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출판사에서 ‘근대의 갈림길’이라는 주제로 기획한 도서의 2번째 책, ‘중국’ 편입니다. 기획 강좌에는 중국 외에 한국, 일본, 동아시아가 있습니다. 필자들은 동아시아 3국이 근대로 이행한 지난 세기의 교체기에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견도 있겠지만, 통상 세 나라의 갈림길을 흔히 제국주의로 상승한 일본, 반식민지로 바뀐 중국,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으로 정리됩니다. 이 책은 중국이 중화적 세계관을 청산하고 한족 민족주의로 국가 정체성을 형성한 근대 ‘100년’이 주요 내용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50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럴 때는 사뭇 목에 힘이 들어가지요. 정말 중국의 역사가 그럴까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그대로 두고, ‘중국’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공유한 역사로 한정하자면 그 기간은 훨씬 짧아지겠지요. 이 책에서 다루는 중국의 근대는 1840년부터 1912년의 70여 년간에 불과합니다. 1910년 조선이 식민화되고,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의 반열에 올라갑니다(한일합방). 이듬해 1911년 일본은 관세자주권을 회복하면서 불평등조약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같은 해(1911)에 중국은 2천여 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건립에 성공합니다(신해혁명). 일본은 구미(歐美)에 속하지 않은 최초의 식민지 보유국,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조선은 이웃 나라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됩니다. 중국은 불평등조약의 멍에 아래 불완전한 주권 국가로 겨우 살아남습니다. 중국이 불평등조약 하에 처하게 된 것은 ‘아편전쟁’ 탓입니다. 중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국제질서는 붕괴합니다. 새로운 지역 헤게모니로 일본이 등장하고 조선이 그에 흡수됩니다.
제국의 딜레마 중국은 국민국가로 통일된 서구 열강과 마주했을 때 제국이라는 겹겹이 겹친 무거운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피아(彼我)의 경계가 모호한 제국이란 영역에는 긴밀하게 혹은 느슨하게 번부(藩部)와 조공국이 외연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연이 외세의 공격을 당해 공략당하면 제국 외연에서의 패배는 제국 내부에도 깊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청조의 힘이 약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해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강렬한 한족 민족주의를 모토로 통합성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내부 식민지나 속국을 모두 털어내고 한족만으로 무게를 가볍게 한 뒤의 새출발이었던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청조는 새로운 통합력을 창출하지 못합니다. 청불전쟁과 타이완에서 활약한 류융푸(劉永福)와 흑기군, 식민지화를 거부한 타이완 민중의 항거 등 외세에 항거하는 민중의 역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청조는 이를 흡수하고 견인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청조 지배체제의 장점이었던 다민족적, 통합적 성격은 조약체제 논리의 강화에 따라 약화하면서 변경 이민족 주민의 이탈을 초래합니다. 대체로 서구 및 일본과의 충돌에서 청조와 양무파(洋務派)의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는 정권 유지에만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비교적 서구에 깨어있던 리훙장(李鴻章)조차도 상하를 단결시킬 통합력을 창출하고 아래로부터의 역량을 기대하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입헌군주제의 시도와 혁명운동 1895년의 청일전쟁 패배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편전쟁과 연이은 패전으로 싹텄던 위기의식은 국내 내란이 진압되고 양무운동기의 정치적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약해집니다. 대내외의 위기가 완화되고 반란의 성공적 진압으로 오히려 ‘중흥’ 의식이 등장하면서 전통적 가치가 재건되고 보수주의가 등장합니다. 1870년대 대외 강경론과 명분론을 주장한 청의(淸議) 언론의 흥기는 그 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청불전쟁을 겪으면서 이러한 중흥 의식은 한번 좌절하였고, 청일전쟁으로 완전한 파탄을 맞게 됩니다. 중국은 중흥은커녕 아시아에서도 무력한 약소국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캉유웨이(康有爲)와 쑨원(孫文)이 등장합니다. 캉유웨이는 전후 여섯 차례나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립니다. 제2차 상소는 1895년에 이뤄진 공거상서(公車上書)입니다. 당시 과거 최종 시험인 회시(會試)를 보기 위해 베이징에 상경해 있던 캉유웨이는 패전과 굴욕적인 패전조약 소식을 듣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 상경해 있던 거인(擧人)들을 선동하여 600여 명의 연명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의 조인 거부와 광범위한 정치개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주전강경론자이자 주화파인 리훙장을 처벌하고 대신 장즈둥(張之洞)을 천거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 상소문은 비록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했지만, 후에 출판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공거상서는 캉유웨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청정 내에 지지 세력을 확보하여 이후 청조에 들어가 정치개혁인 무술변법을 시도할 수 있게 한 발판이 됩니다.
쑨원의 혁명관은 청조 타도를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도 타협할 수 있다는 대단히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이상론에 철저했던 캉유웨이와는 대조를 이루는 부분입니다. 쑨원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캉유웨이, 량치차오(梁啓超) 등 개혁파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고,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홍콩총독 블레이크(H. A. Blake)와 량광(兩廣)총독 리훙장의 막료를 통해 리훙장을 황제로 추대하고 량광 지역을 독립시키려는 구상을 하기도 합니다. 쑨원 주변의 특이 사항으로는 쑨원 혁명운동의 기반이 중국 사회에서 이질적 계층, 이질적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쑨원 자신도 ‘화교’라고 할 수 있었고 혁명자금을 공급하여 그를 지지해 준 것도 해외 화교 사회였습니다. 활동 공간 역시 하와이, 홍콩, 동남아시아로 봉기를 일으킨 곳은 중국의 변경인 광둥(廣東)성이었습니다. 1900년 이후 새롭게 형성되어간 국내의 혁명자원과는 연계가 없었습니다. 통합적 지도력 역시 부재했습니다. 다만 쑨원에게는 혁명파의 선구자로서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중화민국의 성립 _미완의 혁명, 미완의 자립 1911년 신해혁명은 2천 년에 걸친 황제 지배질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탄생시킵니다. 과연 신해혁명은 중국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자립’할 수 있게 했을까요? 우창(武昌) 봉기를 통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합니다. 약 270년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는 종식됩니다. 2천여 년간 지속되던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신해혁명은 형식상 공화제로의 변혁은 이뤘지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했고 근대 중국 사회에 구조적 변화를 몰고 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 내지 불철저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 70년 만에 중국은 2천 년이나 되는 역사의 무게를 내려놓고 근대국가로 자기 변신에 성공했으며, 불평등조약 체제를 당장에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독립 국가로서 식민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군벌 할거와 취약한 중앙정부를 가지고도 1910년대와 1920년대 중국은 서구와의 관계에서 관세자주권의 점차적 회복, 주권과 영토 보장 등 중요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1차 세계대전 시기 동안 ‘중국 경제의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크게 진전됩니다. 장기적으로 정치권력의 교체와 근대적 정체의 수립은 자립과 자강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습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신속하지도 않았고 때맞춰 이루어지지도 못했지만, 마지막 해내야 할 과제만은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