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운동과 기독교 비판
5·4운동의 격동을 거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고, 전통과 유학 대신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서구 문화로 새로운 중국을 지향하려는 신문화운동의 기조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 반대로 주목받았고, 특히 기독교 반대운동으로의 전개 양상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비기독교 지식인들이 특히 종교 반대, 기독교 반대의 여론을 이끌었다. 1918년 6월에 이대조(李大釗)와 이석증(李石曾), 왕광기(王光琦) 등이 조직하였던 ‘소년중국학회’는 1920년 신앙을 가진 회원들을 탈퇴시키기로 결의했다가, 3차례 토론회를 거친 뒤 이를 겨우 철회했다.
진독수(陳獨秀)는 기독교가 선양하고 있는 용서와 박애, 봉사, 희생 등의 정신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서도 기독교를 거부하는 10대 이유를 내세웠다. 주태현(周太玄)은 과학과 이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피력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유학 사상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학자들은 계급투쟁 관점에서 기독교 비판에 앞장섰다. 진독수는 기독교회가 바로 통치 계급인 동시에 제국주의가 이용하는 도구라고 지적하였다. 또 이춘번(李春藩)은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선봉이자 중국 침략의 수단이라고 했으며, 매운룡(梅電龍)은 서방 자본주의의 중국 침략 확대와 중국에서의 기독교 세력 확장의 연계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비기독교운동의 확산 1922년에는 ‘세계기독교학생동맹 제11차 대회’가 4월 4일부터 9일까지 북경 청화대학에서 개최되었다. 중국 대표 550여 명, 기타 32개국 146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를 세계에서 재건하자는 주제 아래 기독교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그리스도화할 것인가, 학생의 교회 안에서의 책임은 무엇인가 등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의 개최 사실이 미리 알려지면서, 3월 9일 상해 지역 학생들이 ‘상해 비기독교학생 선언 및 통지문’(1차)을 발표했다. 이어 북경대학 학생들은 교장 채원배와 이석증의 지도로 비기독교 대동맹을 결성하고, 3월 27일 저명인사 79명이 서명한 통지문을 공시하고 4월 1일에는 2차 통지문을 발표했다. 3월 15일에는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간행물 《선구(先驅)》에서 ‘비기독교특집’을 편성하였다.
세계기독교학생동맹 제11차 대회 개막일인 4월 4일에는 비종교대동맹이 ‘비종교대동맹헌장’을 발표했고, 4월 9일 이 대회 폐막일에는 비종교대동맹이 북경대학에서 ‘제1차 반종교대회’를 열었는데, 참석자가 1천 명을 넘었다고 보고된다. 5월에 열린 사회주의청년단의 제1회 총회에서는 반종교·반기독교를 주지로 하는 단체에 대한 지지 결의가 있었다. 이후 기독교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논조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잡지 기사가 늘어나고, 광주와 남경, 하문, 무한, 장사, 항주, 복주, 무호, 천진, 보정 등에서도 반기독교 조직이 잇따라 결성되면서 비기독교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1924년 4월 광주 트리니티(聖三一)학원이 학생운동 지도자를 제명한 일이 알려지면서 비기독교운동이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8월에는 상해 호강대학의 퇴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상해에서 ‘비기독교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지부가 안휘, 절강, 호남, 하남, 하북, 사천, 강서, 산동, 산서, 섬서, 광동, 북경 및 일본의 동경 등지에 지부가 개설되었다.
비기독교동맹은 《각오(覺悟)》, 《중국청년(中國靑年)》 등을 통해 각 지역 산하 기구가 성탄절에 반기독교 시위행진을 동시에 벌이도록 호소했고, 13개 도시에서 이에 호응하여 ‘제국주의 선봉 타도’, ‘착취 계급의 주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기독교 선전을 벌였다.
비기독교운동은 특히 기독교 학교를 반대하며 이른바 ‘교권회수운동’을 전개하였다. ‘중화교육개진회(中華敎育改進會)’는 중국 정부가 외국인에게서 교육권을 회수하고, 중국 국적이 없는 자는 중국에서 중국인에게 교육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국교육연합회는 종교와 교육의 분리, 중국 교육에 대한 외국인의 관여 배격을 주장했다.
1925년 상해의 일본계 방적공장 파업 노동자와 학생 시위대에 영국이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5·30 참안(慘案)’은 전국적인 반제운동을 일으켰고, 나아가 비기독교운동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6월에 열린 제7차 전국학생대표대회는 ‘비기독교운동’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일부 교회학교에서도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간행물과 잡지에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이 대거 발표되었으며, 반제애국운동이 더 확산하여 나갔으며, 1925년에도 성탄절에 반기독교 주간 행사를 했다.
비기독교운동의 퇴조와 새로운 국면 1926년에 북벌운동이 시작되면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군에게 중국에 있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교회와 학교와 의원 등을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북벌을 위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교회와 성직자들이 피해 보는 사안들이 일어나면서 각국 대사관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7월에 이르자 외국인 선교사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하거나 상해 등 연해 도시로 옮겼다.
무한 정부와 남경 정부는 반제국주의가 북양 군벌과 연계한 중국 이권 침탈하는 열강 침략이 반대하는 것이지 외국을 무조건 적대시하자는 게 아니며 더욱이 기독교에 반대하는 게 아님을 천명하였으며, 중국인과 외국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무력으로 침범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후 비기독교운동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비종교, 비기독교 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제국주의적 애국운동이었으며 중국 인민들의 민족의식을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기독교 토착화와 본색화(本色化)의 제창과 자립교회를 지향한 실천들은 이러한 자극에 따른 대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5·30참안기념비(五三惨案纪念碑) https://zh.wikipedia.org [2026.1.31. 접속함]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