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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3  통권 281호  필자 : 변성래  |  조회 : 1264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항미원조 _중국인들의 한국전쟁
백지운/ 창비

중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2011년 1월 19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위해 마련된 백악관 만찬회장에 ‘나의 조국(我的祖國)’이라는 노래가 중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연주로 울려 퍼졌습니다. 나의 조국은 1956년에 만들어진 중국의 혁명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곡입니다. 상감령은 한국전쟁에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북한의 김화군 오성산 남쪽의 537 및 538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격전의 현장입니다. 우리에게는 ‘저격능선 및 삼각고지 전투’로 알려진 상감령 전투는 미 8군이 마지막으로 벌인 마지막 작전 ‘쇼다운 작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3.7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산지에서 43일간 피아 10만 명이 싸워 3~4만 명의 희생을 초래한 혈투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소설 상감령이 1953년 중국 작가 루주궈(陸柱國)에 의해 쓰였습니다. 그리고 1956년에 동명의 영화가 제작됩니다. 영화 상감령은 1964년에 나온 영웅아녀(英雄兒女)와 더불어 항미원조전쟁을 그린 양대 정전(正傳, canon)으로 기억됩니다. 

나의 조국이라는 혁명가요가 비록 서정적인 선율과 애잔한 가사로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고 하지만, 젊은 연주자 랑랑은 어떻게 이 곡을 골랐을까요? 단지 연주자가 좋아하는 곡이라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선전과 선동에 능한 공산당 지도부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백악관 만찬장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데 전혀 개입을 안 했을까요?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중국의 여론장에서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항미가곡을 연주한 랑랑의 결기를 칭찬하는가 하면, 어렵게 밀월기에 들어선 미·중관계를 해치는 경솔한 행동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의 언론도 협력과 우의를 위한 자리에서 항미영화의 주제가를 연주한 젊은 중국 연주가의 도발적 행동을 꼬집었습니다. 결국 백악관 대변인까지 이 노래가 가사 없이 피아노로만 연주된 만큼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수습에 나섰습니다. 랑랑은 이 사건 이후 같은 해 1월 24일 미국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TR)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노래에 그런 정치적 배경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답합니다. 

한국전쟁의 타자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존재는 전쟁에서 행사했던 그 영향력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지워져 있다고 합니다. 운산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1950년 10월 25일부터 2년 9개월 동안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의 수는 연인원 240만을 넘었고, 최대 규모가 주둔했던 1953년 5월경에는 135만에 달했습니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중 처음 3개월을 제하면 인민군은 중공군의 향도(向導)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길 안내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한국전쟁 대부분이 사실상 중공군과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인해전술로 표현되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과 결말은 크게 차이가 났겠지요. 

역사에서 비극적 기억은 결코 합당한 절차 없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반추와 재평가를 통해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언젠간 한층 기형적인 형태로 돌아오곤 합니다. 이 책의 지은이 백지운 교수는 2018년 한반도에 돌연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출현했던 ‘중국 패싱론’이 그런 사례가 아니었을까 지적합니다. 한국전쟁은 내전인 동시에 전 세계 20여 개국이 참전한, 자칫 3차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국제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미·중 적대 구조를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형성되는 역사적 계기였습니다. 남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인력과 국력을 쏟아부은 미국과 중국 역시 한국전쟁의 주요 당사자임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전쟁의 행위자로서 중국의 역할은 뒤에서 방조한 소련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보다 더 컸습니다. 

의도된 망각과 기억의 해빙
지은이는 중국에 한국전쟁, 즉 항미원조전쟁이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은 항미원조전쟁의 기억이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중국에서 억눌려왔다는 것입니다. 70년 가까이 지속된 미·중의 적대적 공조 체제는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이 공적 공간에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한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중·소갈등 역시 항미원조전쟁이 모호한 정치적 금기가 되는 과정에 내밀하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이 두 요소가 인민공사, 대약진, 문화대혁명 그리고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굴곡과 뒤얽히면서 항미원조전쟁은 오랫동안 중국 대중들에게서 기억의 유배 상태였던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 책의 2장에서 오랜 금기와 망각의 상태에 방치되었던 항미원조전쟁이 2000년대 들어 귀환하는 그리 평탄하지 않은 과정을 2000~2010년대 작품들(도서,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살펴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이 대대적으로 소환되는 최근 몇 년의 상황은 지난 70년을 돌아보면 매우 이례적이고 또 문제가 있습니다. 수백만을 전장으로 내몰고 수십만을 희생시켰음에도 합당한 기념 공간을 갖지 못했던 이 전쟁을 미·중 대결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아 또다시 대중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꺼내 드는 상황은 중국인들에게도 비극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비록 중국인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할지라도). 항미원조전쟁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영화를 통해 중국 대중에게 귀환하는 과정은 결코 국가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분석도 이어집니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그 여정 곳곳에는 오랫동안 이 전쟁을 말하지 못하고 애도할 길이 막혔던 기층의 목소리와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중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랑랑의 연주 사건이 있고 난 뒤 약 10년이 지난 2020년 10월 한국의 BTS(방탄소년단)가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으로 중국 네티즌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던 일은 랑랑의 일화와 판연한 대비를 이룹니다. “(한·미) 두 나라가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라는 RM의 발언은 한국전쟁에서 피 흘린 중국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 네티즌들의 민족 감정을 크게 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BTS가 받은 상은 상감령 전투를 지휘했던 미 8군 총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월턴 워커(Walton Harris Walker),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에 이어 세 번째 미 8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가 바로 상감령 공격을 위한 쇼다운 작전을 계획하고 추진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상감령 전투는 낯선 이름이며 밴 플리트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젊은 세대들이 상감령 전투를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은 2020년, 어찌 보면 지극히 원론적인 수상 소감에 중국의 수많은 젊은 네티즌들이 이처럼 깊이 상처를 받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난 10여 년간 항미원조전쟁을 기억하고 감응하는 중국 대중의 정서에 무언가 거대한 변화가 생겨났으리라 짐작합니다.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 70주년을 맞은 2020년은 지난 50년간 퇴색했던 항미원조전쟁의 정치적 상징성이 전면으로 귀환한 해였습니다. 규모에서도 70주년 기념행사는 평양에서 김일성과 중국 고위급이 참석했던 1960년 항미원조전쟁 10주년 기념행사 이후 가장 컸다고 합니다. 인민대회당의 기념식에는 가슴에 훈장을 단 150명의 인민지원군 노병이 관중석 제1열 중앙에 배석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강경한 담화를 발표합니다. “어떤 국가든 군대든 (…)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침략을 확장한다면 반드시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릴 것”이라거나 “패권, 패도, 패릉(霸凌)의 길을 걷는 자에게는 (…) 필경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표현은 근래 중국의 공적 담화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거친 표현입니다. 이러한 달라진 기류에 미·중관계의 악화라는 정세적 요인이 놓여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항미원조의 귀환은 1970년대 이후 미·중 데탕트(긴장완화)를 계기로 형성된 미·중 공조 체제의 역사적 기한이 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든 정부의 전면화된 미·중 대결의 정치공간이 트럼프 정부의 무역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사라졌던 항미원조의 기억이 대대적으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세밀한 자료조사와 분석으로 중국인들의 한국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을 정리했습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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