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기독교회 20세기 들어 중국에서 외국 선교단체로부터 독립한 중국인이 이끌어 가는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이 연합운동 또는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연합운동은 1913년 결성된 ‘중화속행위판회(中華續行委辦會, The China Continuation Committee)’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유지된 중화기독교협진회(The 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China; NCC)가 연합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연합운동은 1918년 남경에서 열린 중화기독교장로회 총회에 런던선교회와 공리회가 참여하여 ‘중화기독교합동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China)’ 결성 계획이 수립되고, 1922년 상해에서 열린 합동 추진 임시총회에서 ‘중화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hina)’로 명칭과 정관을 확정하였다. 여기에 화북·광동 등지에서 조직된 중화기독교회들이 추가 가입하여 1927년 10월 1일 상해에서 최초의 총회가 개최되면서 구체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27년 첫 총회에는 중국인 66명, 외국인 선교사 22명 등 총 88명의 위원이 18개 성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초대 의장은 성정이(誠靜怡), 총간사는 케플러(A.R. Kepler)가 맡았으며, 14개 위원회가 조직되어 회무 심의를 진행하였다. 총회에는 공리회, 침례회, 준도회(遵道會), 런던선교회, 캐나다 장로회,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호주 장로회, 영국 장로회, 아일랜드 장로회, 뉴질랜드 장로회, 귀정교회(歸正敎會)스웨덴 행도회(行道會), 기독동인회, 스코틀랜드 장로회 등이 참여하였다. 643개 조직교회, 1,877개 전도소, 333명의 안수 목사, 2,072명의 전도사역자 112,467명의 세례교인이 소속되었다. 다만 성공회를 비롯한 기타 선교회 여럿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다.
기존의 연합운동이 교리와 행정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자양(自養)·자치(自治)·자전(自傳)의 구호 아래 교회의 중국 토착화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달리 이 1927년 총회에서는 정관에 교리와 행정 문제까지도 명시하였다.
정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것,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 사도신경을 인정할 것 등 3개 조의 신앙적 기초를 가진 모든 중국교회가 소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입 이후에도 기타 독자적 신조를 세우고 기존 선교회와의 관계 등을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외국 선교사들도 중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임원이 될 수 있게 하였다.
행정 기구는 교회, 분구(대표: 교회 단위 1∼3인), 교구(분구 대표로 구성, 분구 신도 수 500인당 2인, 평신도 1인 포함), 총회(교구 대표 2∼10인, 신도 수 3,000명까지 2인, 그 이상은 3-10으로 비례 증원, 위원 1/2은 평신도)로 구성하였다. 총회는 4년 단위로 개최하고, 평시에는 교무총회가 회무를 맡았다. 1930년 제2회 총회는 광동에서 열렸다.
독립교회 20세기 들어 중국에서 중국인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의 지향은 독자적 구상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으로도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독립교회로는 야소가정(耶蘇家庭), 소군(小群), 진야소(眞耶蘇)교회, 기독도회당 등을 들 수 있다.
야소가정(Family of Jesus)은 경전영(敬奠瀛, 1890∼1957)이 웨슬리회 여선교사 노라 딜렌벡(Nora Dillenbeck, 1871∼1952)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초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마장(馬莊)에서 설립한 성도신용저축사(聖徒信用儲畜社)와 1926년 세운 잠상학도방(蠶桑學道房)을 통합하여 1927년 출범하였다. 야소가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는 하나님의 형제자매이므로 모두가 재산을 헌납하고, 생산 활동을 분담하고, 의식주에서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칙을 지켜 나갔다. 이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잘 섬기기 위해 교인 모두가 근검, 청빈하게 하였으며, 공동 교육과 복지를 지향하며 전도에 힘썼다. 신도들은 주로 농업 등 생산에 종사하였으나, 교사, 의사, 기사 등 전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각급 학교도 운영하였다. 야소가정은 1950년 통계로 가정 수 300개, 신도 수 약 15,000명으로 집계된 바 있다.
소군(Little Flock)은 예탁성(倪柝聲, Watchman Nee, 1903∼1972)이 성찬식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주창하며 1926년 성립되었다. 그는 복주성공회서원 재학 중이던 1921년경 왕대(王戴) 등과 함께 성찬식 중심 예배를 했고, 이후 교파를 초월하여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끌게 된 교회를 교회성회소(敎會聖會所)라 하고, 직접 편찬한 찬송가 표제로 ‘소군시가(小群詩歌)’라 하였기에 그들 교회를 ‘소군’이라고도 했다. 소군은 교단 조직이나 정식 목사 없이 신도 상호 간에 형제자매라 부르며 지도자인 장로나 집사와 신도들 모두가 차별 없이 예배의 각 순서에 참여하였다. 성찬식을 특히 강조하여 주일예배 때마다 가졌고, 필요에 따라 방문 성찬도 가졌다. 세례나 헌금은 자유의사로 진행하였고, 종교 절기를 따르지 않았으며, 십자가상 등을 걸지도 않는 등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소군은 중국 기독교회의 신앙각성운동의 성격과 본색화 지향의 하나로 간주한다.
진야소교회는 1917년 위은파(魏恩波, 1879∼1919)의 주도하에 성립되었다. 위은파는 런던선교회 북경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1915년 안식교에 입교하여 침례를 다시 받았는데, 1917년 금식중 환상을 보고 이름을 바오로(保羅)라고 개명하고 천진, 하북 일대에서 전도를 힘쓰며 진야소교회를 시작하였다. 1918년에는 북경에서 창립 총회를 열고 감독에 취임하였다. 진야소교회는 ‘기독교회를 예수의 이름으로 통일하자’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1947년까지 11회 전국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4년에는 조직이 남북으로 분열하였고, 1947년 본부를 싱가포르로 옮겼다. 1949년 신도 수 약 196,000명에 달하였다는 통계 자료가 있다.
기독도회당은 왕명도(王明道, 1900∼1991)에 의해 1925년 북경에서 설립되었다. 북경 동인당의원 의사였으나 의화단운동 때 예수교인으로 잡혀 고문을 당하다 죽음에 이른 부친을 둔 왕명도는 27세에 목사가 되었고, 성경유오설을 비롯한 새로 밀려오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이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고백하며, 누구나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원수로부터 분별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기독도회당은 교회 자립, 올바른 신학, 바른 성경 해석, 교정 분리의 4원칙을 지키며, 순교의 정신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전반기 기독교회는 신문화운동과 비기독교운동 등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위축되지 않았고, 교회 통합과 연합 또는 중국 토착 교회의 모색 등을 통해 성장의 역량을 이어 나갔다. ♣
♣ 사진 설명 및 출처 | 예탁성(倪柝聲, Watchman Nee) [바이두/ https://pic.rmb.bdstatic.com/bjh/news/e6ab06eee8d581ebe6712848ec4770a3.png] (2026.3.4.접속함)] ♣ 김종건 | 전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