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과 기독교 1911년 국민당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1912년 전제 왕조 청조가 막을 내림과 더불어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 여건은 급변하게 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약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를 규정했는데, 종교와 신앙의 문제도 조항에 포함되었다. 1912년 3월 11일 중화민국 참의원이 반포한 〈임시약법〉 제5조에서는 “중화민국 인민은 모두 평등하며, 종족, 계급, 종교에 따라 구별을 두지 않는다.” 제6조에서는 “인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함으로써 법률상 중국 국민 전체의 개인적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손문(孫文, 쑨원)은 서양의 정교분리라는 진보적 원칙을 중국에서도 실현하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중화민국 초기 종교에 대한 관용적 정책은 견실한 자산계급 정치가이며 경건한 기독교도였던 손문의 지도력과 유관한 것이었다. 아울러 중화민국 정부 인사 가운데 농림총장 진진선(陳振先), 참정원 차장 왕정정(王正廷), 정사당(政事堂) 참의장 임장민(林長民), 해군차장 이화(李和), 주독공사(駐獨公使) 안혜경(顔惠慶) 등이 기독교인이었음과 의회에 기독교인이 60여 명이나 되었던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복고주의와 기독교 국민당은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지만 1912년 3월 보수 군벌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차지하고 이후 국민당을 탄압하면서 중국 전반에 보수화와 복고주의가 급속히 확산하였다. 1912년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등은 가장 먼저 상해에 공자를 신성시하는 공교회(孔敎會)를 성립시키고, 이를 국교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1915년에는 원세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일련의 절차를 밟다가 세상을 떠난 후 강유위 등은 새로 총통직을 맡은 여원홍에게 공교(孔敎) 국교화를 청원하였다.
이에 대해 진보적 지식인들과 기독교회에서는 강렬한 반대운동을 벌여 나갔다. 개신교계의 서겸(徐謙), 성정이(誠靜怡) 등은 ‘신교자유회’를 조직하여, 헌법에 명시된 신앙 자유의 조문이 유지되어야 할 것을 호소했다. 천주교계에서 조직된 중화공교진행회(中華公敎進行會)도 이러한 복고적인 공교(孔敎)운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기조를 천명했다. 1916년 2월 국회는 공교(孔敎) 국교화안은 표결에 부쳐졌지만 부결되었고, 〈임시약법〉에 명시된 종교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 관련 조항은 유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에 유럽 열강 각국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중국으로 파송하는 선교사와 선교비가 줄어드는 등 영향력이 크게 미쳤다. 그런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가운데 나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본국으로 귀환하는 숫자도 늘어났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컸던 프랑스와 벨기에 선교사들이 대거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1916년 중국에 남아 있던 프랑스 선교사는 208명으로 줄어들었다. 유럽으로부터 중국으로 보내는 선교 자금도 대폭 줄어들었고, 세계적 물가 폭등과 화폐 가치의 급변으로 중국선교 여건은 열악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산동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독일 성언회 선교사들은 일본군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산동으로 진주한 뒤 모두 체포되어 갇히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산동의 독일 성언회 선교사 12명,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3명과 복건의 독일 국적의 도미니크회 선교사 3명 등은 모두 패전국의 외국인으로 간주해 잇달아 본국으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런 한편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 전쟁 특수로 경제적 호황을 맞은 미국에서는 중국선교에 역량을 변함없이 경주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각 개신교단의 후원을 배경으로 중국 개신교회의 발전은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1913년 선교사 5,394명, 신자 수 245,957명이던 것이 다음 해인 1914년에는 170개 교단, 선교사 5,978명, 신자 수 253,210명으로 늘어났고, 10년 뒤에는 선교사가 7,663명으로 늘어나고, 신자 수는 536,597명으로 배가되었다.
개신교회의 교육 선교는 더 발전하였는데, 1917년 선교 보고에 따르면 전국에 신학교와 성경학교 64개소(남학교 48, 여학교 16), 교원 361명, 학생 1,861명으로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그중 기독교 대학이 16개교나 되었는데, 미국 장로회 등 각 선교회가 연합하여 1916년에 설립한 북경대학(1916년 연경대학으로 개명)이 그 대표적인 명문이다.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의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에서는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세계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북양군벌 정권이 일본에 넘겨준 ‘21개조 요구’가 알려지면서 반제국주의 반봉건 군벌을 외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제국주의 반대와 애국주의가 중국 전역을 휩쓸면서, 전통과 유교 대신 서구로부터 ‘민주’와 ‘과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는 열기가 일어나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비기독교인들은 대체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고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였고, 비종교(非宗敎)· 비기독교(非基督敎) 사회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유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찾게 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울거나 기독교에서 대안을 찾거나 하는 다양한 지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 중국교회는 본격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었고, 토착화, 즉 본색화(本色化) 등 선교 전략에서의 변화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