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의 애국운동 19세기 중엽부터 이미 중국 천주교회 차원에서의 토착화운동이 제기되었다. 20세기 들어 중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인 성직자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1903년 외국인 신부는 1,075명인데 비해 중국인 신부는 499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12년에는 외국인 신부 1,469명, 중국인 신부 729명, 1919∼1920년 무렵에는 외국인 신부 1,417명에, 중국인 신부 863명의 통계자료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중국인 성직자의 비율 증가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주교는 1685년 나문조(羅文藻)의 임명이 유일하였고, 그동안 모든 주교는 외국인으로 임명되면서 1926년까지 이어졌다.
20세기에 이르면서 제국주의 반대와 애국주의가 고양되고, ‘민주’와 ‘과학’을 제창한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이 전개되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후 전개된 기독교반대운동에 맞서 중국 천주교회에서도 반제애국운동과 교회자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17년 6월, 중국 천주교의 저명 애국인사인 영렴지(英斂之, 잉롄즈)는 《권학죄언(勸學罪言)》을 발표하여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을 높이는 데만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5·4운동이 일어나자 천주교 저명 애국인사 마상백(馬相伯, 마샹보)이 창립한 진단(震旦)대학 학생회와 상해중법학당(上海中法學堂), 서회공학(徐滙公學) 등 천주교계 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상하이 3파투쟁(罷工, 罷課, 罷市)에 동참했다. 천진에서는 가톨릭구국단(公敎救國團)을 설립하여, 산동 국권 회복 등의 방안을 모색할 신도대회를 소집했다. 이뿐만 아니라 천진의 신사·상인·학계·종교계로 구성된 사계연합회(紳商學敎四界聯合會)에도 동참하여 신도들을 대상으로 전단지와 선언서를 보내면서 범국민적 애국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6월 11일 자 《익세보(益世報)》에는 중국 교우들에게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 국토를 보호하는 데 힘을 보태자고 호소하는 글이 발표되었고, 6월 12일에는 천주교도 섭성오(聶醒吾, 녜싱우) 등이 《익세보》에 〈외교를 위해 중국인들에게 눈물로 고하는 글〉을 게재하여 서방 열강의 보교권이 중국 침략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해 예수회가 발간한 《성교잡지(聖敎雜紙)》도 〈가톨릭 교우들의 구국 열정(公敎友之熱心救國)〉이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천진 천주교의 애국 행동을 찬양하면서 교우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서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천주교회 차원의 애국계몽운동은 로마 교황청의 압박에 직면하였다. 순열사(巡閱使)로 북경으로 파견된 광둥 대목주교(代牧主敎) 게브리앙(光若翰, De Guebrient)은 1919년 11월 16일부터 23일까지 화북(華北) 주교회의를 주관하며 애국운동을 반대하였고, 11월 18일 교황청 사절 명의로 발표한 〈직예의 사제들에게 보내는 친서(致直隷司鐸書)〉를 통해, ‘사제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신문 매체를 통해 배우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개신교인들에게서 배우지 않아야 한다’라는 3개 항을 기반으로 교황과 주교의 중국교회에 대한 지도력을 지키려고 하였다. 1924년에도 중국 천주교도들에게 천주교회의 시위 참여를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고, 이러한 기조는 중국 천주교회 내부에서의 중국교회를 향한 변화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유지되었다.
뱅상 레브의 애국운동 뱅상 레브(Frederic Vincent Lebbe, 1877∼1940)는 벨기에 출신으로 1895년 파리견사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북경 종좌대목 파비에르(Pierre-Marie-Alphonse Favier) 주교와 함께 1901년 북경으로 와서 북당(北堂)에 배치되어 우선 중국어를 익혔다. 1902년 신부가 된 뱅상 레브는 천주교도를 포함한 중국인들의 급증하는 민족의식과 애국 열정을 중국 천주교회 토착화와 연계하여 추진하면, 중국 천주교 사업의 촉진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씌워진 서양 침략자의 서양이라는 외피도 벗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그는 “중국은 중국인에게, 중국인은 그리스도에게로(中國歸中國人, 中國人歸基督)”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선교 활동 중 이를 실천해 나갔다.
1905년 탁주(涿州) 본당 신부로 승진한 그는 부임 후 바로 자국의 보교권을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를 교회에서 철거하고 중국 황룡기로 바꿔 달았다. 그는 1909년에 전신회(傳信會)를 창립하여 중국인 신도들이 선교를 맡아 나가게 했고, 스스로 중국인 선교를 중국어로 진행하였다. 1912년 천진교구 부주교로 부임한 그는 역시 프랑스 국기를 황룡기로 바꿔 달았다. 그해 8월에 그는 중국인 성직자 왕진인(王進仁, 왕진런), 성첩삼(成捷三, 청제싼), 유준경(劉俊卿, 류쥔칭) 등과 함께 천진에서 전국적 천주교 조직 중화공교진행회(中華公敎進行會)를 창립하고 《광의보(廣義報)》를 간행하여 서양 과학과 문화 전파의 매개로 삼았다.
1915년 10월 뱅상 레브는 천진에서 《익세보》를 창간하여 백화문으로 출판하였고, 5·4운동에 중국 신도들이 가담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나아가 마상백(馬相伯), 영렴지(英斂之) 등과 함께 중국사회개량회를 조직하여 강연을 통해 애국주의를 적극 고취하고 반일 여론을 일으켰다.
1915년 9월 프랑스가 천진 조계지 밖에 자리한 노서개(老西開)의 토지 강점 시도가 주민들의 반대를 받게 되자. 뱅상 레브는 천진교구 부주교로서 ‘익세보’에 공개서한을 올려 프랑스 당국의 행위가 부당하며 이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정당하다고 천명하였고, 결국 정정(正定)으로의 강제 전보 조치를 감수하기까지 하였다.
뱅상 레브는 1920년에 유럽으로 돌아가 지내는 동안에는 중국 유학생 상대 신앙 훈련, 중국 학생 가톨릭 단체 조직, 공산주의 사상이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 전파되는 것을 막는 일 등에 전념하였다.
1926년 중국으로 복귀한 그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고, 1930년 안국(安國)에서 중국인들 중심의 요한소형제회(耀漢小兄弟會)를 창립하였으며, 1933년에는 견사회를 탈퇴하고 요한소형제회에 가입했다.
1933년 일본이 열하(熱河)를 점령하자 그는 구급대 240명을 모집해 전선에서 부상자들을 구호하였으며, 《익세보》를 통해 항일운동을 고취하다가 결국 이 신문이 정간되는 상황에도 직면하였다. 1938년에는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화북전선 민중복무지도감독단을 결성하여 단장을 맡았으며, 산서(山西)에서도 국민당 전선구호대장과 위생부대장을 맡았다. 뱅상 레브는 1940년 중공 팔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40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같은 해 중경(重慶)에서 병사했다. 그의 일생은 중국천주교회의 애국운동의 선봉이자 표상이 되고 있다.
(아래) 뱅상 레브(Frederic Vincent Lebbe) [출처 | 위키피디아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