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자립운동
1910년대 이후 여러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중국 개신교회는 성장과 발전을 이어 나갔다. 외국인 목사 수는 1915년 1,092명, 1920년 1,268명으로 소폭 늘어났으나, 중국인 목사 수는 1915년 764명에서 1920년 1,305명으로 급증하면서 외국인 목사 수보다 많아졌다.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선교에서 대학 설립이 늘어나면서 중국인 기독 지성인과 중국인 목회자가 많이 양성된 결과였다.
1910년대 중국교회에서는 외국 선교단의 지원과 보호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중국교회가 자립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운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 유형도 개별적 자립운동과 합동형 자립운동으로 크게 나뉜다.
개별적 자립운동은 1906년 상해에서 유종주(兪宗周) 목사가 주도하여 설립된 상해자립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1911년에는 중국야소자립회(中國耶蘇自立會, China Jesus Independent Church)로 확대 발전하였고, 《성보(聖報)》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중국교회 자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런 한편 외국교회와 선교단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교회의 자립을 지향하는 중화기독교자립회(中華基督敎自立會, China Christian Independent Church)도 별도로 성립되어 《중국신도》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중국교회 자립운동을 이끌었다.
1917년 바나바스 퉁(Barnabas Tung)이 남경에서 조직한 진야소교(眞耶蘇敎) 등 지역 단위로 자립운동을 전개한 사례도 여럿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자립교회는 1920년에 80여 개소이던 것이 1924년에는 330여 개소로 늘어났다고 보고된다.
합동형 자립운동으로는 1910년 천진에서 서군회(徐君匯), 장백령(張伯苓) 등이 5개 교파를 규합하여 자립교회를 조직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1918년에는 장로회 유수산(劉壽山)이 산동 연대(烟台)에서 중화기독교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이 확장되어 산동 전역을 아우르고, 직예, 산서까지 연계하여 화북중화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상해에서도 심사장(沈嗣莊), 이봉겸(李逢謙) 등이 주도하여 기독도단계(基督徒團契)를 조직하여 자립운동을 이끌었고, 그 분회가 강남 각 지역으로 잇달아 확장되었다. 이들은 행정적으로는 분리 독립을 지향하였으나 외국 선교회와의 우호 협력 관계는 유지하는 노선을 취하였다.
이러한 자립운동의 기조 아래 중국인 차원의 중국선교 지향도 나타났는데, 1918년 조직되어 월간지 《복음종(福音鐘)》을 간행하면서 중국 내 미전도 지역 선교를 주도하게 된 중화국내포도회(中國國內佈道會)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본색교회운동 1920년대 들어 중국인 사역자의 증가와 더불어 중국인이 세워서 중국인이 이끌어 가는 중국인을 위한 교회를 세워 나가려는, 이른바 본색(本色)교회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래 외국인에 의해 설립되어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끌어가던 교회와 달리 예배 형식과 교리 해석에서 중국 전통을 존중하면서 교회의 중국 토착화를 지향하고자 한 이 운동은 자립(自立)·합일(合一)·본색(本色)의 3개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1920년 초 조자신·유정방·서보겸 등 연경대학 출신 기독 지성인들은 기독교 학술단체 북경증도단(北京證道團)을 조직하고 잡지 《생명》을 발간하여 신문화운동의 연장선에서 중국 기독교의 새로운 면모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 조직은 1926년에는 잡지 《진리》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중국교회를 모색하던 젊은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과 연대하여 잡지도 《진리여생명(眞理與生命)》으로 합병하였는데, 이후 중국교회의 자유화 추구가 지나쳐 이성주의적 신앙을 향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받게 되었다.
1922년 5월 상해에서 열린 제5회 기독교전국대회부터는 그동안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 오던 것과 달리 주요 진행 내용을 중국어와 영어로 함께 발표하게 되는 변화를 보였다. 이 대회는 의장도 중국인 성정이(誠靜怡, 1981〜1932)였고, 여기서 발표된 〈교회의 선언〉 제6항에서는 중국교회의 자양(自養)·자치(自治)·자전(自傳)의 3대 목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며, 그 제7항에서는 교회의 중국 토착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본색교회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중국 기독교회의 각성 운동이었으며, 중국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동력을 이루었다. 다만 이러한 운동이 대부분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계열이 주도하였고, 복음주의적 그룹에서의 참여가 적었기에 기대만큼 큰 영향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