락한 제네바의 사무실에서 전 세계 기독학생들의 운동을 돕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중국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상하이의 거리, 가난한 노동자들, 전쟁에 지친 사람들. 또 한 가지. 저는 공산혁명이 완전히 사탄의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산혁명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안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폭압적인 지주 제도를 무너뜨리고, 외세의 침탈에서 민족을 해방하는 역사,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실 수 있다고 봤습니다. 

- 귀국 후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에 참여하셨는데요?
▲딩광쉰: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뿌리를 옮긴 것’입니다. 중국에서 삼자교회는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삼자원칙에 따라 성립됐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선교학자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이 거의 동시대에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이라는 삼자원리를 주창했죠. 식민지 상황에서 선교지 교회가 외국 선교사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1950년대 초, 중국 기독교인들은 뼈아픈 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외래 종교’이자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 도구’로 인식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주는 돈과 보호 아래 있는 한, 중국교회는 결코 중국인의 교회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삼자원칙은 단순한 정치적 슬로건이 아니라 ‘신학적 성인식’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원칙이 어떻게 실행되느냐였죠. 삼자 이름 아래 정부가 교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는 걸 나는 서서히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교회가 완전히 문을 닫느냐, 아니면 제약 안에서도 기능하느냐. 나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 중국교회 하면 왕밍다오 목사님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서로 다른 길을 가셨죠?
▲딩광쉰: 왕밍다오(王明道),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용기 있는 사람 중 한 분이었습니다. 동시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이기도 했죠. 나는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권위, 죄에 대한 직면, 복음의 순수성,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제가 분석하기에는 그의 신앙은 ‘요새화된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을 ‘악’으로 규정하고 교회 안에 갇혀 정조를 지키는 것만이 신앙이라 믿었습니다. 특히 그는 사회주의 정권과의 그 어떤 타협도 ‘음행’으로 간주했습니다. 한번은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딩 주교, 당신은 사탄의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오’라고 일갈했지요. 나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왕 목사님, 우리 인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운동(삼자애국운동)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은 오직 교회 담장 안에만 계십니까?’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서로의 언어가 닿지 않았습니다.

- 왕밍다오 목사님이 체포되기 전, 주교님이 왕 목사님을 강하게 비판하셨는데요?
▲딩광쉰: 그는 체포되었고, 나는 삼자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를 ‘관변 목사’라고 비난하며 그를 ‘순교자’로 추앙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신앙의 정조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가 멸절되지 않도록,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방파제를 세워야 했습니다. 내가 그를 비판한 것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비판이 너무 날카로웠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비타협적 근본주의자’라고 불렀고, 그 언어가 그가 체포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신학적 논쟁이 그에게 수십 년의 감옥살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거룩한 순교를 택하지만, 누군가는 비굴해 보일지라도 살아남아 복음의 씨앗을 보존해야 합니다. 나의 비판은 그 개인을 향한 미움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맞이한 시대적 운명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꿈속에서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아마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울 것입니다.

- 왕밍다오 목사님의 길과 주교님의 길 중 어느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딩광쉰: 나는 그 질문에 ‘나의 길이 옳았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그의 길이 옳았다’라고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왕밍다오는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은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교회역사 2천 년은 그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에 더 가까운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도 없어집니다. 씨앗이 땅속에 묻혀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씨앗이 땅속에 묻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도 있습니다. 나는 삼자운동이라는 제약 안에 있으면서도 씨앗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두 길 모두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에게도 극한의 어려움을 주었는데요. 주교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죠?
▲딩광쉰: 문화대혁명은 나에게도, 중국교회에도, 그리고 중국 자체에도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홍위병들이 신학원에 들이닥쳤습니다. 성경들이 불태워졌고, 십자가들이 부서졌습니다. 나는 ‘반동 학술 권위자’라는 딱지가 붙어 비판 투쟁의 대상이 되었죠. 강단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습니다. 그 굴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배신감보다는 ‘비어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삼자운동에 협조했음에도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였습니다. 나는 정부와 협조하면 교회가 보호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문화대혁명은 그 협조의 공간조차 없애버렸습니다. 종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눈에 독(毒)이었고, 어떤 형태의 신앙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나는 비밀리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혼자 기도했습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렸습니다. 시편을 쓴 다윗이 왜 그렇게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반복했는지, 그 절규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 그 암흑 기간에 신앙을 어떻게 지킬 수 있으셨나요?
▲딩광쉰: 홍위병들이 나를 광장에 세우고 모욕할 때, 한 무신론자 이웃이 몰래 내 주머니에 고구마 하나를 찔러 넣어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교회가 폐쇄된 곳에서도, 무신론자의 따뜻한 손길 속에서도 일하고 계시는구나.’ 신학은 무너졌으나 사랑은 남았습니다. 나는 고통 속에서 ‘우주적 그리스도(宇宙的基督, Cosmic Christ)’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선한 의지 속에, 심지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이들의 정의로운 투쟁 속에도 함께하십니다. 문화대혁명은 나에게서 ‘종교적 기득권’을 앗아갔지만, 대신 ‘우주적 사랑’을 선물했습니다. 아내 궈슈메이(郭秀梅, 1916∼1995)가 없었다면 그 시절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으로나 인격으로나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1995년에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내 삶의 가장 큰 닻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내 문집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愛是不息的)》는 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없었다면 결코 쓸 수 없었을 제목입니다.

-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 중국기독교협회 회장으로서 중국교회를 재건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셨죠?
▲딩광쉰: 1979년, 국가 정책이 바뀌면서 교회들이 하나씩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성도들이 빛 속으로 나왔습니다. 성경도 없이, 예배당도 없이, 목사도 없이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울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인쇄해야 했습니다. 수백만 성도들이 성경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다시 열어야 했습니다. 목회자들을 훈련해야 했습니다. 교회 건물들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동시에 요청되었습니다. 1985년에 설립한 애덕기금회(愛德基金會, The Amity Foundation)는 이 모든 일을 위한 플랫폼이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동역자들의 협력을 받아 성경을 인쇄하고, 사회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교육과 의료 사업을 했습니다. 

-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의 만남 등 서구 기독교계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셨죠? 
▲딩광쉰: 서양인들은 종종 오만한 시선을 가집니다. 그들은 우리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가짜 교회’라고 생각했지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런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소박한 시골 교회 성도들의 눈물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의 신학은 승리주의에 취해 있지만, 우리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달러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대등한 형제로서의 인정을 원합니다.’ 나중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중국교회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서구교회들이 우리를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려고 할 때, 나는 끝까지 ‘동반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중국기독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교회는 사회주의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국가의 부서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있으셨죠? 
▲딩광쉰: 나는 삼자애국운동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특정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가 살아남으려는 방편이었습니다. 외세 의존에서 벗어나 중국교회가 자립하는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면, 그 구조는 해체되고 교회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의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그 물줄기를 바꿔버렸습니다. 정부는 다시 경직되었고, 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톈안먼 사태에 대해서 나는 공식적으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장 긴 침묵이었고, 어쩌면 가장 큰 비겁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로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요. ‘교회는 고통받는 자들 편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 주교님이 주창하신 ‘신학사상건설’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신득의’를 약화하고, 복음주의 핵심을 희석하고, 기독교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요?
▲딩광쉰: 제가 가장 무겁게 받아들이는 비판입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 안에 진실의 일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사상건설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중국교회가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가져온 신학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적·사회적 맥락 안에서 자신의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단지 내세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혁하는 살아있는 힘이어야 한다는 것. ‘우주적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온 세상을 품고 계신다는 신학. 이것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신학으로 변질되었느냐 하면, 나는 그 과정이 내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사상건설이 일부에서는 복음주의적 설교를 억누르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칭의 교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나는 칭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칭의가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나는 중국교회에 제안했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로워지는 것(以信得義, 이신득의)만큼이나, 예수를 본받아 사랑을 행하는 것(以愛得義, 이애득의)이 중요하다’라고요. 하지만 나에 대한 비판자들의 말처럼, 내 신학이 칭의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지적입니다.

- 생전 주교님에 대해 서구 기독교계에서 ‘공산주의 꼭두각시’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었는데,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딩광쉰: 그 말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아팠다는 것 이상으로, 그 비판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공산당원이 된 적이 없습니다. 당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른 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대혁명 시절, 나도 박해받았고, 그것은 내가 단순한 ‘국가의 도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국가의 구조 안에서 일했습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원이었고, 중국기독교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분명히 내게 중국교회를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 자리는 내가 국가를 비판하는 데 제약이 따랐습니다. 서방의 비판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중국 땅에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들의 기준은 내가 살아온 현실과 다른 현실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비판을 완전히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 내 처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 중국 정부는 ‘기독교 중국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과거 주교님이 주장하셨던 중국화와 지금의 ‘기독교 중국화’와 차이가 있는지요? 정부 주도의 종교정책이 복음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딩광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내가 말한 ‘중국화’는 기독교가 중국의 문화, 철학, 정서와 깊이 소통하여 ‘중국인의 영혼 속에 육화(Incarnation)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에 따른 자발적인 과정이어야 합니다. 만약 지금의 정책이 교회의 건물 양식을 바꾸고, 찬송가 가사와 설교에 정치적 구호를 넣는 ‘외적 강요’에 그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중국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정치의 시녀로 만드는 일일 뿐입니다. 진정한 중국화는 중국의 신학자가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국인에게 주시는 특별한 계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자유로운 탐구 속에서 피어나야 합니다. 정부에 조언하고 싶습니다. 종교는 억압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진심으로 국가를 사랑하게 하려면,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지킬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복음이 정치에 휘둘리는 순간, 그 종교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 중국교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평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딩광쉰: 내가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사실의 차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입니다. 애덕기금회를 통해 중국에서 수천만 권의 성경이 인쇄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없이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문화대혁명 시절 경험한 나는 압니다. 둘째, 신학교육입니다. 난징 금릉협화신학원을 비롯한 신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고 목회자들을 훈련할 수 있게 된 것에 작은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 국제적 연결고리입니다. 내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중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넷째,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 즉 교회가 존재했습니다. 완벽한 자유가 아닌, 제약 안에서였지만, 예배당의 문이 열렸고, 성도들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임이 씨앗이 되어 지금 중국에 수천만의 기독교 신자가 있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반대로, 후회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딩광쉰: 후회. 그것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함께 오는 손님입니다. 가장 큰 후회는 왕밍다오 목사님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적 논쟁을 넘어 내 비판이 그의 투옥에 일조했을 수 있다는 것. 그가 감옥에서 고통받는 동안 나는 난징 금릉협화신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 대조가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둘째, 신학사상건설이 일부 목회자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 나의 본의와 다르게 흘러간 그 흐름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들. 나는 삼자교회 밖의 가정교회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싸우지 못했습니다. 삼자는 ‘몸’을 지켰고, 가정교회는 ‘정신’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한 몸의 두 지체였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 금릉협화신학원이 배출하는 미래의 삼자교회 지도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딩광쉰: 우리 신학생들이 ‘종교 관료’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을 깊이 읽되 시대를 함께 읽으십시오. 성경만 알고 세상을 모르면 독선자가 되고, 세상만 알고 성경을 모르면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둘째, 중국 고전과 철학에 정통하십시오. 공자와 맹자를 모르는 목회자가 어떻게 중국 인민의 마음을 위로하겠습니까? 기독교가 중국인의 영혼에 뿌리내리려면, 그 영혼이 자라난 토양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랑의 실천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신학에 매몰되지 말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의 고난을 짊어질 사랑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배우십시오. 그러나 역사의 포로가 되지는 마십시오. 나의 세대가 씨름했던 질문들(교회와 국가, 순수와 타협, 생존과 순교), 이 질문들은 당신들의 시대에도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질문에 쉬운 답은 없습니다.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역동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딩광쉰: 중국교회는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100만 명이 채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추산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수천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외국 선교사 없이, 때로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중국교회는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물론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관계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나는 이 이분법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자교회 안에도 깊은 신앙인들이 있고, 가정교회 안에도 단지 자유로운 예배를 원하는 평범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집단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교회의 수적 성장보다 영적 깊이입니다. 급격히 성장하는 교회는 때론 뿌리가 얕습니다. 중국교회에 성숙한 신학교육, 성숙한 윤리적 사고, 성숙한 사회 참여가 필요합니다.

-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딩광쉰: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에 부탁드립니다. 중국교회를 도와주실 때, 제발 여러분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중국교회는 중국교회의 길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귀중하지만, 여러분의 경험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나는 애덕기금회가 수천만 권의 성경을 인쇄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인쇄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읽히는 것이고, 읽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중국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중국의 긴 역사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혁명과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나의 생애는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 안의 작은 한 점이었습니다.  ♣








♣사진 출처 |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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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6.3.접속함]
♣쑨빈 | 중국인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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