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옛날 대정의 중심지는 대정고을이었다. 그러나 개화와 근대화의 시작과 함께 대정지역의 중심은 점차 모슬포로 이동하였다. 모슬포는 대정읍에 위치한 전통적인 어촌 이자 포구 중심지로, 교통‧통신‧산업‧교육의 요지로, 군사 기지화로, 저항 정신과 따뜻한 인심을 지닌 지역 이미지가 형성되어 왔다.2)
또한 대정 모슬포는 유배 관리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이에 따라 모슬포 지역에는 유배인의 거주와 생활 공간이 발달하였고, 이들과 지역 주민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서당 개설과 민중 교육 등 유배 문화는 지역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모슬포 지역은 제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문화 자본을 지닌 곳으로 자리 잡았다.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북과 산남으로 구분되어 왔으며, 초기 제주 기독교 역사 또한 이러한 지역적 구분 속에서 전개되었다. 산북지역에서는 제주성내교회가 중심이 되어 삼양에서 한림까지 담당하였고, 산남지역에서는 모슬포교회3)가 협재부터 서귀포에 이르는 지역을 담당하였다. 모슬포교회는 예장(통합)과 기장으로 분립되기 이전까지 하나의 교회였으며, 산남지역을 대표하는 중심 교회로 자리매김하였다.
모든 자료에 따르면 모슬포교회는 1910년에 창립된 산남지역 최초의 교회로 평가된다. 1942년 제주노회 통계보고4)와 박용규의 《제주기독교회사》에5) 따르면, 그 당시 모슬포교회의 교인 수가 제주 어느 지역보다도 훨씬 많았다.
【제주기독교 교세(1936. 5. - 1937. 4.)】
|
성내 |
삼양 |
성읍 |
중문 |
모슬포 |
고산 |
지사 |
두모 |
한림 |
금성 |
등록 교인 |
192 |
150 |
32 |
46 |
385 |
122 |
55 |
93 |
174 |
31 |
주일학교학생 |
216 |
250 |
17 |
35 |
359 |
205 |
51 |
115 |
168 |
25 |
위에 있는 교세표와 같이 모슬포교회가 제주 어느 교회들보다도 두드러진 성장과 영향력을 보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성장이 가능했던 요인을 전도인6)들이 먼저 있었지만, 모슬포교회 초기 세 명의 목회자의 목회 방안에서 찾고자 한다. 세 명의 목회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역 선교에 접근하였으며, 모슬포 지역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부합하는 선교 방안을 통해 대정지역을 넘어 제주 복음화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세 명의 목회자의 목회 사역을 비교‧분석하여 그들이 취한 지역 맞춤형 선교 방안이 당시 모슬포 지역의 사회‧문화적 조건과 어떻게 조응하였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들의 목회 방향과 사역 내용을 통해 모슬포교회 성장의 원인을 분석하고, 지역 선교 접근의 의미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산남지역인 모슬포교회가 1942년쯤에 이르러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을 구술적‧인물학적‧목회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모슬포교회가 제주에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요인을 밝히는 동시에,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도전 속에서 지역 선교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Ⅱ. 모슬포교회의 세 명의 목회자
1. 윤식명 목사(1914년 9월~1921년 10월)
1) 윤식명 목사의 생애와 제주 파송 윤식명 목사는 1870년 11월 17일 강원도 철원군 고궐리 윤씨 영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25세에 미국 북장로교가 한국에 파송한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원두우 목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7) 이후 35세이던 1904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6월 15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9월, 40세의 나이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윤식명 목사는 이후 목포양동교회에서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사역하다가 46세가 되던 1914년 8월 15일 광주 숭일학교 제4회 전라노회에서 전도목사로 제주도 대정 지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대정지방목사’8)였다.
윤식명 목사가 모슬포교회에 파송되어 8년간 사역을 하면서 거둔 성과는 주목할 만하였다. 그가 부임할 당시 지역 내 전체 교인이 불과 몇 명에 불과하였으나, 1917년에 세례교인 44명, 학습교인 20명, 원입인 48명이라고 보고되었다.9) 1921년 말에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모슬포교회는 이 시기에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는데, 1921년 8월 말 기준으로 장년 교인 수는 70~80명에 달하였다.10)
척박하고 거친 제주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모슬포교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윤식명 목사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11) 여기서는 그의 목회 활동과 선교 방식에 주목하여, 그가 어떠한 선교 전략을 통해 지역 교회의 성장을 끌어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2) 윤식명 목사의 선교 방안 분석 윤식명 목사의 선교 방안은 모슬포 지역의 지리적‧문화적 상황에 부합한 지역 맞춤형 선교 방안이었다. 그의 선교 방안을 분석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략적 거점 중심의 선교 방안이다.12) 윤식명 목사의 선교 방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략적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한 전도 전략이었다. 그는 ‘대정지방목사’로 파송을 받았으나, 지역적 범위에 제한되지 않고 대정 모슬포교회를 지역 선교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나 고린도와 같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를 통해 주변 지역으로 복음을 확산시킨 거점 중심 선교 전략과 유사하다.13)
윤식명 목사는 단순히 교회를 설립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교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일시적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립 가능한 신앙공동체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전도의 핵심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슬포 지역 주민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였으며,14) 산남지역과 광주에서 파송한 전도인들15)과의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개인 중심의 사역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전도팀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오늘날의 네트워크 선교(Network Mission)나 파트너십 선교(Partnership Mission) 개념과 유사한 선교 전략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지역 간 교회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도는 매우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윤식명 목사의 전도팀은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중문교회에서부터 표선 성읍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제주 각지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며 전도사역을 하였다. 이들의 전도 방식은 교회에 사람들을 초청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마을로 찾아가 주민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현장 중심의 전도였다. 이러한 전도 방식은 예수께서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셨던 사역 방식과도 연결된다.16) 윤식명 목사는 복음을 단순한 언어적 전달이 아닌, 삶 속에서 드러나는 증언으로 이해하였으며, 주민들과의 일상적 접촉과 관계 형성과 신뢰를 기반한 상황화17)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윤식명 목사의 선교 방안은 ‘오게 하는 전도’가 아니라 ‘찾아가는 전도’였으며, 특정한 방법론이나 기술보다 삶의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전략적 거점 확보, 협력 선교, 마을 중심 전도라는 세 가지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제주 지역 선교의 중요한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선교 방식은 오늘날 지역 교회선교와 공동체 중심 사역에 여전히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둘째,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의 선교 방안이다. 윤식명 목사는 사역하던 시기는 3‧1운동과 독립군자금모금 사건을 전후로 민족의식이 고조되던 때였으며, 당시 통화권에서 벗어난 마을에서는 주민 스스로 개량서당인 의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윤식명 목사도 ‘교육에 대한 강한 열망’이 생겼다. 윤식명 목사는 이러한 시대적‧지역적 요구를 인식하고, 기독교 전파와 신교육을 통해 민족의식 함양과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자 모슬포 지역에 광선의숙을 설립하였다.18)
‘광선의숙’은 ‘조선의 광복’을 의미하는 이름처럼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세우는 윤식명 목사의 실천적 교육 신앙이 구현된 공간이었다. 그는 이 교육 기관을 통해 기독교 신앙 교육뿐 아니라 민족 계몽사상과 현실 인식을 함께 가르치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닌 지역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교육 선교는 대정지역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유배 문화와 서당 전통 그리고 비교적 높은 교육·문화 자본의 토대 위에서 더욱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모슬포 지역에는 광선의숙 외에도 신유의숙과 한남의숙 등이 설립되었다.
제주노회가 펴낸 《제주기독교 100년사》에서는 “모슬포와 산남지역에서도 어린아이들을 위한 아동학교를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며, 이 모임이 모체가 되어서 교회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본다.19)
아울러 윤식명 목사는 강문호와 강규언을 군산 영명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가파도 출신 고수선을 공부시켜 제주도 첫 여의사로 만들었다. 이는 신앙 교육과 신교육을 결합하여 지역사회의 지도자를 배출하고, 그들을 통해 복음의 영향력이 지역 전체로 확장되도록 한 선교 전략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교회 외형적 성장보다 ‘사람을 세우는 것’을 우선한 것으로, 마태복음 28:19-20의 제자도 명령과도 맞닿아 있다.20)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재 양성 중심의 선교는 지속적인 전도와 모슬포교회가 성장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셋째, 삶으로 증거하는 전도이다. 윤식명 목사는 전도 사역 과정에서 토착 종교 세력과 외부 세력의 저항, 그리고 전도 여행 중 핍박과 폭행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복이 아닌 용서와 사랑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1)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윤식명 목사는 신앙의 진정성을 삶으로 증언하였다. 그는 폭력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고통 가운데서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자,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삶의 증거였다.
더 나아가 윤식명 목사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도 뜻을 같이하였다. 실제로 3‧1운동과 조봉호 독립군자금 사건은 제주 기독교와 민족운동과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18년 전도여행 길에서 환난을 당한 일과 3‧1운동과 독립군자금 운동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제주 주민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닌 진실로 믿을만한 도라고 인정하며, 칭송하고 환영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22) 이러한 변화는 그해 성탄절에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났다.23) 이처럼 환난 가운데서도 용서와 사랑을 실천한 삶, 독립과 민족을 향한 책임 있는 참여는 윤식명 목사의 선교가 단순한 교세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드러내며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공존과 상생의 삶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2. 이경필 목사(1921년 12월~1929년 5월)
1) 이경필 목사의 생애와 제주 파송 이경필 목사는 1876년 6월 2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4년 부모를 따라 전라북도 금산읍으로 이주했다. 이경필 목사가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된 계기는 논산에서 활동하는 미 감리교회의 청년 전도대에 의해서였다. 그는 1906년 이곳을 순회하는 마로덕(L. O. McCutche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 지역 최초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여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9월 여산 지방의 다섯 교회를 마로덕 선교사와 함께 돌보는 동사목사로 장립되었다. 1917년에 목포 양동교회로 부임하여 1921년까지 사역하였다. 1921년 10월 14일 광주 숭일학교에서 회집한 전남노회 임시회는 제주 전도목사로 이경필을 선정하였고, 그는 1921년 12월 27일 목포에서 경흥환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24)
이경필 목사는 선교의 거점 교회인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그다음은 산남지역의 여러 주변 교회를 돌아보는 순회 전도목사로 활동하였다.25) 그가 사역하는 동안 거둔 성과는 광선의숙의 재건과 부흥집회를 통한 성장이다. 특히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면서 신축 예배당 헌당식과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200명에 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당회 및 부인전도회의 조직, 부인 야학을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퇴치운동에도 기여하였다.26) 이경필 목사는 1927년 3월 말 모슬포교회 성례 집례를 끝으로 제주 사역을 중단하고 쉼을 시작했다. 윤식명 목사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이경필 목사의 목회 활동과 선교 방식에 주목하며, 그가 어떠한 선교 전략을 통해 지역 교회의 성장을 끌어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2) 이경필 목사의 선교 방안 분석 이경필 목사의 모슬포교회 사역과 산남지역 선교 방안을 분석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알게 된 특징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부흥회를 통한 교회 성장이다. 이경필 목사는 1921년 12월 모슬포교회에 부임하고 이듬해인 1922년 3월 산남지역 연합부흥회를 개최하여 10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 부흥회의 주강사는 닷슨(Samuel K. Dodson: 도대선) 선교사였으며, 교사로는 이기풍, 도대선, 이경필이 참여하였다. 성경을 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은 남녀 40여 명이었으며, 새벽기도회와 오후 성경 공부와 저녁 집회로 이어졌다. 부흥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뤄졌고, 저녁 집회에서는 이기풍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기존 신자들이 통회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새로 믿게 된 이들도 20여 명에 이르렀다.27)
이 부흥회를 인도한 닷슨 선교사는 모슬포교회를 “가장 소망 있는 교회”라고 평가하여 선교 본부에 보고하였다.28) 이어 1923년 3월에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모슬포교회 성장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부흥회에는 수백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예배당 마당에 임시로 천막을 설치할 정도로 큰 성황을 이루었으며, 1주일간 집회가 지속되었다. 이때 많은 환자의 다양한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증언이 이어졌고, 이는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흥회 이후 나타난 변화 가운데 주목할 점은 부인전도회의 조직이다. 여성 신자들이 순번을 정해 적극적으로 전도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부인 야학이 설립되었다.29) 또한 광선의숙이 재건되는 등 교육 활동이 확장되었다.
이후에도 모슬포교회는 산남지역 신앙 운동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24년 3월 15일 산남지역 대사경회에서는 모슬포교회 교인 조창권, 최정숙이 장로로 피선되었다. 1925년 5월과 1927년 3월에도 각각 산남지역 대사경회가 모슬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28년 봄에는 김상준 목사를 초청하여 산남지역 부흥 사경회가 열었으며, 1929년 1월에는 김익두 목사를 다시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모슬포교회 신축 예배당 헌당식을 거행하였다.30) 이처럼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열린 부흥회와 사경회는 교회 성장뿐만 아니라 산남지역에 새로운 교회 개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제주 전 지역을 다니면서 성도들을 격려하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를 개최하여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둘째, 교회 조직과 예배당 신축을 통한 성장이다. 《제주교회 70년사》는 이경필 목사를 “조직적인 주의력을 가지고 밤낮으로 돌아보며 전도한 경작자”라고 평가한다.31) 이기풍, 윤식명, 이경필 세 목사는 제주 선교의 선구자적 인물로, 각각 파종자, 관수자, 경작자로 비유되며 제주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전도자들이었다.
이경필 목사는 특히 교회 조직과 행정 체계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사역 가운데 대표적인 성과는 모슬포교회의 당회 조직이다. 당회는 1924년 5월 5일에 조직되어 역사적인 첫 당회를 개최하였으며,32) 이를 통해 모슬포교회는 제주 산남지역 최초의 조직교회가 되었다.33) 당회 조직과 조직교회의 전환은 교회의 자립과 함께 행정의 안정과 목회자의 위임을 통해 지속적인 교회 성장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부인전도회의 조직과 운영은 지속적인 전도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여성 교육을 위한 야학이 설립되었다. 또한 닷슨 선교사는 선교 본부의 보고서에 “주일학교는 잘 조직되어 있고 모두 일곱 반이다. 불신 아동을 위한 주일학교가 정규 집회 전에 열리는데, 내가 한국에서 본 가장 활력 넘치는 모임이다”라고 기록하였다.34)
이경필 목사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모슬포교회 신축이었다.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활발한 교육 사업으로 인해 예배당 공간이 좁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다. 이에 이경필 목사는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제강점기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인들의 헌신을 끌어냈으며, 특히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재를 아낌없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바쳤다. 그 결과 1926년에 신축 예배당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는 이경필 목사의 희생적 리더십과 교인들의 헌신이 결합한 결과였다.
모슬포교회 신축은 교세 확장에 따른 물리적 공간 확보라는 의미를 넘어, 지역사회 내에서 중심 교회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경필 목사는 교회 조직과 행정 기반을 확립하고, 여성 신자와 교회학교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교육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지역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모슬포교회를 단순한 예배 공동체를 넘어 지역사회의 교육과 전도의 중심지로 확장함으로써, 산남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지속 가능한 선교 모델을 제시하였다.
셋째, ‘부인전도회’와 ‘부인 야학’을 중심으로 한 여성 운동이다. 모슬포교회의 초기 신자들을 보면, 김나홍, 이화숙, 김순전과 가파도 출신의 고수선을 비롯하여 송경서, 최정숙, 고계형, 장예규, 고훈장의 부인 등 다수가 여성이었다. 이는 해녀 문화가 강하게 형성된 지역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당 지역은 여성 중심의 해양 노동을 기반으로 해녀 공동체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여성 간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35) 이러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여성 중심의 사역은 효과적인 전도 방안으로 기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경필 목사는 이러한 지역적 여건을 고려하여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도 개설되었다. 이 야학은 광선의숙과 연계되어 지역사회 여성 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는 교회와 지역사회에 헌신된 인적 자원을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다.36)
이와 같은 사례는 여성 교인들의 역할이 단순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육지에서 파송된 목사와 전도인들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제주의 토착문화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한계를 보완한 이들이 바로 제주 초기 여성 교인들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제주 초기 기독교 전도팀에는 김나홍과 천아나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파송된 목회자와 전도인들에게 제주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제주 여성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매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7)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집단이었다. 제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여성 인구 비중이 높았다는 점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략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여성의 신앙은 가정 내에서 자녀에게 전수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선교적 파급력이 컸다. 고창진38)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제주 기독교 선교를 분석하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중심의 전도 전략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녀 공동체와 같이 강한 연대성을 지닌 여성 중심의 지역사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특성과 필요에 부합하는 교육과 함께, 여성이 여성을 전도하는 방식이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점에서 제주선교를 이해함에 있어 여성 리더십과 그 역할을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인 관점이자 중요한 전도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최흥종 목사(1929년 7월~1931년 7월)
1)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제주 파송 오방 최흥종 목사는 1880년 5월 4일 광주 불로동에서 토반이었던 아버지 최학신과 어머니 국 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영종이었으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흥종으로 개명하였다.39) 그는 1907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1909년부터 1914년까지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보위렴) 선교사를 도와 의무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12년에는 포사이트의 의료봉사 활동에 동참하여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였다.40) 이러한 의료선교 경험은 이후 그의 목회와 사회봉사 사역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21년 1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제7회 전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이어 목사로 임직하였다. 이후 노라복(Robert Knox) 목사와 함께 광주 북문밖교회 의 동사목사로 청빙되었다.41) 1929년 6월 전남노회는 최흥종 목사의 제주도 모슬포교회 위임목사로 청빙을 허락하였으며, 그는 같은 해 7월 14일에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모슬포교회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42)
최흥종 목사가 제주도에서 시무하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30년 11월 14일에 제주노회의 창립이다. 창립노회에는 총 17개 교회가 참여하였으며, 참석 인원은 목사 6인, 장로 7인 등 모두 13인이었다. 이 창립노회에서 최흥종 목사는 초대 제주노회장으로 추대되어 제주노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43) 그러나 그는 제주도의 풍토와 수질이 체질에 맞지 않아 소화기 계통의 질환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었고, 결국 1931년 7월 모슬포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약 2년간의 짧은 사역 기간에 그는 2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27명을 학습교인으로 세우는 성과를 남겼다. 비록 사역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목회는 제주교회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최흥종 목사가 추구했던 목회의 특징을 중심으로 그 사역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전인적‧통합적 목회 리더십이다. 《제주기독교 100년사》에 따르면, 최흥종 목사가 모슬포교회로 부임하던 당시 교회는 두 가지 중요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모슬포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최정숙 장로44)가 제주성내교회로 이동한 사건이다. 또 다른 하나는 대정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이재수의 난의 기억과 더불어, 이후 4‧3 사건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김달삼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이었다. 이는 유배 문화와 지식층을 중심으로 형성된45) 시대적 흐름으로, 지역사회 전반에 상당한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대정지역과 모슬포교회를 바르게 세워 가기 위해서는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강력한 목회 리더십이 요구되었으며, 그 적임자가 바로 최흥종 목사였다.46)
차종순은 그의 논문에서 최흥종 목사의 사상과 리더십에 대해 “복음적 신앙에 사회봉사적 삶을 결합함으로써 복음과 사회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인식하였다. 그는 1930년대 민족해방 중심으로 좌‧우 대결이 첨예화되던 시기에 조정자 역할을 감당한 독립운동가였다.”47)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광주YWCA 명예회장 조아라는 자신의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당시의 사회는 혼란기였는데 제가 여학교 4학년 때 제주도 모슬포에 하계학교가 열려 그곳에 갔을 때였습니다. 강태민 박사가 연설하고 있는데 좌익청년들이 소란을 피우자, 최흥종 목사님께서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말했고 모두가 조용해지더군요. 그만큼 그는 불신 사회에서까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48) 이는 그가 진정성 있는 인격적 리더십으로 교회 안팎의 신뢰를 얻었음을 보여준다.49) 이런 좌‧우 대립의 한복판에서 그는 화해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복음과 사회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전인적 목회를 실천하였다. 또한 제주노회를 전남노회로부터 분립시켜 제주 지역 교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였으며, 이를 통해 교회 내‧외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50) 최흥종 목사는 이런 영향력 있는 리더십으로 제주노회 초대 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제주 교회사에서 중요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둘째, 인맥과 관계를 통한 선교 방안이다. 최흥종 목사의 목회와 선교는 폭넓은 인맥과 관계망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김안식51)은 그가 선교사로서 어학 교사, 선교병원 조수, 나환자 집단수용소의 한국인 조수와 책임자 등을 거쳐 장로와 목사로 임직받았으며, 시베리아 선교사, 광주 YMCA 창설 및 회장, 노동공제회 광주지부장, 신간회 광주지부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였다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고, 기독교의 포용성과 사회적 확장성을 보여 주었다.
최흥종 목사가 모슬포교회로 부임하게 된 배경 역시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모슬포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목회자가 필요했다. 최흥종 목사는 이전에 모슬포교회에서 시무했던 이경필 목사의 후배로서 그의 민족적 성향과 사회봉사 중심의 명성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차종순52)은 이를 바탕으로 그를 “복음적‧사회봉사적 목회자”로 규정하였다. 모슬포교회의 장로였던 원용혁은 모슬포교회 초기 목회자였던 윤식명 목사와 동역한 전도인이었으며, 최흥종 목사와는 1909년부터 관여하였던 광주 나환자 집단치료소 시절부터 알고 지낸 관계였다. 이러한 개인적‧사역적 인연들이 최흥종 목사의 모슬포교회 부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 나아가 서서평(E. J. Shepping) 선교사 및 서로득 부인과의 협력 관계는 그의 사역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서평 선교사는 제주성내교회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의료, 위생, 성경 교육과 복음 전파 사역을 펼쳤으나, 주로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이경필 목사와 최흥종 목사에 대한 깊은 신뢰와 친분에 기반 한 것이었다. 김안식은 “1927년 최흥종 목사와 함께 서서평 선교사는 빈민 구제 사업에 전념하였다”라고 말했다.53) 서서평 선교사는 1925년과 1928년 두 차례에 걸쳐 모슬포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여러 지역에 부인조력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1934년 3월 8일에 제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최흥종 목사의 목회적 배경과 영성 형성에는 의료 선교사인 포사이트와 서서평과 카딩톤(H. A. Codington, 고허번)과 같은 의료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54)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했던 서로득 부인은 그의 편지에서 “10년 전에 세워진 교회인데, 놀라운 정도로 성장하였다고 말하였면서..., 제주노회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강한 조직으로 자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55)라고 썼다.
Ⅲ. 결론과 요약 본 연구는 산남 지역 복음의 전초기지로 기능했던 모슬포교회의 형성과 성장을 세 명의 초기 목회자인 윤식명, 이경필, 최흥종 목사의 목회와 선교 방안을 중심으로 비교‧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모슬포교회의 성장은 단일한 전도 방법이나 개인의 역량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각 목회자가 당대 모슬포 지역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응답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선교 전략을 계승‧발전시킨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식명 목사는 모슬포교회를 산남지역 선교의 전략적 거점으로 설정하고, 찾아가는 전도와 협력 중심의 선교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그는 교육 선교와 인재 양성을 통해 지역사회 내부에 복음의 토착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삶으로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의 선교는 교회 외형 확장 이전에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신앙 공동체의 기초를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볼 수 있다.
이경필 목사는 윤식명 목사가 마련한 선교적 토대 위에서 부흥회와 사경회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교회 조직과 행정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모슬포교회를 산남지역 최초의 조직교회로 발전시켰다. 특히 부인전도회와 부인 야학을 통한 여성 중심의 선교는 해녀 공동체라는 지역적 특성과 결합하여 높은 전도 효과를 나타냈으며, 가정과 지역사회로 복음이 확산되는 구조를 형성하였고 본다.
최흥종 목사는 사회적 갈등과 이념적 긴장이 심화하던 시기에 부임하여, 복음과 사회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전인적 목회를 실천하였다. 그는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와 사회봉사 중심의 사역을 통해 교회 안팎의 신뢰를 확보하였고, 제주노회 창립과 초대 노회장으로서 제주교회의 제도적 자립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의 사역은 교회를 지역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공공적 신뢰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종합하면, 모슬포교회의 성장은 ‘거점 형성과 토착성도–조직화와 확장성–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이라는 단계적 발전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제주 산남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한 지역 맞춤형 선교가 교회의 지속적 성장과 지역사회 내 신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오늘날 지역 교회가 처한 위기 속에서도, 지역의 삶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복음을 구현할 때 여전히 유효한 선교적 대안이다.
-미주- 1) 윤식명 목사(1914년 9월~1921년 10월), 이경필 목사(1921년 12월~1929년 5월), 최흥종 목사(1929년 7월~1931년 7월) 2) 모슬포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모슬포교회 100년사》,(서울: 고려인쇄사, 2009), 24-31. 3) 예장(통합)과 기장으로 나누어지기 전에는 하나의 교회였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231. “1942년 제주노회 통계보고에서는 성내교회 교인 수가 202명이며, 모슬포교회는 41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5) 박용규, 《제주기독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402. 6)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 171. “제주도 모슬포교회가 설립되다. 일찍이 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이 이재순, 강병담, 최대현 등과 협력하여 강흥주, 정응호, 신창호, 김씨 나오 등을 얻고....,” 7) 전북노회, 전북노회 제35회 회록, 1941, 22. 8) 박용규, 《제주기독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182. 윤식명 목사의 공식적인 타이틀은 “대정지방목사”였다. 9) 모슬포교회(기장) 교회역사관 사료. 10) <기독신보>, 1921년 9월 7일 자. 11) 제4회 총회록(1915), 17. “그곳 인민의 풍속은 육지와 부동하여 남자는 편하고 여자는 수고함으로 범사에 권리가 여자에게 있고 전도하기가 극난하되 믿는 자 중에 진실한 자가 많고 장래의 희망도 점점 좋아감으로 위로를 많이 받는다”. 12) 박용규, 《제주기독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252. “모슬포가 이 지역의 거점이었다. 이기풍이 이 지방의 개척자지만 실질적인 초석을 놓은 인물은 윤식명이었다”. 13)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2016), 120.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과 김경신 전도인이 힘을 합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한 결과 기도처와 혹은 예배 모임처로 있던 미조직 교회들이 교회로 발전하여 1921년에는 용수리교회, 1922년에 협재리교회, 두모리교회, 성읍리교회, 법환리교회 등으로 발전되었다”. 14) 이화숙, 김순전과 가파도 출신의 고수선, 그리고 송경서, 최정숙, 고계형, 장예규, 고훈장의 부인 등을 전도하였다. 15) 이재호, “제주 초기 개신교 역사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2022), 90 “이재순, 강병담 전도인의 협조와 강진 출신의 최대현 전도인과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파송한 전도인 원용혁과 광주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김경신 여전도인, 그리고 목포 양동교회 출신의 김영진 영수 등이 있었다.” 16)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17) 복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수용자의 문화‧사회적 맥락에 맞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18)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제주: 북제주문화원, 2005), 422. “개신교 전파와 민족 문화의 창달을 위해 1920년 모슬포에 광선의숙을 개설하였다. 이 사숙은 4년제로 초등학교를 담당, 개신교의 박애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교육방침으로 운영하였다. 광복 조선, 즉 ‘조선(朝鮮)을 광복(光復)한다’는 뜻으로 광선의숙이라 명명하고, 또 모슬포교회 부설교육기관으로 운영하였는데 교사들은 강규언, 정을규, 최정숙, 원용혁, 정동수 등이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철저한 기독교인들이다. 19)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2016), 97. 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21) 한국교회사학회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23. “1918년 9월 2일에 제주도 법환리교회에서 전도에 종사하는 목사 윤식명이 원용혁, 김진성, 김씨나홍, 천씨아나로 더불어 본리에 전도하러 나오는 도중에 다수한 태을교도가 방포 1성에 석으로 매장하자는 소리를 지르며 각기 목봉으로 무수히 난타하니 김진성은 다행히 피신하여 중문리 천제연 수중에 들어가서 재석구멍하였고 김나홍, 천아나는 1,2차 목봉을 받고 피신하였으며, 윤식명, 원용혁 양인은 중상하여 혼도하니 상처가 분열되어 선혈이 림난한지라. 중문리 주재소 경관과 면직원 일동이 야중에 현장에 래도하여 양인을 담성하며 서귀포 소천의원에 입원하여 1개월간 치료 후에 간산히 기동케 되어 모슬포로 래하는 선중에서 목포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압거 중에 있는 태을교도 68명을 몽착케 되매 윤, 원 양인은 자기의 고통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절히 해교도에게 대하여 전도하니 해교도중 전일 자기의 난폭한 행동을 각오하고 감동되어 낙루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를 목격한 순사 박덕우는 믿기로 작정하였다. 기후에 치료가 불완전하므로 목포병원에 래하여 완치되었으나 결국 윤식명은 우완이 병신되고 원용혁은 두골이 병신되어 항시 불인케 되니 그는 제주에 교회 설립된 후 초유핍박이었다.” 22) 모슬포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모슬포교회 100년사》,(서울: 고려인쇄사, 2009), 99. 23) <기독신보>, 1920년 2월 18일 자. “1919년 12월 25일 모슬포교회에서는 삼백여 명의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탄절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성탄절 행사에 동참했던 불신자들이 13원 50전을 출연하여 성탄절 행사 비용에 보태라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영수하였으며, 또 원용혁 전도인이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광주 남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데 불신자들까지 동참하여 12여 원을 모아줌으로써 그가 신학을 할 수 있었다.” 24) <기독신보>, 1922년 2월 1일 자. 모슬포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모슬포교회 100년사》,(서울: 고려인쇄사, 2009), 112-113.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144. 25) 강문호, 문태선, “제주선교 70년사”, 37. 26) 모슬포교회(기장) 교회역사관 사료. 27) <기독신보>, 1922년 5월 31일자. 28) Korea Mission Field, 18-19(1922), 210. 29) 한국교회사학회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22-323. <기독신보>, 1923년 5월 23일자. 30) 모슬포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모슬포교회 100년사》,(서울: 고려인쇄사, 2009), 135-136. 31) 강문호, 문태선, “제주교회 70년사”, 37-38. “이경필은 전라노회의 파송으로 윤식명 목사의 뒤를 이어 모슬포에 거주하면서 지방 순회 전도목사로 활동하였다. 이기풍, 윤식명, 이경필 세 목사는 제주 선교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전도자들로 후일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기풍 목사는 복음의 씨를 짊어지고 와서 전파할 때 의관을 찢겨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뿌린 파종자와 같으며, 윤식명 목사는 피땀 흘리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통도 불구하고 사역한 관수자이며, 이경필 목사는 조직적인 주의력을 가지고 밤낮으로 돌아보며 전도한 경작자이며, 이 세 목사를 도와 전도에 종사한 수많은 전도인들은 주님의 사업에 충실하게 수종 든 보조병들이라”. 32) 모슬포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모슬포교회 100년사》,(서울: 고려인쇄사, 2009), 119. 33) 조창권은 본래 제주 삼도리 출신으로 제주 성내교회 교인이었는데, 약종상 일로 모슬포에 정착하였다. 1919년 조봉호 독립군자금모금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최정숙은 모슬포교회 첫 번째 여신도로 기록된 김나홍의 아들로 1921년 9월 7일 자 <기독신보>에 종교계의 모범적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34) Korea Mission Field, 18-19(1922), 210. 35) Mattie Ingold Tate, “The Cheiju Work”, The Korea Mission Field(1915), 58. “제주 여성들이 육지와는 달리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자리를 구분하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8곳의 예배 모임처와 90명의 세례교인이 있다. 니스벳 부인과 나(테이트 부인)는 49명의 여성반을 가르쳤다.” 36) 김나홍은 모슬포교회 초대 장로 최정숙의 모친으로, 윤식명 목사가 1918년 법정사 항일항쟁 당시에 시위대와 마주쳤다가 공격을 받을 때 천아나와 김나홍과 함께 있었다. 또한 가파리 출생인 고 씨는 제주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1‧4후퇴 때 제주도에 내려와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벌였다. 당시 훈장은 유대문화를 전파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것인데, 그 훈장의 부인인 정술생이 1916년에 모슬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37) 제주 초기 기독교 전도팀에는 김나홍과 천아나가 있었다. 이들의 역할이 육지에서 파송된 목사와 전도인들에게 제주 언어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것과 제주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38) 고창진, 《사회문화 관점에서 본 제주 기독교와 선교》,(서울: 사자와 어린 양, 2023), 184. 39) 오방 기념사업회, 《화공동진의 삶》,(광주: 광주YMCA, 2000), 30-31. “젊은 시절 유명한 건달로 알려졌던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고, 영종에서 흥종으로 개명하였다”. 40)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164. 41) 제18회 총회록, 125. 42) 모슬포교회 당회록. 43) 한인수, 《호남교회 형성인물》, 238. 44) 최정숙은 모슬포교회 첫 번째 여신도로 기록되어 있는 김나홍의 아들로 1921년 9월 7일자 <기독신보>에 종교계의 모범적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45)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192. 제19회 총회록를 보면, “제주 모슬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란이 있사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재수의 난과 계속적 흐름 가운데 있었던 4.3 사건의 주요 인물인 김달삼이다. 46)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182. “재정적, 사회적 압박은 1930년대에 들어서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기풍, 최흥종 두 목회자의 부임은 제주교회에 이러한 압박들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준비 기간이 되었다.” 47) 차종순, “호남교회사에 있어서 복음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사상으로”(계명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7. 48) 조아라, “승화된 인격자”, 광주YMCA역사편찬위원회(2000), 217. 49) 김안식, “오방 최흥종 목사의 토착적 사회복지선교에 관한 연구”(한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86,129-130. “최흥종 목사는 기독교는 사랑의 실천이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도 사랑이었다.” 50)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서울: 쿰란출판사, 2016), 192. 51) 김안식, “오방 최흥종 목사의 토착적 사회복지선교에 관한 연구”(한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77-78. 52) 차종순, “호남교회사에 있어서 복음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사상으로”(계명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10. 53) 김안식, “오방 최흥종 목사의 토착적 사회복지선교에 관한 연구”(한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80. “1927년 최흥종 목사와 함께 서서평 선교사는 빈민구제 사업에 전념하였다.” 54) 황성욱, “한국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 공동체의 대안적 연구”(협성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0), 108. “의료 선교사들이 지닌 신앙적 특징은 첫째,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둘째,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셋째, 성경 말씀에 연구보다 말씀대로 사는 삶의 실천을 중시했다. 넷째, 주로 평신도들이었으며 주류가 아닌 도외시 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차종순은 최흥진 목사와 함께한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종교(religion)가 아니라 신앙(faith)이었다”라고 말한다. 55) 양창남, 《조선을 섬긴 행복》(서울: 서빙더피플, 2012), 10-12.
고창진 박사 | 제주연구탐라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