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이하 ‘문혁’)과 관련된 도서를 소개했었는데, 국내 저자(사회학자)가 다소 다른 시각으로 기록한 책이 있기에 정리해 봤습니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 20세기 중국의 모든 모순은 문혁 시기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모든 ‘모순’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머뭅니다. 문혁(1966~1976년)은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중국 내에서도 문혁을 되돌아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저자는 문혁을 좀 더 넓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회주의 시기의 국가·당·대중의 모순이라는 문제의 복판에서 문혁을 다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내에서 문혁에 관한 연구가 다시 관심을 얻고 있는 것은 중국의 사회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사회 양극화·실업 문제·국유기업 구조 조정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사회적 갈등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사회 문제에 대한 불만들이나 그로부터 촉발된 집단적 행동 또한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런 사회적 불만 표출 과정에서 과거 문혁의 경험이 심심치 않게 새로운 형태로 해석되어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형태는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마오쩌둥(이하 마오)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좋았던 과거를 추앙하면서 현재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편, 그 속에서 문혁 시기의 담론을 재동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문혁 시기에 작동하던 조반파의 조직적 연계망을 부분적으로 되살려 저항을 조직하는 경우조차 발견되기도 합니다. 17년 옥살이하고 나온 충칭 지역의 조반파 영수들은 ‘매국노를 타도하자’라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문혁 시절을 풍미하던 ‘모든 반역은 정당하다’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구호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오의 유령과 더불어 되살아나 다시 중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981년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해 문혁 시기와 이 시기 마오의 오류에 대한 공식적 정리를 마치고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해 온 중국 정부로서는 문혁 유령에 대한 푸닥거리는 끝났고, 그 과거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싶겠지만, 정부의 일방적 해석과 역사 결의만으로는 문혁에 붙어 있던 기억과 유령들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겠지요. 문혁에 대한 기억은 그 시절을 호흡했던 중국 인민들의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혁이 비극적 경험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비극은 삶의 조건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므로 지금 처해 있는 각기의 삶의 조건에 따라 그 비극을 해석하는 현재의 방식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권력투쟁설 문혁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제기되는 해석은 ‘권력투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필자가 읽었던 여러 문혁에 대한 도서들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것이 ‘권력투쟁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권력투쟁설은 그 이해 방식에 따라서 다시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과 더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당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당주석 마오가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해서 대중을 선동한 것으로 문혁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대약진의 실패를 책임지고 정치 실권을 국가주석 류사오치에게 넘긴 마오는 베이징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그 영향력은 계속 약화하고 있었습니다. 마오의 말처럼, 수도 베이징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런 상황을 당내의 정상적 통로를 통해 뒤집을 수 없던 마오가 비정상적으로 대중을 부추겨 집권파를 제거하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마오식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각으로 마오는 이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이후 권력투쟁은 참가자를 바꾸어 다시 린뱌오와 4인방 사이에서 재개됩니다. 린뱌오 실각 이후에도 마오의 사망과 그 이후까지 지속된다는 것이 이 접근법(좁은 의미)에서 해석하는 문혁의 과정입니다.
더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이런 투쟁의 배경에 ‘두 가지 노선’의 대립을 놓습니다. 권력투쟁의 권력을 둘러싼 개인적 욕망의 차원을 넘어서는 노선 대립의 차원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초점은 마오의 행동에 맞춰집니다. 마오가 대중을 개입시켜 이런 노선투쟁의 대립을 확대해서 정적을 제거하며 권력을 재장악하려 한 과정으로 문혁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과 기본적으로 같은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두 가지 권력투쟁설 모두 그 분석의 시야를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 내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 전체를 마오가 주도해 간 계획된 과정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문화대혁명이 남긴 것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비롯한 많은 책을 저술한 저명한 미국의 ‘중국사학자’인 모리스 마이스너는 문혁이 역설로 끝났음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첫째, 문혁은 반관료제운동이 가장 관료적 국가기구인 인민해방군의 손아래 들어감으로써 끝났다. 둘째, 문혁은 당에 대한 대중의 공격에서 출발했으나 당을 강화하는 것으로 끝났고, 당 기구 통제를 둘러싼 당 지도부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되었다. 셋째, 도시 노동자계급은 1927년 이후 최초로 활성화되어 운동 초기 단계에 진정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문혁이 끝나기 전에 사실상 조직이 와해하였고, 노동자운동이 다시 억압되었다로 정리합니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지적이 예리합니다. 아울러 1990년대 ‘신좌파’의 대표 인물인 왕후이는 문혁은 ‘반근대성의 근대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견해도 덧붙입니다.
문혁 기간 중 많은 대립 구도가 형성되면서 무장 충돌이 발생했고, 기존의 것들에 대한 수많은 공격과 파괴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작 제도적으로 무엇을 남겼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옛것을 부수고 그 자리에 무엇으로 채웠는지 그 형태가 불분명합니다. 문혁 기간 중 폐기 처분되었던 것들이 다시 기존의 제도적 틀 속으로 다시 흡수됩니다. 문혁 이후 중국 사회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절충적인 타협이 단위 체계라는 형태로 남아 독특한 의존관계를 형성되었지만, 그 또한 개혁개방과 더불어 서서히 해체되어 갑니다. “사람들에게 문화대혁명은 트라우마로 남았고, 문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가 되었으며, 이 이후 나타난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어떠한 대응들도 문혁을 연상하게 하는 방식이 되면, 더 이상 그것을 해결책으로 간주할 수 없는 자기 검열이 작동하곤 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 사망 시기의 4·5 천안문 사건이나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은 그것이 문혁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억압되어 끝나버립니다. 그 후 중국의 공식 역사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잃어버린 10년, 대란의 시기로 규정하게 됩니다. 아마도 중국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겠지요. 그러나 덮는다고 그저 덮어지지 않는 것이 과거입니다. 모든 문제가 정리되고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문혁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쉽게 잊히지도, 정리되지도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혁의 유령이 현대 중국 사회 속을 떠돌고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가 지나칠까요?
이 책의 저자는 문혁 시기에 등장한 대중의 조직적 저항이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왔음을 주목합니다. 1976년 4·5 천안문 사태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계속되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1989년 6·4 천안문 사태는 문혁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다 보니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군대를 동원해서 강경하게 대응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문혁 저항의 그림자는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기억 속, 또는 사라지지 않은 과거 조반파 조직의 잔존 속에서 관찰됩니다. 개혁개방이 노동자들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주인공’ 위치에서 매우 멀리 밀어놓았을 때, 그리고 삶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을 때 예상치 않은 곳에서 형성되는 대립과 저항 속에서 문화대혁명의 그림자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특권층과 관료들에 맞선 싸움이 벌어지게 될 때, 그 담론은 결코 문혁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