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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  통권 280호  필자 : 쑨양  |  조회 : 1778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150년을 넘어선 가상 대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와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


19세기 중국 선교사 중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있다. 한 명은 변발을 하고 중국인 옷을 입고 내륙 깊숙이 들어간 중국내지선교회(CIM) 설립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선교사. 다른 한 명은 청나라 관료들과 유교 경전을 논하며 개혁의 씨앗을 뿌린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 선교사. 한 사람은 “복음을 살아내는 삶의 성육신”을, 다른 사람은 “문명 속에서 진리를 설명하는 지성의 선교”를 추구했다. 그들의 방법론은 달랐지만,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두 선교사와의 가상 대담을 통해 그들의 삶과 선교 이야기 그리고 21세기 중국선교의 길을 추적해 보았다. 이 대담은 상상력, 문학적 생동감을 기반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때 그 시절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들이 널리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왜 하필 중국이었나”

■두 분 모두 19세기 중후반, 서양이 중국을 ‘야만의 땅’(?)으로 여기던 시절에 그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어떻게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허드슨 테일러: 저는 1832년, 영국 요크셔의 가난한 약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는 종종 중국 지도를 펼쳐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땅에 4억 명이 살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단다.”

17세 되던 해,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아버지 서재에서 우연히 중국선교에 관한 팸플릿을 집어 들었습니다. 순간, 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 같았죠. “네가 가라. 네가 그들에게 전하라.”

그날 밤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제가 중국어를 배우고, 의학을 공부하고, 무엇이든 준비하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6년을 준비했고, 1854년 22세의 나이로 상하이(上海)에 도착했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부드럽게 웃으며) 저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보다 13년 뒤에 태어났어요. 웨일즈 남부의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죠. 제 아버지는 석탄 광부였고, 우리 집엔 책이 거의 없었습니다. 성경 한 권이 전부였어요.

15세 때 지역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경험은 제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제가 받은 이 복음을, 아직 받지 못한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갈망이 불타올랐죠.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제 부르심은 ‘지적 갈증’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왜 중국 같은 위대한 문명이 복음을 모를까?”라는 질문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1870년, 런던에서 열린 중국선교 보고회에 참석했을 때, 한 연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중국인들은 지혜롭고 근면하지만, 그들에겐 구원의 소식이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제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즉시 선교사 지원서를 작성했고, 1875년 산둥(山東)성으로 향했습니다.

■두 분의 부르심에서 흥미로운 차이가 보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통함에서,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님은 ‘위대한 문명과 복음의 만남’이라는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셨네요.

▲허드슨 테일러: 맞습니다. 저에게 중국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의 땅’이었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저에게 중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다리는 위대한 문명’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훗날 우리의 선교 방법론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죠.

“중국은 우리를 원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두 번의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서양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을 텐데요. 선교사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요?

▲허드슨 테일러: 도착한 첫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어떤 이는 “양구이쯔(洋鬼子, 서양 악마)!”라고 소리쳤죠. 처음 몇 달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길을 걷다가 돌을 맞기도 했고, 여관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제가 묵던 여관에 폭도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서양인을 내놔라. 저놈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아편을 팔았다.” 그날 밤 저는 뒷문으로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주님, 제가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그들은 저를 침략자로 봅니다.” 바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바꿔야 한다.’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문제였던 겁니다.

▲티모시 리처드: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1876년, 산둥성 칭저우(青州)에 도착했을 때, 현지 관료가 저를 이렇게 맞이했습니다. “선교사 양반, 당신네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했는지 아시오?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고, 아편을 팔고, 우리 황제를 굴복시켰소.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네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영국이 중국에 한 일은 기독교 정신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서양 정부가 한 일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저는 정부의 사절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왔습니다. 공자께서도 ‘인(仁)’을 가르치셨죠? 예수님도 같은 걸 가르치셨습니다. 함께 이야기 나눠보지 않겠습니까?” 그 대화가 마음의 문을 열었어요. 그는 차를 내오라 했고, 우리는 밤새 유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님의 접근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저는 ‘논쟁’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855년, 과감한 결정을 했습니다. 서양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중국 전통 옷을 입었습니다. 변발을 했습니다. 서양식 칼과 포크 대신 젓가락을 사용했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은 저를 미쳤다고 했어요. “테일러, 자네는 영국 신사의 품위를 버리는 건가?” 하지만 저는 대답했어요. “저는 영국 신사가 되러 온 게 아니라, 중국인을 사랑하러 왔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압니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현지인 복장’을 입는다는 건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죠.

▲허드슨 테일러: 하지만 그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웃으며 말을 걸었습니다. “이 양반, 중국옷이 잘 어울리네!” 아이들이 제 변발을 잡아당기며 놀았고, 노인들이 “차 한잔하자”며 손짓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생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환자를 치료하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제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교의 전환점이 된, 결정적인 ‘돌파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허드슨 테일러: 1865년, 저에게 가장 큰 돌파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성공’이 아니라 ‘실패’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저는 영국에 잠시 돌아와 있었습니다. 몸도 많이 상했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죠. 브라이턴 해변을 걷다가 멈춰 섰습니다. 파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중국 내륙에는 아직도 수억 명이 복음을 듣지 못했는데,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날 밤, 저는 방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제게 24명의 헌신된 일꾼을 보내주십시오. 두 명씩 열두 성(省)에 보내겠습니다. 돈이 없어도, 후원자가 없어도, 저는 믿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동료들은 제 정신을 의심했습니다. “테일러, 24명을 어떻게 먹이고 입힐 건가? 당장 여비도 없지 않은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급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게 바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 푼의 모금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만 했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기적이 일어났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내왔고….

▲허드슨 테일러: 네, 맞습니다. 첫해에 30명이 지원했고, 10년 안에 100명이 넘는 선교사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20년 후엔 600명이, 제가 죽을 무렵엔 1천 명이 넘는 선교사가 CIM 소속으로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돌파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중국인 지도자를 세운 것’입니다. 저는 서양 선교사 중심 구조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중국인 목회자, 전도자, 교사들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넘겼습니다. 그들이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효과는 제가 전하는 것의 열 배, 백 배였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저도 같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중국인이 중국인에게 전할 때 복음이 뿌리내립니다. 제게 돌파는 1876∼1879년 산둥성 대기근 때 찾아왔습니다. 3년간 이어진 가뭄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갔습니다. 길가엔 시체가 널렸고, 사람들이 나무껍질과 흙을 먹었습니다. 저는 구호 활동에 뛰어들었어요. 서양에서 모금한 구호금을 투명하게 집행하고, 직접 난민촌을 돌며 죽 한 그릇씩을 나눠줬습니다.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산둥 지역 관료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리처드 선생,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시오? 당신 나라 사람도 아닌데.” 저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 저는 그분의 제자일 뿐입니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관료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정부는 우리를 짓밟았지만,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는구려.” 그 일 이후,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학교 설립을 요청했고, 개혁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는 서양 과학, 기술, 교육을 소개하며 동시에 복음의 정신을 심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그 접근이 바로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님의 강점이었습니다. ‘사회적 신뢰’를 쌓았고, 그 신뢰가 복음의 통로가 되었죠.

▲티모시 리처드: 저는 복음이 단지 ‘영혼 구원’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복음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새롭게 하고, 제도를 개혁하는 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1891년 ‘광학회(廣學會,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를 설립했습니다. 기독교 서적과 서양 과학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해 출판했죠. 수만 권의 책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읽혔고, 그중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적인가, 동역자인가”

■역사 기록을 보면, 두 분은 선교 방법론에서 매우 달랐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은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님의 접근을 “복음을 희석시킨다”고,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님은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의 방식을 “너무 단순하다”고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제가 우려했던 건 이겁니다. 복음을 ‘사회개혁’이나 ‘교육운동’으로 풀어내면, 복음의 핵심—죄와 구원, 회개와 믿음—이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중국인들이 서양 과학을 배우고, 학교를 세우고, 사회가 개선되는 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복음은 단순합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다.” 이 진리를 명확히 전해야 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포장하면, 사람들은 복음 대신 ‘문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티모시 리처드: 저는 당신의 우려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옳았던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중국은 달랐습니다. 중국은 단순히 ‘무지한 이교도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겐 2천 년 유교 전통이 있었고, 고도로 발달한 윤리 체계가 있었습니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이들의 가르침은 깊고 정교했죠. 그런 그들에게 “너희는 전부 틀렸고, 서양의 하나님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저는 이렇게 접근했습니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인(仁)’, ‘의(義)’, ‘예(禮)’는 하나님이 심어주신 보편적 진리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그 진리의 완전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중국 지식인들은 귀를 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그 점은 인정합니다. 당신의 접근이 문을 열었던 건 사실입니다. 특히 지식층, 관료층에게 말이죠. 하지만 제가 만난 중국인 대부분은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농부였고, 짐꾼이었고, 상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유교와 기독교의 철학적 비교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단순하고 명확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이 메시지가 그들의 삶을 바꿨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가 너무 ‘머리’에만 호소하고 ‘마음’을 놓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후회하는 게 하나 있는데요. 1900년 의화단 사건 때입니다. 저는 청나라 조정에 개혁을 촉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골의 작은 교회들, 무명의 중국인 신자들이 얼마나 큰 핍박을 받고 있었는지 충분히 돌보지 못했습니다.

■CIM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자들은 그때 가장 큰 피해를 봤죠. 189명의 선교사와 그 자녀들, 그리고 수천 명의 중국인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1900년 여름, 제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산시(山西)성에서 복음을 전하던 제 동역자들이 의화단에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여선교사들은 모욕을 당한 뒤 죽임을 당했고, 어린아이들까지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런던에서 그 소식을 들은 뒤 저는 쓰러졌습니다. 며칠을 밥도 먹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주님, 왜입니까? 그들은 당신의 이름을 전하러 갔을 뿐인데…” 하지만 더 가슴 아팠던 건, 그들과 함께 죽은 수천 명의 중국인 신자들이었습니다. 평생 농사짓고 장사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학살당했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내가 조정 개혁에만 몰두하는 동안, 이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었구나.’ 의화단 사건 이후, 저는 청나라 조정을 설득해 ‘의화단 배상금’을 교육 사업에 쓰도록 했습니다. 그 돈으로 산시(山西)대를 세웠죠.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데….

▲허드슨 테일러: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지 방법이 달랐을 뿐이죠. 오히려 의화단 사건 이후, 저는 깨달았습니다. ‘복음’과 ‘문명’, ‘영혼 구원’과 ‘사회 변화’, 이 둘은 대립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두 날개라는 것을요. 당신이 교육과 개혁으로 문을 연 곳에서, 우리의 단순한 복음 전도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운 작은 교회들이, 당신이 꿈꾸던 사회 변화의 씨앗이 되었죠.

▲티모시 리처드: 맞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다른 길을 걸었던 동역자였습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당신과 더 자주 만나 대화하고 싶습니다. 서로의 강점을 배우고, 약점을 보완하면서요.

▲허드슨 테일러: 저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지성적 접근이 없었다면, 중국 지도층은 복음을 영원히 ‘서양 미신’으로 치부했을 겁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 속 복음’이 없었다면, 복음은 지식인들의 토론 주제로만 남았을 거예요.
 
“순교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의화단 사건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1900년 여름, 중국 전역에서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들을 지키지 않으셨을까요?

▲허드슨 테일러: 그 질문에 저는 답을 찾았습니다. 68세의 나이로 의화단 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특히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에서 일어난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1900년 7월 9일, 그날 하루에만 33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 그리고 12명의 중국인 신자가 참수당했어요. 그중에는 제 친구 선교사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린 딸도 함께였죠.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엘더 부인은 딸을 품에 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일어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그때 베이징(北京)에 있었습니다.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한 55일 동안, 매일 밤하늘이 붉게 타올랐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죠. 어느 날 밤, 탈출한 한 중국인 신자가 공관으로 찾아왔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73명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의화단이 예배당에 불을 질렀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저만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울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어느 날 밤, 제 아내가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늘 말했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금이 그 믿음을 지킬 때예요.”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24절) 그 말씀을 붙잡고,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소서.”

▲티모시 리처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1901년, 의화단 사건이 진압된 후, 청나라 조정은 패전의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각국이 돈을 요구했죠. 그때 저는 영국 정부와 미국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이 돈을 복수가 아니라 화해를 위해 쓰십시오. 중국에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교육시키십시오.” 그렇게 해서 칭화(清華)대, 산시대, 그 외 수십 개의 근대식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의화단이 죽이려 했던 바로 그 ‘서양 학문’이, 중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 겁니다.

▲허드슨 테일러: 더 놀라운 일이 교회에서 일어났어요. 1900년 이전, 중국 개신교 신자는 약 10만 명이었습니다. 의화단 사건으로 그중 수천 명이 순교했죠. 모두 중국교회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10년 통계를 보면, 신자 수가 18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20년엔 40만 명이 됐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정말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했고, 수많은 중국인이 “저들이 목숨 바쳐 믿는 하나님은 진짜일 것”이라며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티모시 리처드: 산시성에서도 그 일이 두드러졌어요. 가장 큰 박해가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강한 교회가 자라났죠. 어느 중국인 목회자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의화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들이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별해줬으니까요. 순교한 형제자매들은 진짜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동시에 용기를 줍니다.”

“오늘의 중국교회에게”

■이제 시선을 현재로 돌려보겠습니다. 2025년 현재, 중국은 종교적 제약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철거되고, 교회가 감시받고, 목회자들이 구속되고 있습니다. 두 분이라면 지금의 중국교회에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허드슨 테일러: 먼저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깊이 일하십니다.” 제가 살던 19세기 중국도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관료들의 감시, 폭도들의 위협, 끊임없는 핍박… 하지만 바로 그 환경 속에서 복음이 뿌리내렸습니다.

‘가정교회’라 불리는 중국교회는 정부에 등록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현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통일전선전술로 기독교를 허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 있죠. 초대교회도 카타콤에서 예배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말이죠. 하지만 3세기 만에 로마 황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진짜 믿음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가정교회, 소그룹 모임, 그리고 조용히 신앙을 지키는 수천만 명의 신자들—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티모시 리처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받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전환할 때입니다.” 150여 년 전, 우리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은 ‘선교의 대상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중국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고난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현재 추정치로 중국 내 기독교인은 6천만 명∼1억 명에 이릅니다. 이는 영국 전체 인구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깊은 영성과 순교적 헌신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교회가 복음을 전할 차례입니다.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중앙아시아로, 실크로드를 따라 다시 복음이 흘러가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 맞습니다. 지금 수천 명의 중국인 기독교인들이 사업가로, 엔지니어로, 교사로 세계 곳곳에 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도로를 건설하고, 중동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유럽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합니다. 그들은 ‘선교사’라는 명함을 달지 않았지만, 자비량 선교사입니다.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죠. 이것이 바로 제가 19세기에 꿈꿨던 선교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만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가 자기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티모시 리처드: 중국인들은 이 일에 독특한 강점이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교회는 70년간 박해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중국 문화는 개인주의적 서양 문화와 달리, 관계와 가족을 중시합니다. 이 문화적 강점이 교회 개척에 큰 힘이 됩니다. 셋째, 실용주의가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론보다 실제를 중시합니다. 복음을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삶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중국교회는 21세기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제안하시겠습니까?

▲허드슨 테일러: 제가 제안하는 첫 번째 전략은 ‘현지화 2.0’입니다. 19세기에 제가 한 것은 ‘외형적 현지화’였습니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어를 쓰고,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21세기는 ‘디지털 현지화’가 필요합니다. 중국의 젊은 세대는 위챗(WeChat), 더우인(抖音, 중국판 틱톡) 등과 같은 플랫폼에서 살아갑니다. 복음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30분짜리 설교가 아니라, 1∼3분짜리 영상으로. 신학 논문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를 짧은 드라마로 보여주는 겁니다. 댓글로 토론하고, 공유하고, 바이럴되게 만드는 거죠.

▲티모시 리처드: 훌륭합니다. 저는 두 번째 전략으로 ‘지성적 대화의 재개’를 제안합니다. 중국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국가입니다. AI, 양자컴퓨터, 우주개발 등에서 미국에 이어 선두를 달리고 있죠. 이런 환경에서 “과학을 버리고 믿음을 택하라”는 메시지는 먹히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과학과 신앙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저라면 중국의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과 대화의 장을 만들겠습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해외에서든. “우주의 기원”, “의식의 본질”, “도덕의 근거” 같은 주제를 놓고 기독교 세계관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겁니다. 19세기에 제가 유교 지식인과 대화했듯이, 21세기엔 과학자 지식인과 대화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 세 번째 전략은 ‘소그룹 네트워크화’입니다. 중국 상황을 보면, 대형 교회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5∼10명의 소그룹은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건, 소그룹 네트워크입니다. 각 그룹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료를 공유하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훈련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의 한 소그룹에서 좋은 성경공부 자료를 만들면, 암호화된 채널을 통해 전국의 수백 개 그룹에 퍼집니다. 한 곳이 무너져도 전체는 무너지지 않는 구조죠.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였듯이, 21세기 중국교회도 ‘분산형 교회’로 가야 합니다. 아울러 중국 정부는 교회가 세력화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국적인 소그룹 네트워크에 대해선 무척 경계할 거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티모시 리처드: 네 번째는 ‘글로벌 파트너십’입니다. 19세기 선교는 ‘서양이 주고 중국이 받는’ 일방적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상호 협력적이어야 합니다. 세계교회는 신학적 깊이와 조직 운영 경험이 있습니다. 중국교회는 영적 열정과 고난 극복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 열정과 문화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교회는 빠른 성장과 토착화 경험이 있죠. 이 네 가지가 만나면 폭발적 시너지가 일어납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 디아스포라(해외 거주 중국인)가 핵심 고리가 됩니다. 전 세계에 약 5천만 명의 화교가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어와 현지어를 모두 하고, 중국 문화와 현지 문화를 모두 이해합니다. 이들을 훈련하여 ‘문화 다리’로 세우는 겁니다. 캐나다 토론토의 중국인 신자가 베이징의 가정교회와 캐나다 현지 교회를 연결합니다. 싱가포르의 화교 기업인이 푸졘(福建)성 교회와 동남아 교회를 연결하는 식이죠.

▲허드슨 테일러: 다섯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전략은 ‘역선교의 준비’입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놀라운 광경을 꿈꿔봅니다. 중국에서 출발한 복음의 물결이 서쪽으로 흐르는 모습을.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중동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서쪽(유럽, 미국)을 거쳐 동쪽(아시아)으로 왔고, 이제 다시 서쪽(중동,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순환이 완성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말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중국교회가 마지막 미전도 종족—중앙아시아 무슬림들, 중동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대위임령이 완성됩니다.

▲티모시 리처드: 중국인들이 이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첫째, 문화적 거부감이 적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를 제국주의, 이스라엘 지지와 연결합니다. 하지만 중국인은 다릅니다. 같은 아시아인이고, 서양의 식민지배를 함께 경험했죠. 둘째, 경제적 통로가 있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가 바로 옛 실크로드를 따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국 기업이 카자흐스탄에 공장을 짓고, 파키스탄에 항구를 건설하고, 이란에 도로를 뚫고 있습니다. 거기에 중국인 기독교 엔지니어, 사업가, 교사가 함께 가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고, 복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 언어와 문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를 배워야 합니다. 이슬람 문화와 역사를 이해해야 하죠. 둘째, 박해 대비 훈련도 병행해야 합니다. 중동은 세계에서 기독교 박해가 가장 심한 지역입니다. 순교 각오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셋째, 장기적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1∼2년 단기 선교가 아니라, 10년, 20년 그 땅에 뿌리 내릴 각오가 필요합니다. 넷째, 팀 사역을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위험합니다. 3∼5명의 팀이 함께 가서, 서로를 보호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티모시 리처드: 그리고 기도와 재정적 후원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서양 교회와 한국교회가 중국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재정을 지원해야 합니다. 과거엔 서양이 중국을 도왔지만, 이젠 함께 중동을 섬기는 파트너가 되는 겁니다.
 
“다시 중국을 본다면”

■이제 대담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이 다시 중국을 방문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허드슨 테일러: 가정교회의 무명 신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농촌의 작은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몰래 모여 예배드리는 그 형제자매들. 직장에서 신앙을 숨기며 조용히 빛을 발하는 그 청년들.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다 공안에 끌려간 그 부모들. 저는 그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입니다.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아도, 상을 받지 않아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눈물 한 방울, 기도 한 마디, 순종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제가 19세기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 복음을 지켜온 건 당신들입니다. 저는 씨를 뿌렸을 뿐이고, 당신들이 물을 주고 가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회 건물이 없어도, 목사가 없어도, 성경책이 압수당해도, 복음은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건물이나 책이 아니라, 당신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티모시 리처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베이징대, 칭화대, 푸단(复旦)대 대학생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중국인 엔지니어들. 예술과 문학으로 세상을 고민하는 창작자들.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의 재능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로 단지 돈을 벌고 성공하는 데 그치지 마십시오.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세우고, 아름다움을 창조하십시오.” “복음은 당신의 지성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완성합니다. 과학과 신앙은 적이 아닙니다. 둘 다 진리를 추구하는 다른 길일 뿐입니다. 당신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하겠습니다. “당신은 중국의 미래이고, 동시에 세계선교의 미래입니다. 중국이 1세기 동안 (복음을) 받기만 했다면, 이제는 나눌 때입니다. 아프리카의 가난, 중동의 전쟁, 서양의 영적 공허함—당신의 세대가 이 문제들에 답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듣다 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선교 역사에서 후회하거나 다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허드슨 테일러: 저는 중국인 동역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더 빨리 넘겨야 했습니다. 188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인 지도자를 세웠는데, 1860년대부터 해야 했습니다. 제 안에 무의식적인 ‘서양 우월주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중국인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좀 더 훈련이 필요해.” 이런 생각 말이죠. 하지만 성령님은 국적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제가 10년 훈련받은 것보다, 하나님이 1년 만에 중국인 형제를 더 크게 쓰시는 걸 수없이 봤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는 제 가족, 특히 제 아내와 자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첫 번째 아내 마리아는 33세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양저우에서요. 제 딸 그레이스는 8살에, 아들 새뮤얼은 3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주님의 일”이라고 말했지만, 때로는 제 야망과 열정이 가족보다 앞섰던 것 같습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선교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더 중요해. 우리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습니다.” 선교는 ‘불타는 헌신’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지속 가능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을 불태워 없애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타오르는 불이어야 하죠.

▲티모시 리처드: 저도 비슷한 후회가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사상의 전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람의 마음’을 놓쳤습니다. 청나라 고위 관료들, 개혁파 지식인들과 대화하는 데 시간을 쏟다 보니, 길거리의 거지, 병든 노인, 버려진 아이들을 지나쳤던 적이 많습니다. 어느 날, 한 중국인 목회자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중국의 ‘머리’를 바꾸려 하지만, 예수님은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철학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논리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죠.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대학 강단과 출판사 사무실에서 나와, 더 자주 난민촌과 나환자촌으로 갔을 겁니다. 그곳에서 손을 씻어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함께 울었을 겁니다.

■두 분의 솔직함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대담을 읽는 21세기 독자들—목회자든, 선교사든, 평신도든—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다면?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을 신뢰하고 움직이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시작하지 못합니다. 준비가 안 됐어도, 돈이 없어도, 능력이 부족해도—하나님이 부르셨다면 나아가십시오. 그분이 책임지십니다.” 이 고백이 제 평생을 관통한 신념입니다. 

▲티모시 리처드: “복음을 담을 그릇을 계속 넓히십시오. 교회 건물이라는 그릇, 주일예배라는 그릇, 목회자라는 그릇—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술과 과학, 비즈니스와 교육, 정치와 기술—모든 영역이 복음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 가십시오.” 저는 이것을 ‘세속화(secularization)’라 부르지 않습니다. ‘세속의 성화(sanctification of the secular)’, 즉 ‘세속의 거룩화’라 부릅니다. ♣







 ♣ 사진 |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일러스트입니다.
 ♣ 쑨양 | 중국인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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