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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4  통권 285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331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20세기 중국 천주교회의 토착화운동과 애국운동 (2)
영렴지의 애국운동
영렴지(英斂之, 잉롄즈, 1867∼1926)는 이름이 화(華), 자는 렴지(斂之)이고, 호는 안건재주(安蹇齋主)·만송야인(萬松野人)이다. 만주족 정황기인(正黃旗人)으로 1867년 북경에서 출생하였다. 19세에 아담 샬이 지은 〈주제군징(主制群徵)〉을 읽고 천주교에 흥미를 갖게 되어 여러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22세가 되던 해에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1902년에는 애국 계몽을 위해 《대공보(大公報)》 창간을 주도했다.

그는 외국 세력들이 중국교회를 억압하는 것과 외국 선교사들의 권위주의적인 자세에 대해 분개하였고, 우수한 중국인 성직자를 하루빨리 길러내어 중국인 스스로 중국교회를 끌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국에 대한 애국을 중시하면서도 중국인 신부와 신도들이 애국적 행동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주장을 거듭 발표하였다. 강렬한 민족 자존심과 애국심을 가진 천주교도였던 그는 아쉽게도 1926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상백의 애국운동
마상백(馬相伯, 마샹보, 1840〜1939)은 졘창(建常)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나중에 량(良)으로 개명했고, 자는 상백(相伯), 호는 화봉노인(華封老人)이다. 그는 1840년 강소성 단양(丹陽)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가 독실한 천주교도였기에 태어난 뒤 바로 세례받고 요셉이란 세례명을 얻었다. 

그는 12세이던 1852년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강남에 세운 첫 교회학교 ‘성이그나티우스공학(聖依納爵公學: 현 상해 서회중학(徐匯中學))’에 입학하여 10년 재학하면서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신앙 기초 등을 공부하였다. 이후 1861년 예수회 수련 과정에 들어갔고, 1870년 신부가 되어 안휘성 선성(宣城, 쉬안청), 강소성 남경(南京, 난징)과 서주(徐州, 쉬저우) 일대에서 선교사역에 들어갔다. 

그리고 1876년 선교사역에서 장벽을 만난 그는 예수회를 떠나 환속하였고, 결혼을 한 뒤 관직에 나가 양무운동에 가담하여 난구(灤口, 란커우)기기국에서 일하였으며, 뒤에는 주일(駐日)대사관 참찬(參贊)과 고베(神戶) 영사를 지냈다. 1882년에 이홍장(李鴻章, 리훙장)의 막료로 조선에서 재정 개혁 업무를 담당했고, 영국으로 상무 시찰을 다녀온 후 1892년에 나가사키(長崎) 영사와 주일대사관 참찬을 지냈다. 

그는 1898년에 선교사역에 복귀하여 여산(余山, 위산)성모당에서 1년 피정을 한 뒤 교황청으로부터 사면을 받았고, 1903년 강남 선교구 주교 요종리(姚宗李, 야오쭝리)와 예수회 회장 정소명(丁紹明, 딩샤오밍)의 지원 아래 서가회(徐家匯, 쉬자후이) 천문대 안에 터를 잡고 ‘진단(震旦, 전단)’학원을 설립했다. 그 뒤 학교 운영 관련 의견이 맞지 않자 이 학원을 떠나, 1905년에 엄복(嚴復, 옌푸) 등의 협조를 얻어 진단학원을 회복한다는 기치로 복단공학(復旦公學, 현 푸단대학 전신)을 개교하여 이끌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 강소(江蘇)도독부 외무사장(外務司長) 등의 직책을 맡았고 북경대학 총장대리를 지냈다. 1920년에 은퇴하여 상해 선교구에 머물며 천주교 서적 번역과 출판에 매달렸다.

마상백은 강렬한 민족의식과 애국 열정을 가진 천주교도였다. 19세 때 상해 주재 프랑스 영사 비서로 임명 요청했을 때 자신이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은 중국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단번에 거절했다. 그는 영렴지가 외국 선교사들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고, 외국 세력이 지배하는 교회의 각종 폐단과 중국 성직자들에 대한 억압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국교회의 자치를 주장했다.
 
1911년에 영렴지와 함께 마상백은 교황 비오 10세에게 교황청이 재능과 덕을 겸비한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해 가톨릭대학을 세울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우수한 중국인 신부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 편지는 교황청이 중국 천주교 최초의 대학 보인(輔仁, 푸런)대학 개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만년에는 항일애국운동에도 앞장섰는데, ‘중국민치촉진회(中國民治促進會)’와 ‘국난회(國難會)’ 발기를 주도하였고, 1932년에는 송경령(宋慶齡, 쑹칭링)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회’를 결성했으며, 1935년에는 심균유(沈鈞儒, 선쥔루), 추도분(鄒韜奮, 쩌우타오펀) 등이 조직한 ‘구국회(救國會)’의 대표로 추대되었다. 

그는 언론 기고를 통해 고작 8천만 명에 불과한 일본의 침략에 4억 인구의 중국이 저항할 엄두를 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국민당 정부와 애국 인민들이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의 활동은 전국적인 항일 애국운동과 항일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그는 ‘애국노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39년 그의 100세 생일 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국가의 빛이요, 인류의 자랑’이라고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고, 국민당 정부 또한 그를 ‘민족의 영웅이요, 국가의 자랑’이라고 표창했다. 그해 11월 4일 마상백은 베트남 량산(諒山)에서 병사했다. 

마상백은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교회사 차원에서는 명말 서광계에게 비견되는 천주교 학자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그가 펴낸 〈치지천설(致知淺說)〉은 천주교 정신과 자존자강의 민족의식을 함께 엮은 계몽서이다. 그는 걸출한 교육자이자 정치가 그리고 유명한 항일구국 애국자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중국 천주교회의 토착화 지향
천주교회에서의 애국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중국인 신부도 늘어나고 일련의 토착화의 지향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어 찬송가 보급이 늘고, 보정(保定, 바오딩)의 동려(東閭, 둥뤼)촌 등 천주교 성지 지정이 이어졌으며, 성당에 중국 복식의 성모와 중국 황태자 복장의 아기 예수상의 게시가 늘어났다. 1927년에는 뱅상 레브 주도의 ‘요한소형제회’, 첼소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주도의 ‘주도회(主徒會)’ 등 중국 국적의 수도회도 탄생하였는데, 특히 1922년 종좌특사로 중국에 온 코스탄티니는 중국 문화의 서구화보다는 중국 문화의 기독교화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며 중국교회의 토착화에 힘을 실었다.


기존 선교회 중심의 5개 선교구도 1924년에는 중국 지역 명칭을 딴 17개 교구로 개편되었으며, 1926년에는 4개 대목구(代牧區)가 세워지고 그 책임자로 4명의 중국인 주교가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 천주교회가 토착화의 지향이 구체화하는 일면이 있었지만 여전히 서양 선교회의 주도권은 유지되었다. 1934년 통계로 중국 주교 112명 중 중국인 주교가 19명으로 전체의 16.9%에 불과하였음과 1936년 통계로 중국인 신부가 1,835명으로 늘어났으나 전체의 40%에 그쳤음이 이를 잘 보여준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상해서회중학 [위키피디아 2026.4.29. 접속함] (아래) 첼소 코스탄티니 [바이두 2026.4.29. 접속함]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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