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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3  통권 277호  필자 : 변성래  |  조회 : 1458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중국인 이야기》(8)
_김명호 / 한길사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6·25)을 중국인들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매해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지냅니다. 미국에 대항하는 혈맹, 북한(朝鮮)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출전을 자원한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6·25 때 중공군에 대한 필자의 이미지는 ‘인해전술’과 ‘1·4 후퇴’ 두 단어 외엔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세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 앞에서 목에 힘을 줍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미제를 물리쳐서 현재의 한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 중 기억나는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한 역사학자가 중국을 여행하던 중 한 노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노인(중국인)은 상대방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찻장 깊숙이 보물처럼 숨겨 놓은 군용 스테인리스 컵을 들고나왔다고 합니다. 컵 표면에는 ‘抗美援朝’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역사학자는 당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랑처럼 들고 왔으니, 마음이 복잡해질 만합니다. 그 노인이 학자에게 다녀올 데 있으면 다녀와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초대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 책 《중국인 이야기》(8)은 항미원조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주일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한국군이 외출, 외박을 나갔다고 합니다. 소련제 탱크가 38선을 무너뜨렸습니다. 한국군들 중 탱크를 직접 처음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튿날 미국이 참전을 선포합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명령으로 미국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했습니다(한국전쟁과 무관하게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접수하기 위해 무력 행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정보부가 간파한 듯합니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도 인도차이나 전쟁에 투입됩니다. 신중국은 미군이 중국을 포위했다며 발끈합니다. 외교부장을 겸하던 정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성명을 냅니다. “미국이 무슨 행동을 하건, 대만이 중국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 7함대의 중국 영토 침범은 유엔헌장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대만은 한국전쟁 덕분에 위기를 넘긴 듯합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합니다. 같은 해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도강합니다. 북한의 장진호 지역은 그해 겨울 미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무덤이 됩니다. 이 전투에서 진정한 승자는 동장군(冬將軍)으로 기록됩니다. 그만큼 혹독한 추위였다고 합니다. 50년 이래 최대의 혹한이었다고 합니다. 영하 30도는 기본이고 40도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핑계를 명분으로 포장할 줄 아는 동물입니다. 남에게 죄를 덮어씌울 줄도 압니다. 6·25 전쟁도 양측 모두 명분이 그랬습니다. 먼저 밀고 내려온 북쪽은 조국 해방전쟁을 주장합니다. 유엔군과 함께 반격에 나선 남쪽은 북진통일을 소리 높여 외칩니다. 최근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조차도 여전히 미군을 등에 업고 남한이 북한을 침공한 북침이라고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항미원조를 계기로 중국군은 현대화 과정을 밟습니다. 징병제와 계급제도를 실시하게 됩니다(항미원조 지원군의 원조는 ‘중국 홍군’입니다. 홍군은 폭동으로 태동한 무장세력입니다. 비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정규군에게 쫓겨 다니는 동안 세력을 키웠습니다. 지휘관은 있어도 계급은 물론 통일된 군복도 없었습니다).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
1983년 5월 5일, 납치당한 중국민항 296호가 춘천 미군 공항에 불시착합니다. 이 사건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한·중 수교의 밑거름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치안을 바로잡는 예당(嚴打, 범죄에 대한 엄중 단속)의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민항기 납치의 주범 줘창린(卓長仁)은 18세 때 홍위병 완장을 차기도 했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사무직으로 전직합니다. 자리에 앉고 보니 꿀단지였습니다. 랴오닝(遼寧)성의 차량 구매와 분배의 대권을 장악하는 요직이었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차량을 배당받으려면 ‘자동차 대왕’ 줘창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뒷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다 보니 결국 들통이 나서 ‘경제사범’ 요주의 인물이 됩니다. 감옥에 끌려가기 전에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정부(情婦)인 선양(瀋陽)군구 부참모장의 딸 가오둥핑(高東萍)과 평소 줘창린을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4명이 동조합니다. 선양체육학원 보위과에 근무하는 행실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장 공안국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습니다. 6명은 준비를 철저히 합니다. 1년간 대만 방송을 열심히 듣고 항공 노선을 세밀히 연구합니다. 항공기에 관한 지식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뒷거래를 통해 얻은 실탄으로 여러 차례 사격 연습도 했습니다. 권총 4정도 확보합니다. 

그들 6명은 1983년 5월 5일, 선양 공항에서 상하이행 중국민항 296호에 오릅니다. 항공기에는 승객 96명과 승무원 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승객 중 3명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좌석을 둘러본 승무원이 이들 6명이 수상하다고 기장에게 보고합니다. 기장은 그들을 계속 주시하고 자신의 허락 없이는 조종석 문을 열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잠시 후 총성이 울렸습니다. 밖에서 조종석 문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결국 조종석 문이 열리고 기장 머리에 총구가 닿습니다. 남조선으로 향하라고 지시합니다. 항공 지식이 풍부한 줘창린은 기장이 안전한 곳으로 착륙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철저히 막습니다. 일차 단둥(丹東) 착륙과 이차 평양 상공에서 한청(漢城, 서울)이라고 속이고 착륙을 시도했지만, 줘창린이 눈치를 채고 목에 총구를 들이댑니다. 기장은 결국 승객의 안전을 위해 오후 2시 군사분계선을 넘습니다. 

납치당한 중국 민항기의 춘천 불시착은 한·중 관계가 미묘할 때 발생합니다. 신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부터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그 결과가 중공의 한국전쟁 참여로 이어집니다). 신중국은 한국과는 선을 그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는 확인된 바가 없지만, 중국은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한국의 경제, 사회 발전 속도가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게 빠른 점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한국을 향해 걸어뒀던 빗장을 다소나마 풀기 시작한 때라고 합니다. 민항기 납치 사건 이후 중국 정부는 발 빠르게 대응합니다. 일본인 탑승객이 3명이 있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일본과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직접 한국과 담판을 짓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대만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대만은 “반공의사(義士) 6명이 자유를 찾아 대만으로 향하던 중, 한국 춘천의 미군 공항에 착륙했다. 자유세계로 오기를 갈망하는 반공 의사와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교부와 국방부가 특사를 파견할 예정이다.”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일본 자국의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겠다고 발표합니다. 결국 중국 외무부와 한국의 외교부 고위급 회담이 진행됩니다. 한국은 급할 것이 없었지만, 중국은 한시가 아깝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의 승무원들과 승객들에 대한 관리에 소홀함이 없었던 듯합니다. 중국 고위층의 발언입니다. “한국 측의 배려가 기대 이상이다.” 중국에서 한국에 온 담판단은 예상외의 대우를 받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한국 상공에 들어서자, 전투기 두 대가 에스코트했습니다. 담판단의 최고 실무자는 외교 정상급에만 깔아줄 만한 붉은 카펫을 통해 귀빈실로 안내됩니다. 한국 측에서는 공로명(孔魯明) 외무부 차관보가 협상대표단 단장을 맡습니다. 

협상은 납치범 인도와 국호 사용 외에는 순조로웠습니다. 협상 막판에 중국이 다음의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협의(agreement)’라는 명칭은 곤란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아홉 번 등장하고 서명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명기했다. 우리는 남조선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다.”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대표단 단장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꿉니다. “중국 대표단은 우리 정부의 동의를 받아 서울에 온 손님이다. 주인의 국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손님이 주인에게 따귀를 갈기는 것과 같다. 내 성이 공(孔)가다. 예절과 겸양(謙讓)을 강조한 공자의 후예다.” 협상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9년 뒤 한·중 양국은 정식으로 수교합니다. 중국은 남조선 대신 한국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합니다. 탈취범 6명은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대만으로 추방됩니다(헤이그 협약에 의하면, 비행기는 착륙한 국가에 형사 관할권이 있기 때문에 중국이 주장하는 납치범들의 인도를 거부했습니다). 대만은 6인의 반공투사가 자유를 찾아왔다며 들썩거립니다. 총통 장징궈 접견은 물론 정착금도 300만 달러씩 받습니다. 그러나 납치범들의 우두머리인 줘창린은 도박과 투기로 보상금을 탕진하자 병원 부원장 아들을 유괴(돈을 노렸겠지요.) 살해해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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