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25년 10월 14일 기록 정리 | <차이나에이드>
시온(시안·錫安)교회는 2017년 진밍르(金明日) 목사가 베이징(北京)에서 설립했지만, 2018년 9월 9일에 폐쇄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시온교회는 총력을 기울여 40개 도시에 100개의 교회를 세웠다. 2025년 10월 9일부터 3일간 22명의 목회자와 동역자들이 연행됐다.
2025년 10월 14일, 미국의 장보리(張伯笠) 목사가 진밍르 목사의 아내인 류안나(劉安娜) 사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영상: 美国张伯笠牧师对金明日牧师的妻子刘安娜师母进行了访谈)
장: 장보리 목사 류: 류안나 사모
■ 폭풍전야의 예감
장: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진밍르 목사님께 어떤 예감이 있으셨을까요? 류: 네, 두 가지 징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6개월 전에 진 목사님이 저에게 중국 동북 지역의 어느 현급(縣級) 도시에 있는 한 회사에서 발송한 공문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공문에는 진밍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명확히 언급하고 있었고, 직원들에게 그와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으로, 일종의 ‘정죄식(定罪式)’ 어투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번째는, 진 목사님은 2018년부터 5년 동안 국경 통제를 받아왔어요. 원래 2024년 4월에 (통제가) 종료되는 거였는데, 진 목사님이 4월 24일 베트남 국경에 갔을 때 다시 연장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교회의 기복(起伏)과 변화
장: 목사님과 사모님은 7년이나 헤어져 계시잖아요. 목사님은 과거에 10년짜리 비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으시나요? 인터넷으로 하시나요? 류: 중국이 왓츠앱(WhatSapp)이나 시그널(Singnal) 같은 메신저 앱을 차단하고 있어서, 저희는 자체적으로 앱을 개발해서 네다섯 개의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거의 모두 폐쇄됐어요.
장: 시온교회는 언제 전면 폐쇄되었나요? 류: 2018년 9월 9일 이후 시온교회는 더 이상 모임장소를 임대할 수 없게 되어 본격적으로 ‘이동(流動)’ 모임을 하는 때였지요. 우리는 ‘걷는 예배자(行走的敬拜者)'가 되어 미리 예배 내용을 녹음하고, 모두 공원에서 이어폰을 끼고 돌아다니며, 사십 분 동안 ‘걷는 예배’에 참여합니다. 이후 모두 같이 차를 마시고 감사를 나누며, 한동안은 잘 견뎠습니다.
장: 이런 방식은 정말 색다른 방법이었네요. 나중에 줌(Zoom)을 사용해 보셨나요? 류: 네, 특히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기술팀을 구성하고 온라인 모임을 시작했고, 월요일 연합 기도회도 진행했어요. 이 과정은 성도들과 연결에 매우 중요합니다.
■ 베이징에서 출발한 선교 여정
장: 나중에 진 목사님은 베이하이(北海)로 갔는데, 자발적으로 베이징을 떠난 건가요? 류: 네, 2019년 이후 베이징의 환경이 나빠졌는데, 어쨌든 그는 혼자가 되어 어디를 가든 자유롭고, 걸리는 게 없었죠. 그는 적극적으로 사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2022년 여름 광시(廣西) 베이하이에 정착했습니다. 이전에 그는 광저우(廣州), 선전(深圳) 그리고 주하이(珠海)에서 소그룹 모임과 교회를 세웠으며, 유연하고 민첩하게 지역에 상주하는 목회자를 찾아 ‘지역화 목양’을 진행했습니다. 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주장(珠江) 삼각주에 영성이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왕린(王林) 목사는 상하이(上海)로 갔습니다.
■ 진 목사님과 만남 그리고 신앙의 여정
장: 사모님은 진 목사님과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류: 우리는 고등학교 때 헤이룽장(黑龍江)에서 알게 됐어요. 그는 ‘일시적인 학생(借讀生: 거주지에 호적이 없는 초중고생이 거주지 소재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저는 학생회 문예위원이었고, 그는 회장이었죠. 그때부터 친구로 지낸 저희는 둘 다 1세대 기독교인데, 1989년 톈안먼(天安門) 6·4 사건 이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장: 그때 신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류: 그때의 우리는 당과 국가를 열렬히 사랑해야 하는 시대 속에서 성장했어요. 1989년 6·4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우리는 공산당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부패를 척결하고 더 좋아지기를 바랐어요. 우리는 아무런 종교적 배경도 없이 붉은 깃발 아래에서 자란 첫 번째 세대의 청년들입니다. 나중에 베이징대학에 입학한 뒤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1986년의 학생운동은 우리 세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래 우리가 받은 교육은 거의 모두 주입식이었지만 대학에 들어오면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떤 제도가 중국에 가장 적합한지를 찾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진 목사님과 저는 조선족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열망과 꿈을 갖고 있었죠. 6·4 사건은 우리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심리학을 공부했지만, 그 경험은 저에게 상처가 되어 오랫동안 톈안먼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회피하게 되었어요. 그 꿈의 깨어짐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 목사님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자매님이 계셨어요. 그녀는 우리 소수민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역시 조선족입니다. 당시 베이징에는 조선족이 드물었어요.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조선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너무 흥분해서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습니다. 그 자매님은 진 목사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6·4 사건 당시 그의 안전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그 자매님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투병 중에도 내내 목사님을 기억하며 기도해 주셨어요. 자매님의 신앙과 사랑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때 자매님의 장례식에서 진 목사님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우리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진 목사님이 저보다 한발 앞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도 바로 그때였어요. 진 목사님은 저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특히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간 것은 ‘그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의 허점을 찾아 그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 전임 사역과 삼자애국교회(三自愛國教會) 진입의 어려움
장: 6·4 사건, 그 세대의 많은 사람이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외상 증후군을 겪고 있습니다. 일찍이 투옥되어 가족과 헤어졌던 우리는 더 큰 대가를 치렀지만, 이들 세대는 앞으로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지역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류: 6·4 사건 이전에는 강와시교회(缸瓦市堂)에 가는 사람이 한두 명에 불과했지만 점차 50〜6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뒤에 그들 대부분은 목사가 되었지요. 진톈밍(金天明) 목사도, 리성펑(李聖風) 목사도 강와시 출신입니다.
장: 그때 결혼하셨나요? 류: 아직이요, 예수 믿고 생계도 꾸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어요. 물론 부모님은 동의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이유로 외국 기업에서 2년 동안 일했습니다. 당시 중국과 한국은 수교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취업 기회가 많았어요. 저희는 1992년 1월에 결혼했고, 5월에 남편은 신학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장: 그럼, 당시 반응은 어땠나요? 류: 우리 집은 조선족 가정이었고, 분위기가 꾀나 개방적이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어떤 자원이나 권리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사고방식이 매우 개방적이셨고, 저 또한 인생은 각자의 것이니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 목사의 선택에 저도 간섭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때 사실 ‘목사’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으면 한번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하다가 만약에 맞지 않다면 빨리 돌이켜도 된다고 했습니다.
장: 당시에는 목사가 되면 감옥에 갈 위험이 있다는 거 모르셨죠? 류: 전혀 몰랐어요. 결혼하고 나서야 목사의 아내로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더욱이 ‘사모’라는 역할에 대해 사람들은 큰 기대를 하지만,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 못했어요. 사실 그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있었죠.
장: 제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누가 ‘사모님’이라고 불렀을 때 아내는 그들이 자기를 부르는 줄도 몰랐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사역을 하시나요? 류: 저희는 한국교회에 다니는데, 한국교회 사모님들은 실제로 매우 힘듭니다.
장: 제가 진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풀러신학교(Fuller)에 다닐 때입니다. 한번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북부 캘리포니아로 함께 차를 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베이징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류: 저희 세대 대부분의 조선족은 6·4 사건 이후 하나님을 믿게 되었어요. 진 목사님은 그 자매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 뒤에 우리는 강와시교회와 연락이 닿았고, 전도사의 길을 가려면 충원먼(崇文門)에서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자교회’ 내부에서는 그에게 줄곧 의문을 제기해 왔는데, 신학교에 그와 같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베이징대학교 지구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외국 선교사로 훈련받은 그가 도대체 무슨 ‘저의’로 삼자교회에 참여하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진 목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 그곳에서 섬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삼자신학교로 인도하셨고, 그곳에서 10년 동안 충실히 섬겼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따돌림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2002년,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일종의 휴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종교국은 그를 조선어를 사용하는 교회로 파송했지만 그곳은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곳이었고, 그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많은 헌신을 하고 싶었지만, 항상 누군가 뒤에서 그를 막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듯 권력 문화가 매우 강했습니다.
장: 네, 그는 중국교회의 내부 생태계를 잘 몰라서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그 같은 배경의 사람들을 특별히 경계합니다.
■ 미국 훈련과 선교를 위한 귀국
류: 그 후 그는 출국하기로 결정했지만, 삼자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습니다. 베이징대학 졸업 후 그에 관한 자료는 삼자의 통제 밖에 있었고, ‘(중국) 국제인재교류센터(國際人才交流中心)’에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삼자도 관여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권은 국제인재교류센터가 해결했으며, 비자는 더더욱 삼자의 수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월에 출국하여 5월에 비자를 받았고, 그 기간에 두 가지 일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장: 진 목사님은 미국에서 화인(華人)교회를 섬기셨나요? 류: 당시 저희는 주로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한국인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조선족 목사로 중국어를 잘하지만 한국어로 사역하는 것에 더 익숙해 있었습니다. 저희는 교회 일도 하면서 선교단체 일도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장: 졸업 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도시 가정교회에 참여했는데, 교회의 초기 상황은 어땠나요? 류: 진 목사님이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삼자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그는 삼자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였는데, 삼자에 참여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참여하더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참여하지 않는 대가를 기꺼이 감수하기 원했습니다.
장: 설립 당시 등록이 되어 있었나요? 류: (중국) 정부의 등록 요구는 명목상이고, 서우왕(守望)교회는 등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합법’적인 사역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진 목사님도 한번 해 보라고 했어요. 사실, 자격이 있다고 해서 등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가정교회가 등록되지 않으면 삼자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2007년부터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사모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진 목사님이 신학교 교수가 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어떤 신도가 우리를 찾아와 “기도합시다”라고 말했고, 우리는 3월부터 이 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5월이 되자 모임이 점차 구체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족이 주를 이루었으나, 나중에는 중국어 교회로 확장되어 이중 언어 모임이 되었습니다.
■ 도시교회에서 온라인 모임까지
장: 당신들은 ‘도시 가정교회’를 대표하는데, (중국) 정부는 진작에 관심이 있었나요? 류: (중국) 정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의 결속에 대해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새로운 네트워크 관리조례(管理條例)에 따라 곧 탄압이 강화될 것임을 알아챘습니다.
장: 이른비언약(秋雨)교회, 서우왕교회, 진덩타이(金燈台)교회가 모두 탄압받았는데, 왜 이른비언약교회의 왕(王) 목사님은 그때 선고를 받았는데, 진 목사님은 왜 선고를 받지 않았을까요? 이번 사태는 전면적인 정리인 것 같습니다. 류: 시온교회는 사실 2018년부터 표적이 되어 왔습니다. 진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항상 온화하고 소통하려는 자세로 (중국) 정부를 대했지만 결과는 같았었습니다.
■ 갑작스러운 체포
장: 어떻게 체포됐나요? 경찰이 사모님의 어머니 앞에서 그를 데리고 갔나요? 류: 식사를 마치고 있는데, 십여 명의 사람이 느닷없이 침입해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모두 가지고 갔고, 서재와 집 전체를 봉쇄했습니다. 여든이 가까운 저의 어머니께서 크게 놀라셨습니다. 우리 사위는 너무 착해서 남에게 얼굴을 붉힌 적도 없고, 험담도 하지 않으며, 그저 복음만 전했다고 호소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진 목사 자신도 예상했던 일이라고 얘기하며, 만약에 어머니께서 앓아 누우시면 우리는 더 걱정이 되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진 목사님은 현재 ‘온라인 정보 불법사용 혐의’ 혐의로 베이하이 제2구치소에 수감돼 있습니다.
장: 따님은 알고 있나요? 류: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 딸 그레이스는 현재 미국 상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AP, BBC, 독일 신문 등 국제 언론들이 이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있고, 미국 루비오 국무장관도 중국 정부에 그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 핍박에 직면한 증인
장: 사모님은 심리학을 전공하셨는데,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시나요? 류: 저는 마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고, 신앙에 기반한 방식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변화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증인 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니까요.
■ 결론: 중국교회와 함께 일어서다
장: 우리는 사모님이 큰 압박을 받고 계시고, 노모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모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류: 여러분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연합기도회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이 성숙하고 견고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시온교회 한 교회의 일이 아니라, 중국교회 전체의 영적 부흥과 전쟁입니다. ♣
♣사진 설명 | 장보리(張伯笠) 목사(왼쪽)진밍르(金明日) 목사의 아내인 류안나(劉安娜) 사모 ♣출처 (사진 포함) | <차이나에이드> (2025/10/14) ♣번역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